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기업인 TSMC가 미국에 1000억달러(약 145조원)를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기존의 650억달러에 더하면 1650억달러를 투자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 투자는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폭탄을 피하면서 미국 빅테크와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다.

이로 인해 파운드리 분야에서 한국이 설 땅은 더욱 좁아질 전망이다. 지난해 3분기 기준 TSMC의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64.9%로, 삼성전자(9.3%)를 압도한다. 3나노미터(㎚) 미만의 첨단 반도체는 90% 이상이 TSMC에서 생산될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1000억달러를 들여 미국 애리조나에 공장 5개를 더 짓겠다고 하니, 미국 빅테크의 수요는 TSMC가 독점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TSMC가 이번 투자로 미국 관세를 피하는 이점을 누리고, 한국은 그러지 못한다면 타격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날 트럼프는 대만이 25% 이상의 고율 관세를 피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했는데,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한국 기업도 관세를 피하고 싶으면 미국에 투자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미국 빅테크와 파운드리 거래처를 붙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투자를 늘리기가 쉽지 않다. 삼성전자는 작년 4월 발표한 450억달러의 투자 규모를 370억달러로 줄이겠다고 한 처지다.

이런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혁신 외에는 답이 없다. TSMC의 2009년 위기를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당시 파운드리 수율이 낮아지고 글로벌 금융위기가 겹쳤을 때, TSMC는 연구개발(R&D) 예산을 1.6배로 늘리고 고객의 니즈에 부응하는 '맞춤형 혁신'으로 위기를 돌파했다. 삼성전자도 그럴 수 있다. 이미 메모리에서 축적된 혁신의 경험이 있다. 20조원을 들여 기흥에 짓고 있는 '차세대 반도체 R&D 단지(NRD-K)'를 거점으로 전방위적 혁신을 가속화해야 한다.

정부와 국회도 도와야 한다. 이날 트럼프가 밝혔듯이 반도체는 국가 안보 사안이다. R&D만이라도 '주52시간 근로 예외'를 적용해달라는 산업계의 호소만큼은 받아들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