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지구 꼭 이뤄야하지만
플라스틱 퇴출은 현실성 없어
목재 고갈 더 빨라질 우려
플라스틱 재활용률 9% 그쳐
순환경제 기술 개발 힘써야
플라스틱 퇴출은 현실성 없어
목재 고갈 더 빨라질 우려
플라스틱 재활용률 9% 그쳐
순환경제 기술 개발 힘써야

유엔환경계획(UNEP) 제5차 정부간협상위원회(INC-5)가 지난 2일 빈손으로 막을 내렸다. 정부간협상위원회는 플라스틱 오염 종식에 필요한 국제법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플라스틱협약'을 마련하기 위한 한시적 회의체다. 특히 부산 INC-5는 우루과이(2022년 11월), 프랑스(2023년 5월), 케냐(2023년 11월), 캐나다(2024년 4월)에서의 논의를 근거로 플라스틱 생산량을 규제하는 최종안을 확정하는 마지막 시도였다. 그런데 플라스틱 원료인 석유·천연가스를 생산하는 산유국의 반발에 발목을 잡혀 버렸다.
오늘날 인류는 매년 4억6000만t의 플라스틱을 생산한다. 플라스틱 생산량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인구가 늘어나고, 삶의 질이 개선되면 플라스틱 수요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2040년에는 플라스틱 생산량이 약 60% 증가한 7억3600만t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추정이다.
모든 '소재'와 마찬가지로 플라스틱에도 '선형 경제'의 패러다임이 적용된다. 자연에서 '채취'한 석유·천연가스를 화학적으로 가공해서 '생산'한 플라스틱을 '사용'한 후에 다양한 방법으로 '폐기'하게 된다는 뜻이다. 결국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플라스틱은 폐기돼 쓰레기로 버려지게 된다. 굳이 '일회용(disposable)'이 아니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우리가 버린 플라스틱 쓰레기가 산과 도시는 물론 강·호수·바다까지 심각하게 오염시키고 있다. 태평양에는 거대한 플라스틱 쓰레기 섬이 떠다니고, 코에 플라스틱 빨대가 꽂혀 괴로워하는 바다거북도 있었다. 아프리카·동남아시아는 선진국에서 실어 보낸 플라스틱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심지어 우리가 버린 플라스틱 쓰레기가 잘게 부서져서 만들어진 미세·나노 플라스틱이 물과 공기를 오염시키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되고 있다. 플라스틱 쓰레기의 소각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의 피해도 심각하다.
미래 세대를 위해 '건강한 지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적 주장은 아무도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100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다'는 플라스틱의 궁극적 퇴출이 능사일 수는 없다. 과연 플라스틱 없는 세상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산유국이 걱정하는 경제적 부담도 만만치 않다. 경제적 부담이 산유국에만 한정된 것도 아니다. 세계 5위의 원유 정제 시설과 세계 4위의 에틸렌 생산 설비를 가지고 있는 우리가 감수해야 할 부담도 작지 않다. 자칫 플라스틱 퇴출이 1970년대 '중화학산업'으로 시작한 우리의 산업 기반을 통째로 뒤흔드는 위험한 시도가 될 수 있다. 플라스틱 생산에 관련된 넓은 의미의 '석유화학산업'은 여전히 우리가 함부로 포기할 수 없는 핵심 국가기간산업이다.
플라스틱 퇴출의 사회적 파장도 걱정해야 한다. 플라스틱 생산량 규제의 실질적인 피해는 온전하게 저소득층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에게 돌아간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회적 약자에게 값비싼 천연 소재로 생산한 제품은 꿈에서나 그려보는 그림의 떡이다. 저렴하면서도 품질이 뛰어난 합성 섬유·가죽·고무·비닐·플라스틱이 사라진 세상은 사회적 약자에게 훨씬 더 가혹할 수밖에 없다.
플라스틱 퇴출이 반드시 지구 환경을 더 깨끗하고 건강하게 만들어준다는 기대도 섣부른 것이다. 플라스틱은 처음부터 천연 목재의 대체재였다. 20세기 중엽에 플라스틱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천연 목재의 소비가 큰 폭으로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 그 증거다. 1980년대에는 플라스틱 사용량이 목재 사용량을 넘어섰다. 그런 추세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현재 천연 목재 소비량은 연평균 4.2%씩 줄어들고 있다. 자칫 지구를 더 건강하게 만들겠다고 시작하는 플라스틱 퇴출이 목재를 비롯한 천연 소재의 고갈을 부추기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천연 소재의 수요가 늘어나면 지구 환경은 더욱 심각하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보건위생 환경도 걱정해야 한다. 플라스틱 포장재가 사라진 세상에서 가공식품·의약품·공산품의 정상적인 생산·유통은 불가능하다. 종이·금속·유리와 같은 천연 소재로 만든 전통적인 포장재로는 상품의 부패·변질을 막아내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자칫하면 우리 모두가 현대의 분업을 모두 포기하고 가난하고 힘겨웠던 자급자족 시대로 되돌아가게 될 수도 있다.
플라스틱이 지구를 오염시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앞으로 상황이 더욱 나빠질 수 있다는 우려도 심각하다. 그렇다고 플라스틱의 생산을 규제하고, 궁극적으로 플라스틱을 퇴출하겠다는 발상은 용납하기 어려운 비겁하고 옹졸한 하책(下策)이다. 아무리 위험하고 더러운 기술이라도 어쩔 수 없이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플라스틱도 예외일 수 없다.
실제로 50만년 전부터 사용한 '불'이 언제나 유용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화재(火災)'의 피해는 상상을 넘어선 것이었다. 실제로 인류의 역사는 '화재의 역사'로 가득 채워져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불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불을 안전하게 사용하고, 화재를 감지해서 진압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화재를 예방하는 합리적인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우리의 선택이었다.
플라스틱의 재사용(reuse)·재활용(recycle)을 통한 '순환경제'에 필요한 '기술'과 '제도'에 대한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전 세계적으로 플라스틱 재활용률은 9%에 지나지 않는 현실도 개선해야 한다. 플라스틱은 100년이 지나도 썩지 않아서 문제라는 인식은 심각한 사실 왜곡이다. 우리가 책임지고 순환해야 하는 자원인 플라스틱을 함부로 버려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문제를 플라스틱에게 떠넘기는 비겁한 자세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