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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칼럼

태극 낭자들의 승전보가 그립다 [정현권의 감성골프]

정현권
입력 : 
2025-03-28 2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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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호주여자프로골프(WPGA) 투어 ISPS 한다 호주오픈에서 프로 통산 65승을 달성한 뒤 포효하고 있는 신지애. (AFP연합)
지난해 12월 호주여자프로골프(WPGA) 투어 ISPS 한다 호주오픈에서 프로 통산 65승을 달성한 뒤 포효하고 있는 신지애. (AFP연합)

2019년은 미국 LPGA에서 한류 골프의 정점이었다.

그해 시즌 32개 대회에서 태극 낭자들은 15승을 거둬 2015년, 2017년과 함께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3주에 한 번 꼴로 우승 소식이 외신을 타고 날아들었다.

대회마다 리더 보드 상단에 올라온 고진영(4승) 김세영(2승) 박성현(2승) 양희영(1승) 이정은6(1승) 장하나(1승) 지은희(1승) 허미정(1승) 이름을 떠올리면 지금도 설렌다.

김세영은 그해 마지막 대회인 CME그룹 투어 챔피언십에서 우승해 최고 상금을 받았다. 신지애(2009년) 최나연(2010년) 박인비(2012년) 박성현(2017년)에 이어 한국인으로 역대 6번째였다.

이정은6는 US여자오픈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려 신인왕에 등극했다. 김세영(2015년) 전인지(2016년) 박성현(2017년) 고진영(2018년)에 이어 5년 연속 한국 선수 신인왕 계보를 이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태극 낭자의 우승 잔치는 이후 내리막길이었다. 2020년 7승, 2021년 7승, 2022년 4승, 2023년 5승에 이어 2024년엔 3승에 그쳤다. 지난해 33개 대회에서 양희영, 유해란, 김아림만이 정상에 올랐다.

김효주가 지난해 8월 프랑스 생캉탱앙이블린 골프 나시오날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 여자 스트로크 플레이 4라운드 18번홀에서 티샷을 하고 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김효주가 지난해 8월 프랑스 생캉탱앙이블린 골프 나시오날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 여자 스트로크 플레이 4라운드 18번홀에서 티샷을 하고 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2020 도쿄, 2024 파리 대회에서는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작년 LPGA 올해의 선수, 상금왕, 신인상, 최저타수상(베어트로피) 수상자 명단 어디에도 한국 선수는 없었다.

반면 일본 선수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현재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신인 랭킹은 일본 여자골퍼 독무대나 다름없다.

1위 다케다 리오, 2위 야마시타 미유, 3위 이와이 아키에, 6위 바바 사키, 7위 이와이 치사토가 이름을 올렸다. 선수 자원이 풍부하다. 올해 우리나라 유일한 LPGA 신인 윤이나는 8위에 랭크됐다.

올해 상금 랭킹도 다케다 리오가 1위, 후루에 아야카가 4위를 달린다. 한국 선수론 김아림 3위, 고진영 8위이다.

두 나라 선수 간 레벨이 맞지 않아 죽 이어지던 한일 여자골프 대항전마저 소리없이 사라졌는데 그동안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일단 원인은 세계 수준의 상향평준화이다. 특히 태국과 중국, 일본이 약진을 거듭해왔다.

지난해 10월 열린 KLPGA 투어 동부건설 한국토지신탁 챔피언십 최종 4라운드에서 아이언샷을 시도하는 윤이나. (KLPGA 제공)
지난해 10월 열린 KLPGA 투어 동부건설 한국토지신탁 챔피언십 최종 4라운드에서 아이언샷을 시도하는 윤이나. (KLPGA 제공)

지난해 CME그룹 투어 챔피언십 우승은 지노 티띠꾼(태국)이 거머쥐었다. 투어 통산 4승을 티띠꾼은 시즌 상금왕에도 올랐다.

한국과 함께 과거 절대 강자였던 미국도 넬리 코다 혼자 선전하는데 유럽이나 아시아 각국 선수들의 견제가 워낙 거세다. 골프 경기 수준이 한층 업그레이드돼 조금만 삐끗해도 금방 떨어진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미국 무대 진출 동기 저하를 한국 부진의 원인으로 꼽는다. 이는 아이러니하게 한국여자골프(KLPGA) 상승세에 기인한다.

KLPGA는 연간 총상금 320억원에다 대회 평균 상금만도 10억원을 넘는 그야말로 역대급 호황기이다. 이러다 보니 젊은 선수들은 고생길이 훤한 LPGA 진출을 꺼린다.

코로나 팬데믹도 미국 진출 의욕을 꺾었다. 팬데믹 처리 과정에서 미국 사회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출입국 절차도 더욱 복잡해졌다. 한국 최고 선수들에게 꿈의 무대였던 미국 진출 방정식이 깨졌다.

젊은 선수들이 현실에 안주한다는 비판도 있는데 100% 동의하긴 어렵다. 워라밸을 즐기는 세대로선 예전에 부모와 함께 짐을 싸서 미국으로 달려가던 세태를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지난 2월 LPGA 투어 힐튼 그랜드 베케이션스 토너먼트 오브 챔피언스 정상에 오른 김아림이 16번홀에서 버디를 잡아낸 뒤 오른손을 불끈 쥐고 있다. (AFP연합)
지난 2월 LPGA 투어 힐튼 그랜드 베케이션스 토너먼트 오브 챔피언스 정상에 오른 김아림이 16번홀에서 버디를 잡아낸 뒤 오른손을 불끈 쥐고 있다. (AFP연합)

일년 내내 말도 안 통하는 낯선 곳에서 짐을 싸고 풀고를 반복하는 고단한 일정이 젊은 세대에게 매력적이지 못하다. 부모마저 한국 생활을 포기하고 자녀를 위해 바다 건너에서 희생하려고 선뜻 나서지 않는다.

미국에서 잘나가던 장하나는 가족과 함께하기 위해 2017년 LPGA에서 한국으로 무대를 옮겼다. 미국에서 지존에 오른 신지애는 전성기였던 2013년 한국과 가까운 일본에 새로 둥지를 틀었다.

이로써 10년 전처럼 한 해 2~3명씩 해외로 나가던 관행이 없어졌다. 경비 부담도 큰데 선수들은 LPGA 투어 일정에 연간 3억원 정도를 쓴다. 국내 투어 활동 경비의 2배다.

박세리 키즈 시대가 저문 것도 영향을 미친다. 박세리 이래 박인비, 최나연, 유소연 등은 이미 은퇴했거나 전성기를 지났다. 유일하게 신지애가 JLPGA 투어 상금 역사를 새로 기록하며 건재하다.

그래도 올해 LPGA에서 한국여자골프가 새로 도약하길 기대한다. 부상에서 벗어난 고진영 기량이 회복되고 김아림이 한국여자골프를 대표할 선수로 기대를 모은다.

윤이나의 도전도 관전 포인트이다. 미국 무대 첫 출전에 컷 탈락했지만 실력과 인기를 겸비했다. 월요일 아침이면 태평양 건너에서 전해오던 태극 낭자들의 우승 소식이 그립다.

정현권 골프칼럼니스트/전 매일경제 스포츠레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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