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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극한갈등 치유하는 포용력 미술관은 사회통합 플랫폼

입력 : 
2025-03-19 17:53:08
수정 : 
2025-03-19 21: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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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경 명예기자 리포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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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을 맞은 지 올해로 80년이 된다. 우리는 80년 만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 국가 중 처음으로 유일하게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국가다.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은 국제적 위상을 높였고,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제공하는 나라'가 됐다. 하지만 선진국 대한민국 정치는 여전히 시끄럽고, 지금의 상황은 해방 전후의 정치적 혼란기를 연상시킨다.

여전히 국론은 이념을 넘어 지역·나이·성별로 나뉘어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고 있다. 이런 혼란의 원인 중 하나는 역사적으로 해방 이후 좌우 이념 대립에서 비롯된 정치적 양극화 문제가 여전히 미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일제로부터 해방 이후 우리는 극심한 좌우 이념 대립에 노출됐다. 그리고 일제 잔재 청산 등 중요한 일들을 모두 정치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이렇게 우리는 문화와 예술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완화하거나 치유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해방 공간에서의 급박한 정치적 상황과 경제적 재건이 우선시되면서, 문화와 예술의 상호 이해와 사회적 갈등 치유, 국민 간 공감대 형성이란 중요한 역할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한 것이 오늘의 분열을 낳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문화와 예술을 통해 사회적 통합과 치유를 도모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국립20C미술관 건립을 위한 노력도 그중 하나다. 한국 근대사의 복잡한 역사적 맥락을 조망하고, 이를 재해석하며 국민에게 새로운 공감대를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술관은 단순히 미술품을 전시하는 장소를 넘어, 역사적 갈등과 상처를 다루고 치유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또한 다양한 이해와 해석을 통한 전시와 프로그램은 과거를 이해하고 현재를 성찰하며, 미래를 모색할 기회를 제공해준다. 따라서 국립20C미술관이 설립되면 전제 군주국가에서 민주공화정의 근대국가로 넘어오는 시대를 문화적이며 중성적인 미술, 시각문화를 통해 다양한 측면을 균형 있게 조명해 국민 통합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 근대미술관 건립을 원하는 이들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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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미술관은 미술박물관의 줄임말로 문화예술 공간이자 매우 정치적인 의미가 강한 이중적 성격을 지닌 기구다. 우선 미술관은 다양한 인류의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이를 세계인과 공유하는 기관으로 인류 전체의 문화유산을 확산하는 문화예술의 보편적 가치를 통해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특정 국가의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자국의 예술적 독창성과 우수성을 강조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미술관이란 오직 '아름다운' 미술품을 감상하는 정서적 공간으로 이해했지만,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국가적·국민적 자부심과 애국심을 고취하고, 타국 문화예술과의 경쟁 속에서 최소한 동등하거나 우월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려는 경향을 띠며, 문화예술을 통해 국제정치적 역학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지닌 기관이다.

특히 미술관은 추상적인 국가와 민족이란 개념을 시각문화, 즉 미술이란 문화유산의 공유를 통해 '우리'란 개념으로 국민을 통합하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미술관은 피를 함께 나눈 형제는 아니지만, 미술작품을 통해 문화적 공동체란 인식을 함께해 국민을 하나로 묶어낸다.

프랑스가 공화정에 기반한 민주정을 수립하는 혁명을 거쳐 근대국가로서 면모를 갖추고 처음 루브르라는 미술박물관을 설립한 것도 미술관을 매개로 국민 통합과 교육을 통해 새로운 국가와 정부가 지향하는 가치를 공유하고 혁명의 성과와 가치를 국민에게 알리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다. 미술관은 혁명을 통해 국민 모두의 것이 된 왕실의 예술품을 전시함으로써 국민이 혁명의 주인이며 승리자라는 사실을 인식시켜 혁명 정신을 계승하고 공유하도록 했다. 이는 문화와 예술, 특히 실체가 있는 미술품을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인식을 통해 혁명 이전 왕정을 지탱해온 '왕권신수설'을 대체하는 힘으로 삼았다. 이렇게 루브르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했다. 루브르는 또 전통적 가치와 제도를 넘어, 새로운 사고방식과 이념을 탐구하며 사회·경제·정치·문화 전반에 걸쳐 새로운 변화를 추구한 시대정신인 근대적 정신과 태도를 앞장서서 실천한 선도적인 프랑스의 이미지를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루브르의 국내외적인 정치 문화적 성공 사례는 미국을 비롯한 신생 독립국가들로 하여금 앞다퉈 루브르 형태의 백화점식 종합박물관을 설립하도록 했다. 소련조차 러시아 혁명 이후, 트레티야코프갤러리(Tretyakov Gallery)를 확장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전시해 혁명 정신을 홍보했다.

근대국가의 조건인 민주 공화정과 산업혁명이란 두 개의 바퀴는 근대의 상징으로, 미술관·박물관은 이를 증거하는 기관으로 근대국가의 표상이 됐다. 특히 근대미술관이 없는 나라는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 변화에 둔감한 미개하거나 혁신의 시기를 놓친 게으른 민족이나 국가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많은 국가가 앞다퉈 근대적인 미술관을 건립했다. 본격적인 근대미술관의 출현은 1929년 뉴욕 근대미술관(MoMA) 개관을 시작으로 1930년대 독일의 도시 간 경쟁적인 미술관 건립과 함께 종합박물관에서 근대적인 미술관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루브르도 국가별·시대별·연도별로 화이트 큐브에 작품을 일렬로 전시하면서 근대적인 조명이 설치된 연출된 공간으로 변신했다. 특히 프랑스 미술을 세계에 알린 인상파 중심의 '근대미술실'도 열어 전통적인 미술에 반항한 인상파 화가들의 '전설화'를 진행했다. 이것이 가장 보수적인 문화국가 프랑스의 '루브르 매직'이다. 그러나 전후 프랑스는 전위적이며 자유주의적인 풍조가 거세지자 1977년 퐁피두센터를 건립해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미술을 수용했다.

이후 근대의 표상인 자국의 인상파 미술을 루브르에서 분리해 인상파 미술관으로 이전했다. 1986년 오르세 미술관을 개관하면서 1848~1914년 프랑스 인상파 작품을 별도로 전시해 근대정신의 선구임을 과시했다. 이렇게 오늘날의 미술관은 통상 프랑스처럼 루브르는 고대~19세기 초반, 오르세는 1848~1914년, 그리고 퐁피두가 20세기 이후의 연대를 다루는 것처럼, 미술사의 연속성과 다양성을 포괄적으로 시대를 구분해 조망했고, 21세기 들어 동시대 미술(Contemporary)만을 다루는 미술관이 등장했다.

하지만 미술관의 정치적 면모는 또 다른 곳에도 있다.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의 장으로서의 역할이다. 미술관은 감상이란 경험을 통해 다양한 관점에서 주제를 탐구하며 사고의 폭을 넓히고 더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미술관을 방문한 관객들은 미술품 앞에서 자신의 신념이나 입장을 잠시 내려놓고 작품을 감상한다. 이때 같은 작품을 보는 다른 이와 감상과 생각을 공유하면서 서로 다르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즉 나와 타자와의 '차이'를 알게 되는 것이다. 미술관은 이렇게 다른 이의 틀린 것이 아닌 다른 생각을 확인하고 이를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넉넉하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을 학습하는 공간인 것이다.

미술관은 지식을 터널이 아니라 프리즘으로 만들어준다. 이는 지식이 단일한 관점으로 좁아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과 색채를 비추는 다면적이고 확장적인 성격을 갖도록 해준다는 뜻이다.

특히 이런 미술관에서의 체험은 복잡하고 다양한 이념과 정치, 사회, 경제적인 입장이 뒤얽혀 있는 대한민국 분열의 원천인 근대사를 서로가 이해하면서 토론을 통해 새로운 담론을 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우리나라 근대기 설정은 그 자체가 논쟁적이다. 하지만 미술관의 시대 설정은 매우 유연해 모든 것을 포용한다. 미술에서 '근대'라는 개념은 엄격한 시간적 경계라기보다는, 다양한 변화와 발전을 반영하는 유동적인 개념이다. 이는 미술이 단절된 특정 시기가 아닌 이전 시대와의 연속성과 상호작용 속에서 발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20C미술관이라 칭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광복 80주년을 맞는 올해 '국립20C미술관' 설립 계획이 가시화되고 있다. 문화와 예술의 힘을 통해 근대사를 치유하며 새로운 시작의 장을 열어가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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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모 前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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