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선보인 구글의 웨이브(Wave)라는 서비스를 기억하시는지.
결론부터 말하면 이 서비스는 망했다. 사장된 구글 서비스를 모아놓는 ‘Killed by Google: Google Graveyard’에 고이 잠들어 있다. 이 서비스 기능을 보면 왜 사라졌는지 의아할 정도다. 이메일, 인스턴트 메시징, 블로그, 멀티미디어 관리, 문서 공유 등 다양한 기능을 하나로 통합했다. 한마디로 ‘웨이브 하나면 다 된다’는 게 구글의 야심 찬 구상이었다. 이처럼 화려한 서비스가 왜 사망 선고를 당했을까.
서비스가 공개된 뒤 시장에서는 “대체 어디에 쓰는 서비스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서비스가 너무 다양하고 복잡한 탓이다. 특히 사용자가 메시지 창에서 쓰고 있는 내용을 상대방이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인스턴트 메시징’ 기능에 혹평이 쏟아졌다. 웨이브의 인스턴트 메시징은 타이핑하는 내용을 실시간으로 상대방에게 전송해주는 혁신적인 기술이었다. 그러나 실수로 잘못 쓰거나 수정이 필요한 내용을 상대방이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다수 이용자가 불편함을 느꼈다. 개발자가 이전에 없었던 ‘최고’ 기술 개발에만 몰입했지, 소비자 마음을 읽지 못했던 탓이다.
구글 신은 모든 것을 안다?
빅데이터가 읽지 못하는 소비자
‘구글 신은 모든 것을 안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현대인은 엄청난 양의 데이터와 최첨단 알고리즘이 모든 해법을 제시할 것 같은 ‘빅데이터(Big Data)’ 시대를 산다. 그러나 전 세계 데이터의 약 80%는 저장 후 분석에 활용되지 못하는 ‘다크데이터(Dark Data)’로 전락한다. 최근 몇 년간 글로벌 기업들이 빅데이터 기술에 대거 투자했지만 데이터로부터 혁신적인 가치를 끌어내지 못한 이유다.
앞선 웨이브 사례도 겉으로 보이는 데이터만으로는 ‘진짜’ 시장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는 교훈을 던진다. 인류학자인 백영재 박사는 ‘씩데이터(Thick Data)’라는 저서에서 데이터를 분석할 때 인류학적인 관점이 추가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양적인 데이터만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진실을 ‘씩데이터’가 일깨워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씩데이터라는 용어는 노키아 실패를 예견한 트리시아 왕 박사가 처음 사용했다. 그는 빅데이터에 투자한 기업의 8%만이 빅데이터로 가치 있는 결과를 얻어낸다고 했다. 빅데이터는 전력망, 물류처럼 변동이 작고 안정적인 비즈니스에서 유용하다. 그러나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체계, 가령 인간과 관련한 문제에 약하다. 트리시아 왕은 빅데이터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 인문학적 이해가 필요하다고 역설했고, 이것이 ‘씩데이터’ 개념이다. 씩데이터는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의 ‘thick description(두터운 묘사)’에서 따왔다. 기어츠는 어떤 사회 조직이나 생활양식에 대한 인류학자의 기록은 ‘두터워야 한다’며 깊이 있는 관찰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씩데이터 개념을 이해하려면 빅데이터와 비교하면 된다. 빅데이터가 숫자에 기반한 정량(定量) 데이터라면, 씩데이터는 정성적(定性的)이다. 빅데이터는 패턴을 식별하기 위해 변수를 제거하지만 씩데이터는 복잡성을 수용한다. 빅데이터가 ‘무엇을 얼마나’에 관해서 설명한다면, 씩데이터는 ‘어떤 맥락에서 왜’에 관해 말한다.

“머신러닝에 의존하는 빅데이터는 정확성을, 인간 학습에 의존하는 씩데이터는 보편적인 진실을 추구한다. 빅데이터는 불확실성이 적을 때 유리하고, 반대로 불확실성이 클 때는 복잡성을 수용하는 씩데이터가 도움이 된다. 빅데이터가 과거 벌어진 일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말해준다면, 씩데이터는 미래에 있을 일, 아직 알지 못하는 일을 알려준다.”
백 박사는 “빅데이터와 씩데이터는 서로 반대되거나 우월을 가리는 개념이 아니다”라며 “기업이 소비자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두 가지 모두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미래를 예측할 힌트는 언제나 ‘무엇’이 아닌 ‘왜’에 있었기 때문에 씩데이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이것이 넷플릭스, 아디다스, 레고 등의 초일류 기업들이 씩데이터에 주목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비즈니스에 어떻게 적용했나
아디다스, ‘참여관찰’로 기회
글로벌 기업은 소비자를 이해하기 위해 씩데이터를 적극적으로 활용 중이다.
넷플릭스가 대표적이다. 넷플릭스는 빅데이터와 씩데이터를 적절하게 활용해 성공 발판을 마련했다. 먼저 빅데이터를 통해 이용자 다수가 동일한 프로그램을 한 번에 두 편 이상 연속해 시청하는 ‘몰아 보기(빈지워칭·Binge Watching)’를 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다만 현상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빈지워칭 의미를 파악하고 서비스를 개선하기 위해 회사가 고용한 인류학자가 여러 가정을 방문해 이용자의 TV 시청 방식을 직접 관찰했다.

빈지워칭을 즐기는 이용자 입장에서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결말을 알게 되는 ‘스포일링’이다. 그런데 참여관찰을 해보니 큰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났다. 실제로 넷플릭스 이용자는 원치 않은 스포일러로 시리즈 시청을 중단한 적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콘텐츠를 시청할 계획이 없었거나 알지 못했던 시리즈에 관심이 생긴 경우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수집한 씩데이터가 넷플릭스 성공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넷플릭스는 이용자 관찰 결과를 바탕으로 자체 제작한 ‘하우스 오브 카드’ 시즌1의 에피소드 13편을 빈지워칭이 가능하도록 한꺼번에 공개했다. 새로 제작한 드라마 에피소드를 한꺼번에 공개하는 방식은 2013년 당시 파격적이었다. 드라마를 순차적으로 공개하면 2~3개월에 걸쳐 구독자를 견인할 수 있다. 고객을 묶어두는 록인 효과를 포기한 셈이다. 대신 넷플릭스는 이때부터 빈지워칭을 핵심 정체성으로 삼았다. 넷플릭스를 이용하면 다음 회차가 공개되기까지 인내할 필요가 없고, 원하는 순간에 줄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이미지를 내세웠다. ‘하우스 오브 카드’가 넷플릭스에 공개되자 미국 내 구독자는 200만명, 해외 구독자는 100만명 증가했으며 37억5000만달러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레고 역시 씩데이터를 활용해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했다. 레고는 1990년대 들어 출생률 저하, 비디오 게임의 부상 등으로 위기를 맞았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레고는 대규모 설문조사를 실시해 빅데이터를 수집했다. 그 결과 당시 아이들은 시간에 대한 압박이 심하고 놀이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들여 조립하는 블록 형태 장난감은 더 이상 인기를 끌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후 비디오 게임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이 전략은 어린 소비자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을 뿐 아니라 어릴 때 레고를 갖고 놀던 부모 세대에게도 외면받았다. 이때 덴마크 컨설팅그룹 ReD와 협업해 소비자 생활 반경 안으로 들어가 직접 관찰키로 했다. ReD는 전통적인 경제학이나 경영학이 아닌, 인문학을 컨설팅 기법에 접목하기로 유명하다. 직원 대부분 경영대학원(MBA) 출신이 아니라 인류학·사회학·철학 전공자다.
참여관찰을 위해 ReD는 조사팀을 꾸려 미국과 독일 가정집에 파견했다. 소비자와 심층 인터뷰를 하면서 일상을 사진과 영상물로 기록하고, 함께 장난감을 쇼핑하면서 몇 달간 씩데이터를 수집했다. 그 결과 아이들은 난이도가 높은 놀이 경험에 강한 의욕을 보이며, 이를 통해 성취감을 느낀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비디오 게임을 좋아하는 이유도 즉각적인 만족감보다는 점수를 얻기 위해 매우 정교한 기술 습득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아이들이 레고처럼 복잡한 블록을 조립할 시간이 없고, 집중력도 약하다는 가정 자체가 잘못됐다는 뜻이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레고는 조립에 시간이 오래 걸려도 그만큼 도전할 가치가 있고 흥미를 유발하는 장난감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런 신제품에 아이들은 열광했다. 레고는 위기를 딛고 반등에 성공했다.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 업체 인터브랜드가 발표한 ‘글로벌 100대 브랜드 2022’에 따르면 레고의 브랜드 가치는 세계 63위다. 장난감 업계에서는 압도적 1위다. 신규 시장에 섣불리 진출하기보다 원점으로 돌아가 소비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에 귀를 기울인 덕분이다.
ReD의 참여관찰은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에서도 빛을 발했다. 아디다스는 오랜 기간 스포츠 엘리트를 위한 제품을 만들었다. 매출 5%에 해당하는 최고 선수를 위해 제품을 개발하면, 선수를 동경하는 일반인 매출이 나머지 95%를 채운다는 전략이다. 그런데 아디다스는 2003년 산악자전거나 요가 매트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부쩍 많아진 현상을 알아채고 ReD에서 전문가를 영입해 참여관찰을 시작했다. 연구팀은 아디다스 고객과 함께 러닝을 하거나 요가를 배우고 산악자전거를 탔다. 운동의 목적과 제품을 고르는 기준, 교체 시기 등을 관찰하고 인터뷰했다.
결과적으로 아디다스의 기존 전략과는 정반대의 결론이 나왔다. 고객은 스포츠 경기에 출전해 승리하려고 아디다스 제품을 구매하지 않았다. 단지 더 건강한 몸과 마음을 지니기 위해 운동했다.
아디다스는 머지않아 스포츠 브랜드 시장에 큰 변화가 올 것으로 전망하고 전략을 수정했다. 앞으로는 운동선수의 전통적인 스포츠가 아니라 일반인의 도시 스포츠에 주목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때부터 일부 스포츠 스타가 아니라 평범한 소비자를 위한 브랜드로 이미지를 서서히 바꿔갔다. 캠페인도 180도 달라졌다. 아디다스는 2004년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엘리트 운동선수를 타깃으로 한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캠페인을 펼쳤다. 그러나 2011년에는 나이와 성별, 직업을 뛰어넘어 모두가 열정으로 하나 되는 새로운 생활 방식을 아디다스가 선도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아디다스 올인’이라는 캠페인을 선보였다. 사회 변화를 알아채고 그 의미를 분석했기 때문에 10년 이상 내다볼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소비자 일상을 파고들어 빅데이터로는 얻을 수 없는 씩데이터를 수집한 결과다.

LG·팔도, 국내 기업도 관심
씩데이터 간과한 실패 사례도
국내 기업은 정성적 데이터에 관심이 낮은 편이다. 그러나 일부 기업은 글로벌 컨설팅 회사와 협업할 정도로 씩데이터에 관심을 갖는다. 그중 한 곳이 LG전자다. LG전자는 과거 글로벌 디자인 컨설팅 회사 아이디오와 협업해 소비자 욕구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이때 익힌 통찰을 내부에서도 도출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해 나온 제품이 이동식 무선 스크린 ‘스탠바이미’다. 개인 공간에서 개별적으로 콘텐츠를 즐기고자 하는 젊은 세대 생활 방식을 정확하게 반영했다는 평가다. 우리나라는 핵가족화로 원룸에 거주하는 인구가 많아졌다. 원룸 규모를 고려하면, 벽과 벽 사이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TV 설치는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렇다고 책상에 컴퓨터를 놓고 콘텐츠를 시청하기에는 자세가 불편하다. 누워서 스마트폰으로 보기에는 화면이 작고 떨어뜨릴 위험이 존재한다. 이런 고민을 해결한 제품이 스탠바이미다. 현대인 생활 방식에 맞춰 원룸에서 누워 시청하기에 적절한 제품이다. 빅데이터만으로는 알 수 없는 생활 방식의 변화를 찾아낸 결과다.
러시아 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팔도 ‘도시락면’도 그 나라의 독특한 생활 방식과 들어맞아 성공한 사례다. 러시아인의 특징은 기차여행을 많이 한다는 점이다. 영토가 넓기 때문에 장거리 기차여행도 일상이다. 팔도가 러시아에 직접 가서 관찰한 결과, 장거리 기차여행을 하는 사람은 대부분 사각 용기에 음식을 포장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기차가 흔들릴 때 내용물이 밖으로 튀지 않으려면 바닥이 납작하고 용기가 넓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팔도 도시락면은 다른 컵라면과 달리 뚜껑이 있다. 씻어서 재사용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실제로 여행객 다수가 도시락면의 사각 용기를 다음 기차여행 때 재사용한다는 사실을 포착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팔도는 품질 향상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추운 지역에 사는 사람은 기름기 있는 음식을 좋아한다는 점에 착안해, 도시락면에 마요네즈가 들어간 신제품을 내놨다.
이후 도시락면은 러시아 국민 라면에 등극했다. 러시아 용기면 시장에서 점유율 60%를 차지했다. 그 뒤로 다른 러시아 업체도 팔도 도시락면과 같은 형태로 용기를 교체했다. 러시아에서 도시락의 러시아식 발음인 ‘다쉬락’이 용기 라면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로 쓰일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수치로는 나타나지 않는 러시아의 생활 방식이 팔도의 성공을 이끌어낸 배경이다.
반대로 씩데이터를 외면해 실패한 사례도 수두룩하다.
한때 세계 최고 휴대전화 제조사로 불리던 노키아가 대표적이다. 애플 아이폰이 등장하고 2년 후 노키아는 새로운 스마트폰 개발 전략을 위해 수많은 고객 데이터를 확보했다. 동시에 인류학자를 고용해 중국 저소득층의 휴대전화 사용 실태를 조사했다. 인류학자는 중국 저소득층의 일상으로 파고들어 수개월 참여관찰을 시행했다. 관찰 결과는 놀라웠다. 저소득층도 스마트폰을 향한 강한 열망을 품고 있으며, 월급을 훌쩍 뛰어넘는 가격이라도 아이폰을 구매할 의사가 확실하다는 결론이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당시 노키아가 추진하던 저소득층 사용자를 위한 저렴한 스마트폰 개발 전략을 재고해야 한다는 것이 참여관찰을 실시한 인류학자 주장이었다.
결과적으로 노키아는 이 연구 결과를 무시했다. 노키아가 자체 수집한 빅데이터에서는 그런 징후를 전혀 발견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인류학자의 참여관찰 연구 샘플이 100개 정도로 작은 크기라는 점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정성적 데이터를 신뢰하지 않고 지나치게 숫자에만 의존한 결과 노키아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씩데이터 잘 활용하려면
빅데이터 결합해 스마트하게
씩데이터 중요성이 커진다고 빅데이터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씩데이터를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빅데이터와 적절한 융합이 필요하다.
빅데이터가 ‘무엇을 얼마나’에 관해 설명한다면, 씩데이터는 ‘어떤 맥락에서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준다. 즉, 씩데이터와 빅데이터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다.
씩데이터와 빅데이터를 제대로 결합하면 올바른 의사 결정을 이끄는 양질의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 의견이다. 이 같은 결합으로 얻어지는 데이터가 이른바 ‘스마트 데이터’다. 스마트 데이터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정성적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통한 가설을 세우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가설을 검증하는 것이 빅데이터의 역할이다. 가설 검증을 마쳤다면, 가설이 실질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해석을 해야 한다. 이 해석에 근거해 의미 있는 스마트 데이터를 도출할 수 있다. 스마트 데이터는 기업의 실질적인 의사 결정을 이끌어내고, 실행으로 옮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구글의 ‘휴먼 트루스’로부터 스마트 데이터 활용법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휴먼 트루스는 구글 내 글로벌 판매팀의 조사 부서다. 그러나 일반적인 조사 부서와는 조사 규모나 방식 등에서 다르다. 빅데이터와 씩데이터를 활용해 이상적인 방법으로 소비자를 연구하고 결론을 도출한다. 이 조직은 ‘구글의 인간 행동 전문가’를 자처할 만큼 기업과 소비자에 관한 통찰력 있는 연구 결과를 도출한다.
휴먼 트루스의 조사 방식은 먼저 소비자에 대한 씩데이터를 모아 깊이 있는 통찰을 얻는다. 이후 구글이 보유한 빅데이터를 통해 앞서 얻은 통찰을 증명한다. 필요하다면 설문조사나 소셜미디어(SNS) 분석 등도 시행한다. 마지막으로 씩데이터와 빅데이터를 결합해 스마트 데이터를 도출한다. 연구를 통해 얻은 결과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어떤 의사 결정으로 이어져야 하는지 시사점을 제시한다.
이 과정을 문제없이 수행하기 위해서는 기업 문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씩데이터로 얻은 통찰이 적절한 의사 결정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변화와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업 문화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숫자에만 매몰돼 몰락한 노키아의 사례는 혁신과 변화를 거부하는 기업에서 씩데이터나 스마트 데이터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변화와 혁신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수평적 의사 소통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 모든 직원이 창의적인 의견을 도출할 수 있어야 하고, 경영진은 이를 독려하고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런 기업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직원에게 자율권을 부여해 일의 의미를 깨닫고 주인 의식을 발휘할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 의견이다. 직원 스스로가 명확한 목표 의식을 공유하고, 이를 위해 효율적인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조언이다.
백영재 박사는 “직원이 정보를 공유하고 더 나은 의견을 도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때 비로소 일하는 방식이 바뀌고 문화가 달라진다”며 “이를 통해 기업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창의적이고 유연한 집단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 상대주의 기반…총체적 맥락 파악해야
백영재 박사는 ‘씩(Thick)’의 철자를 따서 씩데이터를 얻기 위한 다섯 가지 분석법을 소개했다.

첫째, 관용(Tolerance). 문화 상대주의에 기반을 두고 낯섦에 관대해져야 한다. 씩데이터를 참여하려면 참여관찰이 핵심이다. 초심자 마음으로 소비자를 관찰하려면 다른 문화에 대해 너그러워져야 한다. 그래야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집단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둘째, 소비자의 숨겨진 욕망(Hidden Desire)을 파악하는 것이다. 역시 관찰이 중요하다. P&G의 인류학자들이 신제품 개발을 위해 가정집을 방문했다. 끈질기게 관찰해보니 소비자는 청소 자체보다 더러워진 물걸레 빨기를 더 힘들어한다는 점을 알게 됐다. P&G는 이런 소비자 욕구를 감안해 ‘스위퍼’라는 제품을 개발했다. 더러워진 걸레를 세탁하는 대신 버리고 새것으로 교체하도록 만들었다.
셋째, 정보 제공자(Informants)를 적극 활용한다. 때로는 전형적인 소비자 집단이 아닌, 극단적인 성향의 소비자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넷째, 맥락(Context)을 이해해야 한다. 소비자 말만 믿는 게 아니라 총체적인 맥락을 찾아야 씩데이터를 분석해낼 수 있다. 무표정한 표정의 남자 얼굴 사진이 있다. 장례식 사진에 이어 이 사진을 내밀면 관찰자는 남성이 슬퍼하고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책이 빽빽하게 꽂힌 서가 사진 뒤에 이 남성 얼굴을 본 사람은 ‘따분함’을 느낀다. 같은 표정이지만 서로 다른 감정을 유추하는 건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AI)이 똑같다고 여길 표정을, ‘맥락’을 통해 다른 해석을 내려야 한다.
다섯째, 참여를 통해 공감(Kindred Spirit)해야 한다. 소비자 민낯을 보려면 공감과 감정이입은 필수다. 게임사 블리자드 커뮤니티팀은 고객의 ‘페인 포인트(Pain Point)’를 잘 파악한다고 알려졌다. 이 팀이 특별한 노력을 하는 게 아니다. 커뮤니티 직원들이 블리자드의 강성 사용자기 때문에 게임의 장단점을 모두 꿰고 있다. 한마디로 ‘덕후’ 입장에서 고객을 이해하는 셈이다.
소비자는 ‘사람’…인문학 중요성 갈수록 커져
![백영재 인류학 박사 [윤관식 기자]](https://pimg.mk.co.kr/news/cms/202406/29/news-p.v1.20240628.d3b7daae82344317937d126fe6b17d31_P2.jpg)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결국 소비자는 사람입니다. 사람에 대한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죠.”
백영재 인류학 박사는 인문사회과학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질 것으로 내다본다. 사람을 이해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대략 10년 전에도 인문사회과학이 한창 인기 있던 시절이 있었다. 철학자나 역사학자 위상이 높았던 시기다.
그러나 그 흐름은 오래가지 못했다. 학자의 통찰을 실제 업무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해서다. 앞으로 사람에 대한 통찰을 통해 소비자를 깊이 관찰하고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부분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업무 성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백 박사의 생각이다.
예일대에서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은 백 박사는 이후 맥킨지앤드컴퍼니, CJ, 블리자드엔터테인먼트코리아, 구글, 한국필립모리스 등 유수의 기업을 거쳤다. 국내외 수많은 기업을 경험하면서 늘 아쉬움도 느꼈다.
외국에 비해 국내 기업은 정성적 데이터를 지나치게 간과한다는 점이다. 외국에서는 빅데이터와 씩데이터를 적절히 결합해 뛰어난 성과를 거둔 사례가 많지만, 우리나라 기업은 아직까지 씩데이터에 대한 개념조차 부족한 현실이다.
백 박사는 “우리나라 기업은 지나치게 정량적 데이터에만 매몰돼 있다”며 “정성적 데이터가 충분히 있는데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량적 데이터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라며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정성적 데이터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정성적 조사에 강점을 가진 아이디오 같은 글로벌 컨설팅 회사도 한국에 지사를 두지 않고 있다. 그만큼 한국에서는 정성적 데이터에 대한 수요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이 같은 현실을 백 박사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이유는 여러 기업을 거치며 정성적 데이터를 간과해 실패한 사례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백 박사가 거친 기업 중 블리자드나 구글 등 글로벌 기업도 소비자에 대한 이해를 간과해 실패한 경험을 갖고 있다. 블리자드가 개발한 ‘스타크래프트2’가 대표적이다. 기존 스타크래프트가 한국에서 왜 인기가 있었는지 제대로 분석하지 못해 실패로 이어졌다는 것이 백 박사의 분석이다. 한국의 어떤 문화적 맥락이 기존작의 성공 요인으로 작용했는지에 대한 통찰이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기업이 내놓는 제품이나 서비스는 소비자로부터 평가받는다. 공급자 중심으로 생각해선 안 되는 이유다. 백 박사가 사람에 대한 이해와 정성적 데이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도 이 대목에서 나타난다.
백 박사는 “앞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인재가 더 중요해질 것”이라며 “소비자의 소비 행위에는 숫자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 감정이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어떤 상황에서 서비스를 이용하는지 그 포인트를 관찰해야 한다”며 “마케팅 실무자는 물론 경영진도 씩데이터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명순영 기자 myoung.soonyoung@mk.co.kr 문지민 기자 moon.jimi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66호 (2024.07.03~2024.07.09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