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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칼럼

역사로 보면…한국은 ‘개인전’ 일본은 ‘팀전’ [한순구의 ‘게임이론으로 보는 경영’]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입력 : 
2025-02-14 2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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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민족성, 모래알 vs 진흙
한국 역사는 고려시대 유교를 받아들인 후 중국식으로 과거를 통해 문신 인재를 등용하여 중책을 맡기는 시스템이 정착되었다. 사진은 조선시대 과거제 재현 행사. (매경DB)
한국 역사는 고려시대 유교를 받아들인 후 중국식으로 과거를 통해 문신 인재를 등용하여 중책을 맡기는 시스템이 정착되었다. 사진은 조선시대 과거제 재현 행사. (매경DB)

‘한국인은 모래알과 같아 한 명 한 명을 놓고 보면 강하고 뛰어나지만 뭉쳐지지 않고 부스스 무너져버리는 반면 일본인은 진흙과 같아서 한 명 한 명은 대단하지 않지만 뭉쳐놓으면 절대로 부서지지 않고 계속 단단히 결속하여 큰 힘을 발휘한다.’

이런 말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한국인 민족성을 폄하하기 위해서 지어낸 이야기라고 들었다. 이런 주장에 대해 좀 생각해봐야 할 측면이 있다. 단단히 뭉친 진흙이 정말 모래알보다 뛰어난 것일까.

단결력이 좋다는 것은 다르게 표현하면 반대 의견을 용납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한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는 의미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인은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이길 수 있다는 과대망상적인 계획을 가지고 진주만을 공습하고, 가미카제 자살특공대를 만들어 일본을 지키겠다면서 끝까지 저항했다. 미국과의 전쟁은 객관적으로 승산이 거의 없는, 일본 멸망의 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반대 의견을 가진 일본인이 있었을 테다. 그러나 진흙과 같은 단결력 때문에 제대로 반대 의견을 내지도 못하고 비극적인 패망의 전쟁으로 모두가 끌려 들어갔다.

최근까지도 일본 대학에는 공산주의 경제학을 연구하는 교수가 많이 있다. 어째서 그런 학문을 아직도 가르치는지 묻자 한 일본인 교수 친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을 반대하던 유일한 지식인이 바로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좌파 지식인이었기에 그런 반대 의견을 일부러 살려놓기 위해서라도 대학에서 명맥을 이어주고 있다”고 답했다.

한국에서 다른 주변국과 전쟁을 벌이자는 논의가 시작된다면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내부적으로 찬반 의견이 갈려 내전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모래알 같은 개인의 힘으로 상대방 의견에 반박을 하는 과정에서 어리석은 결정은 피할 수 있는 것이 모래알 사회의 강점이 아닐까.

진흙의 결속력이 모래알보다 항상 유리한 것이라는 주장은 옳지 않은 셈이다.

모래알이 진흙보다 불리하거나 열등한 것이 아니라고 했을 때, 정말로 한국인은 모래알에 가깝고 일본인은 진흙에 가깝다고 볼 근거는 있는 것일까.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어떤 측면에서 결속력이 강하다는 주장에 일말의 진실이 존재한다.

일본 국회의원 선거를 보면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예를 들어 특정 집안이 한 지역 국회의원을 대대로 독점하는 식이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가끔 20대 정도 나이에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부친이 국회의원이었다 사망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자리가 공석이 되면 정치 경험 없는 젊은 자녀가 아버지 자리를 이어받아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다.

한 집안에 충성해 계속 국회의원을 만들어주는 것을 강한 결속력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지역 사회가 한 집안을 중심으로 뭉쳐 내부적인 갈등을 피하고 평화적으로 단합한다는 의미에서는 결속력으로 볼 수 있다. 국회의원 공천권을 놓고 혈투를 벌이는 한국과는 다르다.

또한 국회의원이나 정부 고위 관료에게 부정 의혹이 있을 때 비서와 같은 실무진이 자살을 해서 윗사람에게 조사가 미치지 않도록 하는 상황이 일본에서는 상당히 자주 발생한다. 이 또한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현상이다. 역시 조직이나 윗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희생하는, 개인보다는 조직 전체를 위한 행동이라고 보았을 때 강한 결속력을 보여주는 현상이라 해석할 수 있다.

최근 읽은 책에서 한국과 일본의 이런 차이가 고려시대부터 과거 시험에 합격해 출세를 하고 고위 관직에 등용이 되어왔던 한국의 전통과, 공정한 시험은 존재하지 않지만 작은 영주를 중심으로 목숨을 건 전투를 통해 경쟁을 했던 일본의 전통 차이에서 기인하였다는 한 국사학자의 분석을 보았다. 무척 공감이 되는 내용이다.

한국 역사는 고려시대 유교를 받아들인 후 중국식으로 과거를 통해 문신 인재를 등용하여 중책을 맡기는 시스템이 정착되었다. 문신이 보는 과거 제도는 스포츠로 말하면 완전히 개인 종목이다. 마치 양궁이나 사격과 같다. 양궁 선수가 되려면 자기 자신이 활을 잘 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사격도 마찬가지로 백발백중 총솜씨를 가지는 것이 우선이다. 과거 시험도 비슷하다.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공부를 많이 하고 글솜씨가 뛰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일본 역사에는 과거 같은 공정한 평가가 존재한 적이 없다. 개인이나 조직의 성공과 실패는 실제 전투를 통해 승패가 갈리었다. 어떤 일본 무사가 일본 제일의 칼솜씨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가 속한 영주의 군대가 이웃 나라 영주 군대에 패배해 멸망하면 일본 제일의 칼솜씨를 가진 무사도 죽거나 떠돌이 무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제일 검객으로 유명한 미야모토 무사시 또한 10대 어린 시절 자신의 영주가 전투에 패배하여 떠돌이 무사의 신세가 되었다. 그럼에도 일본 제일 칼솜씨를 가진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고 싶은 마음에 일본 전국의 뛰어나다는 무사들을 찾아다니면서 결투를 신청해 모두 승리하는 바람에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미야모토 무사시도 죽는 날까지 떠돌이 무사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칼솜씨가 좋은 것과 출세를 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던 셈이다.

오히려 칼솜씨가 형편없는 무사라고 해도 뛰어난 군사력을 가진 영주 밑에 소속되어 내부적으로 똘똘 뭉쳐 이웃 영주들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하면 개인의 칼솜씨와는 상관없이 중요한 책무를 맡으면서 출세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일본 무신은 스포츠로 친다면 팀 스포츠 종목으로 출전한 셈이다. 그것도 참여 인원수가 9명인 야구나 11명인 축구보다 훨씬 많은 수만 명 단위로 팀을 만들었으니, 개개인 능력보다는 수만 명 팀원이 똘똘 뭉쳐 움직이는 쪽이 승리 확률을 높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개인 능력으로 성패가 갈리는 종목에 출전한 한국인은 자연히 팀의 결속력보다는 개인 능력을 중시했을 것임이 명백하다. 특히 개인 능력이 중요한 종목에서 내 옆 사람은 같은 팀원으로 협력할 사람이기보다, 내가 개별 종목에서 경쟁으로 이기고 딛고 올라가야 하는 적으로 간주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전투에서 패배하면 일족이 모두 몰살당하는 일본 무사 입장에서는 능력이 없더라도 현재 영주를 중심으로 모두 똘똘 뭉쳐 웬만한 비리나 갈등은 모두 참고 해결하면서 어떻게 해서라도 다음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다른 팀으로 이적도 허용되지 않았으니 더더군다나 그랬을 터.

지금도 반대 의견이 가장 용납되지 않고 무조건 상명하복 원칙을 따라야 하는 곳이 바로 군대 조직이다. 전투를 앞둔 상황에서 누구의 작전이 더 좋은가를 놓고 갑론을박을 하면 이길 수 있는 싸움도 질 수 있다. 일단 일사불란한 모습으로 신속하게 적을 공격하는 것이 군사작전의 기본 중 기본이다.

한국 역사에도 억울하게 고통당하고 죽어간 평민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일본 역사나 소설 속에는 영주 잘못을 대신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 이야기가 아주 많이 등장한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평민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었던 것만이 아니다. 상당히 신분이 높은 사무라이 중에도 모시는 주군을 위해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죽은 경우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개개인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한국 역사 전통이 일본에 비해 다행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사진설명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96호 (2025.02.12~2025.02.18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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