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전쟁 당사자들 기억은 결코 정연하지 않다. 생생히 증언하는 영화가 있다. 레바논 전쟁에 참전했던 이스라엘 영화감독 아리 폴만의 '바시르와 왈츠를'이다. 그는 참전 경험이 있는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전쟁과 관련된 기억을 통째로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는다. 과거 전우들과 종군 기자를 인터뷰하며 소생시키려 한다. 인터뷰이들의 기억은 군데군데 조각나거나 휘발돼 있다. 공포에 질려 떠올린 환각을 기억으로 여기기도 한다. 감독 본인도 이스라엘의 방조 정황 속에 이뤄진 '사브라-샤틸라' 학살 현장을 목도한 기억을 인터뷰를 통해서야 알아챈다. 모두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의 증상이다.
기억이 말소된 인생의 페이지는 정상적으로 갱신되지 않았다. 어떤 이는 작전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학살한 개들에게 쫓기는 악몽을 꾼다. 누군가는 공포가 찾아올 때마다 잠을 자거나 환상 속으로 도피한다. 인터뷰하던 중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참전한 이후부터 인생의 모든 게 끝난 것 같다는 고백도 있다. 조각난 기억은 반작용이었다. 공포와 죄의식을 억눌러둔 무의식에서 분출된.
폴만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전쟁의 기억을 억압한 이들이 있다. 언젠가는 (기억이) 터져나올 수 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까. 이것이 PTSD의 본질이다."
2025년 1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는 휴전에 합의했다. 전쟁이 발발한 지 467일 만이었다. 양측은 인질과 수감자를 맞교환하기로 했다. 중재국인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메시지. 그걸 전하는 외신. 건조하고 체계적이었다. 그러나 하마스에 인질로 잡혔던 민간인들, 고통받은 군인들, 여성들, 아이들도 그렇게 전쟁의 기억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전쟁의 도화선이었던 하마스의 급습을 받은 이스라엘인 일부는 기억이 통째로 소실되는 해리 장애를 겪었다. 이스라엘군 부상자 가운데 40%가 PTSD 등으로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다. 가자지구 주민들의 정신 건강은 어떤 상태인지조차 정확히 파악이 불가능한 상태다. 가자지구에서 대피했던 이들을 치료한 비영리단체 '고문피해자센터(CVT)'는 "전쟁의 고통과 슬픔을 겪은 이들은 평생 상처를 간직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43년간 변한 게 없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지난 세월 변주됐을 뿐인 고통 속에 남겨진 이들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만 할까. 전쟁의 기억을 노력 끝에 되살려낸 폴만 감독의 말을 인용한다. "전쟁에는 영광도, 화려함도, 용기도, 전우애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최현재 글로벌경제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