
광화문광장이 몸살을 앓고 있다. 오세훈 서울 시장이 광화문광장에 6.25 참전 22개국을 기리는 ‘감사의 정원’을 조성한다고 하면서다. 이것은 지난해 광화문광장을 ‘국가상징공간’으로 만든다며 ‘100m 태극기 게양대’를 설치하고 ‘꺼지지 않는 불꽃’ 상징물을 세우겠다고 하자, 이념 논쟁이 일어나 철회하고, 그 대신 들고나온 방안이다. 서울시의 재빠른 변신이 놀랍지만, 이에도 호불호를 달리하고 있어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광화문광장을 ‘국가상징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다. 꼭 그리되어야 할 일이다. 국가 상징이 무엇인가? 이에는 무엇보다 역사성이 중요하다. 과거를 이어 미래를 여는 국혼(國魂)이 살아 숨 쉬어야 한다. 그런 뜻에서 광화문광장은 아직 역사성을 갖춘 상징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1962년 이순신 동상이 세워진 이래 광화문을 복원하고, 세종대왕상을 설치하는 등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른 땜질식 조성을 해왔지만, 따지고 보면 역사성이 모자란 즉흥적이고 과시적이며 특정 목적을 위한 형상화였다. 그러기에 추가로 ‘감사의 정원’을 덧붙인다고 하더라도 ‘국가상징공간’이기는커녕 서로 어울리지 않는 형상물의 뒤틀림을 낳을 수 있다.
광화문광장에 역사가 있는가? 기막힌 역사가 있다. 그것은 1,100여 년 전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는 역사상 두 개의 광화문이 있었다. 하나는 고려 궁궐의 정문 광화문(廣化門)이고, 또 하나는 조선 궁궐의 정문 광화문(光化門)이다. 둘은 앞 글자의 한자가 고려는 ‘廣(넓은 광)’ 조선은 ‘光(빛날 광)’으로 다른데, 발음이 같고 뜻도 ‘임금의 큰 덕(德)이 나라를 비춘다’로 같아서 사실상 같은 이름이라고 할 것이다. 고려보다 더 좋은 나라를 만든다며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이 왜 나라의 얼굴인 궁궐(경복궁)의 정문 이름을 고려와 똑같이 지었을까? 어떻든 고려 궁궐이 919년에 지어졌으니 광화문이란 이름은 1,100년을 넘게 이어온 이름이다. 다만 여태껏 우리가 이를 모르고 살아왔다.
옛 왕조시대에 수도의 최고 중심 도로는 궁궐과 도성의 남북대로와 동서대로가 만나는 교차로 사이의 도로다. 지금의 세종로이고 이를 주작대로(朱雀大路)라 일컫는다. 현재 광화문광장(세종로)의 폭은 100m이다. 6.25 전쟁 중에 광화문 일대가 파괴되어 폐허가 되자, 복구하면서 1952년 3월 25일 내무부고시로 정했다. 그 이전은 일제강점기인 1912년 일제가 고시한 약 53m였다. 일제는 왜 그렇게 고시했고, 조선시대에 실제의 폭이 그랬을까? 하지만 이에 관해서는 기록과 정보가 전해지지 않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고려의 광화문과 광화문광장은 어땠을까? 1123년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은 광화문이 위용이 넘치고 화려하다며 찬탄했다. 광화문광장은 폭 약 60m로 추정되고, ‘십자 거리’ 또는 ‘십자거리시전’ 등으로 불렸다. ‘십자거리시전’이라 함은 도로 양측에 상가가 건립된 시장 거리였기 때문이다. 이곳 상가는 개별의 독립 건물이 아니고, 길이 500m가량의 연이어서 지은 장랑(長廊)이었다. 다시 말하면 광화문광장의 주작대로는 500m가량의 장랑이 가로 벽을 이루는 전문 상가 거리였다. 또한 ‘십자거리시전’은 도로에 격구장이 설치되어 있었고, 사시사철 축제로 붐볐다. 대표적으로는 오월 단오절 3일간의 축제다. 축제 때 이곳에는 격구 경기가 열리고, 격구장 맞은 편에 채붕이란 무대가 가설되어 300여 명의 여자 무용수가 출연하는 화려한 공연이 펼쳐졌다. 개경 시민들은 축제를 즐겼고, 그를 통해 스포츠와 공연예술을 꽃피웠다. 이것은 동시대에 세계 최고 수준의 시장 축제라 할 수 있다. 물론 중국을 위시한 동아시아에서는 유래가 없는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문물이었다.
![경복궁 중건 이후 육조거리 모형도. [사진출처 = 서울문화IN, 서울역사문화박물관]](https://pimg.mk.co.kr/news/cms/202503/12/news-p.v1.20250307.bb43ee32e2924324a439d075a197fcdd_P1.jpg)
조선은 어땠을까? 조선의 광화문은 처음에 이름이 없었다. 조선은 1395년 경복궁을 창건하고 동·서·남에 성문을 세웠는데, 이름을 짓지 않고 그냥 동문, 남문(정문), 서문 등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30여 년 후 1425년 세종대왕이 집현전(集賢殿)에 이름을 짓도록 지시하고, 이에 집현전 학사들이 남문을 광화문(光化門), 동문을 건춘문(建春門), 서문을 영추문(迎秋門)으로 작명했다. 뒤늦은 작명도 의아한데, 하필 정문 이름을 고려의 광화문과 발음과 뜻이 같도록 작명한 것이다. 당시 집현전 학사들은 고려 말에 관리였거나 청장년의 나이였다. 고려의 광화문을 모를 리가 없다. 또한 당시는 고려의 광화문이 건재하고 있었으므로, 뻔히 알면서 발음이 같은 이름으로 작명했다. 왜 그랬을까? 무릇 유사한 모양의 두 물건에서 하나는 이름이 있고 하나는 이름이 없으면 둘 다 같은 이름으로 부르고, 또 두 물건이 같은 이름일 경우 모양이 유사하다고 여기는 것이 일반의 이치다. 따라서 집현전에서 한자만 살짝 바꾸어 광화문으로 작명했다면 두 문은 겉모습이 판박이로 닮았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광화문광장도 미스터리다. 조선은 제후국의 법도에 따라 한성의 도로를 건설하고 1426년 세종 때 대로, 중로, 소로에 이르기까지 모든 도로의 명칭과 폭을 기록한 도로대장을 작성했다. 도로 폭은 대로 56척(약 17.5m), 중로 16척(약 5m), 소로 11척(약 3.4m)이었다. 이후 도로 폭은 『경국대전』에 규정하여 법제화되었다. 광화문 앞 도로는 대로이므로 17.5m에 해당하지만, 도로대장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사람들은 도로 양편에 이조, 호조, 예조 등 육조(六曹)의 관아가 있어 통상 ‘육조거리’, ‘육조 앞’ 따위로 불렸다. 물론 폭이 얼마인지도 모른다. 과연 폭이 얼마였을까?
의문을 푸는 열쇠는 광화문광장(세종로)의 땅 밑에 묻혀 있었다. 그것은 뜻밖이었다. 2008년 광화문광장을 조성하기 위한 발굴 조사에서 폭 58m의 도로가 발굴된 것이다. 이 도로는 조선 초기에 인공의 흙다짐으로 만든 토층의 도로로 밝혀졌다. 흙다짐한 도로 폭이 58m이므로 도로 양측의 배수구를 참작하면 폭은 60m 이상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도로대장이나 어떠한 문헌 사료도 폭 58m 육조거리에 관한 기록이 없다. 그렇다면 조선은 비록 『경국대전』에 대로를 56척(17.5m)으로 규정해 놓았지만, 육조거리는 애초에 폭을 58m로 조성했다고 볼 것이다. 어떻든 육조거리 폭 60m는 ‘십자거리시전’ 폭 60m와 비슷하다. 한편 육조거리의 폭이 58m라면 일제가 약 53m로 고시한 것은 이를 약간 줄인 것이 된다.
조선은 스스로 제후국을 표방했다. 제후국은 황제국에 비해 도읍의 성곽은 물론이고 궁궐의 규모와 위세 장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 단계 아래다. 제후국의 법도에 의하면 한성은 개경에 비해 성곽이나 궁궐 따위가 훨씬 작아지고 볼품이 없어지게 된다. 정도전을 위시한 조선의 설계자들은 고려 백성에서 조선 백성으로 바뀐 사람들, 더군다나 한성으로 이주한 개경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한성의 품격이 개경에 뒤지지 않아야 했다. 그래서 경복궁의 정문을 고려의 광화문과 유사한 형태로 짓고, 앞 광장 역시 비슷한 모양새로 조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축제는 열리지 않았다. 조선이 성리학에 경도되어 축제를 사회 기강을 해치는 나태한 놀이판으로 여기고 폐지했기 때문이다. 광장은 텅 비어 있었고 근엄하고, 엄숙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기본으로 유지했다. 가끔은 임금의 행차나 군대 출정식 등 볼거리가 있었고, 밤낮으로 시끄럽기도 했다. 신하와 유생들이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고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따위로 엎드려 울며 밤낮을 지새울 때다.

우리는 고려시대 이래로 천년이 넘게 수도에 폭 60m에 달하는 광장을 만들어 놓고 살았다. 이것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역사적인 문물일 것이다. 조선은 비록 제후국으로 몸을 낮추었지만, 광화문광장은 고려의 모습을 이어갔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조선 건국의 주역들은 이를 민족 정체성의 구현으로 존중하고, 이것만은 이어가야 할 문물로 여겼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광화문광장은 단순히 조선왕조의 얼굴에 그치지 않는다. 민족의 얼이 꽃피는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문물로 인식되고 거듭나야 한다.
광화문광장은 새로이 다듬는 지혜가 필요하다. 한갓 보기만 좋게, 특정 인물과 사건만 각인되게, 또 사람들이 편리하기만 하게 조성해서는 안 된다. 어떤 정치인, 어떤 학자, 어떤 단체의 취향과 목소리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어울리며 소통하고, 천년을 넘게 이어 온 역사성을 반추하며 공감하는 문화공간이어야 한다. 공연예술이 살아있고 격구 경기의 환호성이 울려 퍼지는 감성과 감각이 필요하다. 고려와 조선을 잇고, 앞으로 천년을 이어갈 문화 광장의 이미지를 담고 내뿜어야 한다. 미래 세대가 환호하고 선진 한국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재조성되어야 한다.
[공창석 前경상남도 행정부지사(現매경안전환경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