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9일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흘이 지나 선거부정에 관한 칼럼(“부정선거 얘기 이제는 못 하겠지?”라는 허망한 기대)을 올린 적이 있다. 야당 후보였던 윤 대통령이 선출되었는데도 0.73% 간발의 표 차가 부정선거 결과라고 주장하는 일부 유튜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가짜뉴스로부터 한국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검찰이 수사해서 선거부정 진위를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고 썼다.
그 칼럼에는 많은 악플이 달렸는데 공개된 메일 주소로 욕 메일도 많이 들어왔다. 종종 있는 일이지만 보통 길어야 이틀 이어지던 욕 메일이 일주일 넘게 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저주의 강도도 평균치를 훌쩍 뛰어넘었다. ‘이건 종교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동쪽에서 뜬다’고 믿는 것과 이를 입증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해가 뜨는 쪽을 동쪽이라 부른다. 그러니 해는 동쪽에서 뜰 수밖에 없다’가 맞는 대답이겠지만 ‘어제와 오늘 해가 똑같은 방향에서 떠올랐다고 믿는 너의 기억이 조작되지 않았다는 증거를 보여달라’고 하면 내 능력을 벗어난다. 그때 이후로 부정선거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둔 2개의 수. 계엄선포와 부정선거 의혹 제기 중에서 어느 쪽이 한국 사회에 더 큰 영향을 미칠까. 계엄은 외과적 상처라서 아물기를 기다리면 된다. 부정선거 의혹 제기는 내과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지난 수년간 이 문제가 한국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악성 종양으로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치료법을 몰라서 방치해왔다. 이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나라를 대내외적으로 대표하는 대통령이 정식으로, 12월3일 이후 수차례에 걸쳐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 결과 종양의 증폭 핵분열이 진행되는 중이다.
인격적으로 존경하는 사회 선배 한 분이 호프집에서 선거부정 얘기를 진지하게 하는 것을 나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나도 믿지 않았다. 그런데 대통령이 이 문제로 계엄을 선포했다. 뭐라도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냐.’ 부정선거 의혹을 줄곧 제기해 온 한 비주류 신문이 1월16일 ‘선거연수원 체포 중국인 99명 주일미군기지 압송됐다’는 단독 기사를 올리자 접속이 폭주한 나머지 홈페이지가 다운됐다. 12월3일 계엄군과 주한미군이 중국인 간첩 99명을 체포해 지금 주일미군기지에서 선거부정 개입 조사를 받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 신문 홈페이지에는 지금도 그 기사가 몇몇 후속 기사와 함께 머리기사에 걸려 있다.
나라가 뒤집혀도 수십번은 뒤집힐 이런 주장을 근거없이 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내가 살아온 한국은 그 정도 분별은 있는 사회다. 그 기사를 보고 ‘설마’ 하면서도 ‘혹시’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도 한국 사회의 분별에 대한 감이 있기 때문에 ‘무슨 근거가 있지 않고서야...’하는 것이다. 선관위는 이 보도가 나온 직후 ‘가짜 뉴스’라는 주장과 함께 이를 반박하는 팩트의 입장문을 냈지만 이 신문을 고발했다는 뉴스는 안 나오고 있다. ‘뭔가 켕기는 게 있나’ 생각하는 사람이 크게 늘었을 것이다.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호프집의 사회 선배도 지금쯤 그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다.
지금 한국은 법의 아노미를 겪고 있다. 수사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탄핵에 몇 명이 필요한지, 헌재가 무슨 심판부터 해야 하는지, 선거법 재판을 언제까지 끝내야 하는지 정리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법이 흔들리자 최소한의 분별도 흔들리고 있다. 사실이라면 모든 것을 뒤집을 어마어마한 주장이 계속 나오고 있는데 사실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중국 간첩 99명 체포 같은 팩트는 그것이 사실이라면 확인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 확인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거짓이라는 얘기다.
지금 한국은 내가 아는 그 한국, 그러니까 ‘기본적인 분별’에 대한 기대가 작동하는 그 한국이 아니다. 분별이 작동하는 사회라면 아무리 악성 매체라도 팩트 자체를 날조하지는 못한다. 거기에 현혹되는 사람보다는 황당해하는 국민이 압도적으로 많다. 법과 시장의 징벌이 가해진다. 지금은 팩트 자체가 날조되고 상당수 사람들이 그걸 믿고(믿고 싶어 하고) 아무런 징벌이 가해지지 않는다. 이 엄중한 시국에 이 정도 허위 선동이라면 검찰이 인지해서 수사에 착수할 법도 한데 기척도 안 보인다. 이성의 아노미, 팩트의 아노미다.
중국간첩 체포 기사를 믿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봤어? 체포 안 되는 것 봤냐고? 증명할 수 있어?’ 역시 아노미적 질문이다. 증명은 주장하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나는 간첩이 아니다. 당신이 내가 간첩이라는 주장을 하고 싶으면 당신이 증거를 내놔야 한다. ‘너 간첩이잖아. 아니면 증거 내놔’하면 나는 증거를 내놓지 않을 것이다. 그런 증거는 없는 법이므로. 그로써 내가 간첩이라는 당신의 의심은 확신이 된다. ‘부정선거가 아니라는 증거를 내놔라’는 황당한 주장으로 이 나라가 이 지경까지 왔다.
이 모두를 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부정선거 음모론은 종교적 생태계를 구축한 지 오래다. 이 생태계에서 권력과 부를 취하는 이들이 있고 생의 의미를 찾는 이들도 있다. 역(逆)계엄을 해도 이 생태계를 해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는 ‘부정선거 의혹 민관 합동조사단’ 같은 걸 구성했으면 한다. 모델은 ‘천안함 폭침 민군 합동조사단’이다. 천안함 침몰을 둘러싸고 미군 개입설 등 갖은 음모론이 횡행했다. 민간 최고 전문가들이 포함된 합동조사단에서 북한 기뢰에 의한 폭침이라는 결론이 나왔음에도 지금도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이 꽤 있다. 사회는 너무 크고 다양해서 무슨 주제에서든 비상식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은 늘 있다. 사회의 목표는 이들을 근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정 범위를 넘어서지 않게 하는데 두어져야 한다. 그러려면 권위 있는 조사단 결론이 필요하다.
부정선거를 의심하는 사람들중에는 통계 전문가와 수학자를 비롯해 지명도 있는 지성인들이 있다. 이 문제를 오랫동안 제기해오면서 ‘전문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까지 포함하는 일종의 연석 전문가 위원회를 가동해서 우리 선거 시스템을 들여다보게 하자. 그와 동시에 검찰이 선관위에 대해 강제수사를 병행하자. 선관위는 억울할 수 있겠지만 음모를 털고 가려면 어쩔 수 없다.
그 결과 부정선거에 대한 아무 증거가 발견되지 않은들 저 생태계의 사람들이 ‘잘 알겠다’고 할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아니다. 아직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사람들이 중요하다. 정상인들의 좀비화를 막고, 음모론자들을 소수파로 통제해 가려면 권위 있는 조사가 있어야 한다. 모든 음모론에 대해 국가가 조사에 나설 수는 없다. 그러나 대통령이 벌집을 건드린 지금은 이 방법 말고는 정상을 회복할 길이 없다. 호프집의 사회선배같은 사람을 다시 돌이켜 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