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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어느덧 66년 … 시대를 담은 노래 불렀죠

정주원 기자
입력 : 
2025-01-07 16:15:43
수정 : 
2025-01-26 14:5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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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이미자(84)는 새해를 맞아 자신의 음악 인생과 함께 한국 현대사의 어려운 시기를 반영하며 많은 사랑을 받은 소감을 전했다.

그는 "어려운 시대에 울고 웃으며 위안 삼았던 노래가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고 이야기하며, 전통가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은퇴를 선언하지 않았지만,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 성찰하며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잘 정리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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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美子
광복 80주년·한일수교 60주년
격동 속에서도 꿋꿋하게 노래
"그러고 보니까 저도 뱀띠네요"
사진설명


'추운 겨울 눈밭 속에서도 동백꽃은 피었어라. 나 슬픔 속에서도 살아갈 이유 있음은~.' 가수 이미자(84)의 대표곡 '내 삶의 이유 있음은'의 한 대목이 유독 아릿하게 들리는 새해다. 한국 현대사의 '빨갛게 멍든' 시대상을 고스란히 반영한, 이미자 노래 인생의 철학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하다.

흔히 인생사를 '굵고 짧게' 혹은 '가늘고 길게' 묘사하지만, 그가 대중과 함께한 66년은 커다란 뱀의 몸통처럼 굵고도 길었다. 1941년생 뱀띠 대표 연예인이기도 한 그에게 2025년 푸른 뱀의 해이자 광복 80주년, 한일 수교 60주년을 맞아 인터뷰를 청했다. 6·25전쟁의 상흔이 아물지 않았던 1959년에 데뷔한 그는 '동백아가씨' '여자의 일생' '흑산도 아가씨' 등 명곡으로 국민의 눈물과 땀을 어루만져왔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23년엔 대중문화예술 분야 최고 권위 정부 포상이자 최고 등급인 금관문화훈장(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을 받았다.

가요계의 살아 있는 전설인 그와의 만남은 사진에 찍히지 않겠다는 단호한 조건 아래 성사됐다. 은퇴 선언을 한 적은 없지만, 더는 화려한 현역도 아니라는 강단이 읽혔다. 오랜 세월 가정사, 사생활 할 것 없이 대중의 입길에 오르내렸던 그는 "수없이 반복한 고리타분한 이야기"라면서도 힘든 시기에 위로가 돼준 노래에 관해 더 들려달라는 말에는 기꺼이 수긍했다. 짧지만 풍성한 파마머리, 웃을 때 둥글게 휘는 눈주름, 단정한 옷차림 등 익히 알던 '엘레지의 여왕'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나라 대중음악인 최초이자 유일한 금관문화훈장을 받은 소감은.

▷오늘날 이미자가 남아 있는 건 많은 분이 한결같이 사랑을 주신 덕분이다. 수많은 가수 선배님과 동료들도 계셨다. 그들이 다 어우러져 한국 대중음악계가 튼튼해졌다. 나는 거기에 조금 보탰을 뿐이다.

-당신의 노래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시대를 대변한 노래다. 1940·1950년대 생활은 너무나 어렵고 배고팠다. 내가 부른 노래도 가난한 시대에 여자들 삶을 대변해주지 않았나. 지금은 잘살게 됐으니 경쾌한 노래가 많아지고 '트로트 붐'이 일어났지만, 어려운 시절 울고 웃으며 위안 삼았던 노래가 사라져가는 것은 안타깝다.

-트로트 관련 방송이 많아지고 후배 가수들도 이미자 명곡을 자주 부르는데.

▷슬픈 가사에도 일어나서 춤추고 흔드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 시대의 변화는 어쩔 수 없지만, 요즘엔 감상할 수 있는 노래가 없고 너무 퍼포먼스 위주다. 그래서 나에게 '트로트의 여왕'이란 수식이 붙는 게 싫다. '전통가요 가수'로 불러달라고 하는 이유다. 가수는 매우 많아졌지만, 가사 뜻보다 기교 위주로만 부른다. 독특하게 잘 부르는 가수는 아직 못 봤다. 지금 여건에선 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한다. 그냥 노인네 혼잣말이자 욕심이다. 전통가요를 부르는 방식만은 잊어버리지 말아 달라.



사진설명


-마음을 담아 애환을 위로했던, 기억에 남는 무대는.

▷1960년대 베트남전쟁 위문 공연이다. 당시 우리 부대가 차지한 고지에 헬기를 타고 들어가서 노래했다. 만약 산 밑에 숨어 있던 베트콩이 저격하면 바로 추락할 수도 있었다. 어느 소대에선 군인 고작 몇십 명을 상대로 이 노래 저 노래 유행가를 불러드렸는데, 이글거리던 눈들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던 모습을 지금도 못 잊는다.

-1965년 한일 수교 직후 일본 활동도 했다. 반일 감정이 심했을 땐데.

▷일본 레이블(빅터)에서 전속 가수로 음반을 낸 것도 한국 가수 최초였을 거다(이미자는 '동백아가씨'를 번역한 사랑의 빨간 등불' 등 다수의 일본어 음반을 냈다). 방송에 나가고 단독 공연도 했는데, 일본 사람들이 내 이름 한자를 일본식으로 읽어 '리요시코'라고 불렀다. 정작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가 (일본어 개명에) 응하고 다녔다고 한국에서 논란이 됐다. 그 일로 정부에서 일본 출국 비자를 내주지 않아 일본 활동은 3개월 만에 끝났다.

-인기곡 '동백아가씨'는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1965~1987년에 방송 금지 처분에 묶여 있었다.

▷사실 왜색 논란은 핑계였다. 정부의 외압도 아니었다.

해금되고 난 뒤 알고 보니 경쟁 음반사에서 방송사 윤리위원회에 손을 써 금지곡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동백아가씨'가 33주 연속 차트 1위를 하고 음반을 살 수 없을 정도로 인기를 끌자 주춤하게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1972년 발매된 이미자 스테레오 히트 선곡 제16집 표지.  지구레코드·나화랑기념사업회.
1972년 발매된 이미자 스테레오 히트 선곡 제16집 표지. 지구레코드·나화랑기념사업회.
-국내 방송에서 일본어 노래를 그대로 부르고, 일본에서도 K팝이 인기다.

▷그만큼 시대가 변하고 발전했다. 일본 가수가 한국 방송에 나오는 모습이나 양국 가수들이 서로의 말로 노래도 부르는 게 아주 괜찮더라. 우리가 일제에 핍박당한 역사는 있지만 지금은 화합해 가는 게 좋지 않겠나.

-자유가 억압되는 계엄 시기도 있었는데, 최근 또다시 계엄 사태가 벌어졌다. 특히 K팝 팬들이 응원봉을 들고 가요를 틀면서 '탄핵 시위'를 하는 모습이 화제가 됐다.

▷노래만 하고 살아온 사람이라 정치적으로는 입도 뻥긋하고 싶지 않다. 내가 살아온, 노래에 대한 것 외에는 아는 게 없고 말할 자격도 없다. 다만 개성들이 강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개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대신 절제는 많이 사라졌다. 인간 삶에 절제라는 건 반드시 있어야 한다.

-2024년에도 단독 콘서트, 딸 정재은과의 디너쇼 등 무대에 섰다. 새해 활동도 기대해 볼 수 있을까.

▷단독 콘서트는 이제 안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더 이상 20여 곡을 혼자서 부를 수 없다. 부른 노래가 내 마음에 안 들면 스스로 용서가 안 되는 데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안 되는구나' 생각되더라.

최근 공연들은 코로나19 때문에 미뤄졌던 60주년 기념 전국 투어의 일환이었다. 남은 공연은 없다.

-최근 무대에서도 성량, 가창력은 80대로는 믿기지 않았다.

▷꼭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가요계 선배로서 목소리를 내고 후배들에게 보탬이 될 수는 있을 것 같다. 은퇴 선언을 하든 하지 않든, 좋은 모습으로 끝내고 싶은 건 다 마찬가지다.

-새해 계획은.

▷그냥 마음의 정리다. 과연 내가 가요계에서 잘해왔는가,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가, 어느 정도 부를 수 있는가 점검하는 것뿐이다. 정말 가수로서 멋있게 마무리 잘했다는 마음이 들 수 있도록, 후배들 보기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잘 정리하고 싶다.

가수 이미자

△1941년 서울 출생 △1959년 '열아홉순정'으로 데뷔 △1962년 MBC 10대 가수상 수상 △1964년 '동백아가씨' 발표 △1965년 첫 월남 위문공연 △1973년 베트남 최고 문화훈장 수훈 △1989년 대중가수 최초 세종문화회관 단독 공연 △1990년 30년간 2069곡 발표로 기네스북 등재 △2009년 대중가수 최초 은관문화훈장 수훈 △2023년 대중가수 최초 금관문화훈장 수훈

[정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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