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질서 지켜낸 것은
평범한 국민들의 용기
정치권 유불리 따지지 말고
국민 눈높이서 수습책 찾길
평범한 국민들의 용기
정치권 유불리 따지지 말고
국민 눈높이서 수습책 찾길

상상을 해본다. 만약 계엄군 헬기가 공군작전사령부에 50여 분 막히지 않고 곧바로 국회에 도착했다면, 국회의원들이 담을 넘어 빠르게 집결하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시민들과 국회 보좌진이 몸을 던져 계엄군의 진입을 막지 않았다면, 실탄이 지급돼 발포됐다면 어땠을까. 대한민국 역사의 시계는 순식간에 감금과 고문이 판쳤던 45년 전으로 퇴행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구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계엄 세력의 '무능함'이었다. 그들의 허술한 계획과 어설픈 실행력은 정치활동 금지, 언론 통제 등 자신들이 세운 위험천만한 목표를 무위로 만들었다. 의식 있는 계엄군과 경찰의 소극적인 '항명과 거부', 태업도 계엄 불발에 한몫했다. 대북작전일 줄 알고 투입된 707특수임무단 대원들은 국회에 도착하자 일부러 느릿느릿 움직였다고 한다. 현장에서 작전 대상이 민간인이라는 것을 안 일부 지휘관은 실탄을 불출하지 않았고, "총을 뒤로 메고 민간인과 충돌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모두 소신과 양심에 따른 행동들이었다. 무엇보다도 '5·18' 같은 피의 역사를 반복해선 안 된다는 국민들의 무의식과 필사적인 저항이 계엄을 실패로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결국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기적적으로 지켜낸 것은 평범한 국민들의 용기였다.
최대 미스터리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 급발진'을 했느냐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경고용'이었다는 윤 대통령의 주장은 계엄을 불장난쯤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귀를 의심케 한다. 이번 자해극은 상황을 오판한 '망상 계엄'인 데다 사심 가득한 '보복 계엄', 제 발등을 찍은 '자기 파괴적 계엄'이다. 지지율 추락, 김건희 특검법, 명태균 수사 등으로 궁지에 몰려 자신의 안위가 위태로워지자 국가 안위가 위험해졌다는 착각에 빠진 것이다. 선거관리위원회에 계엄군을 투입한 것도 일부 극우 유튜버들이 주장하는 '부정선거 음모론'이라는 망상에 경도돼 있었다는 증거다. 주요 정치인들을 체포하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증언이 나오는 점이나, 계엄 포고령에 뜬금없이 전공의와 의료인을 처단하라는 문구를 넣은 데서도 보복 의도가 엿보인다. 정치적 해법을 포기하고 자유를 억압하려 한 그가 취임식에서 35번 외친 자유는 대체 무엇이었는지 묻고 싶다.
그는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이 외친 대사처럼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이라고 생각하고 반전을 노린 게 아닌가 싶다. 계엄 독재로 권력을 연장하려 했지만 정치 생명은 더 단축됐고, 스스로 '반국가 세력' '망국의 원흉'이라는 것을 인정한 꼴이 됐다. 망상 계엄, 보복 계엄의 끝은 모두가 알다시피 국가 대혼란이다.
헌법과 국민기본권을 유린하고, 국가의 체면을 추락시킨 지도자의 말로는 처절할 것이다. 내란 혐의에 대해서는 이미 수사가 시작됐고, 퇴진 방안으로 하야, 탄핵, 임기 단축 개헌 등 다양한 의견이 분출되고 있다. 가장 시급한 것은 빠른 퇴진 로드맵과 스케줄 제시로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것이다.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7일 국민의힘 집단 불참으로 폐기된 가운데 정치권은 국민 눈높이에 맞춘 수습책보다 미래 권력을 정할 '대선 시간표'를 놓고 유불리를 따지기에 바쁘다. 국가 존망의 위기에 민주주의 수호보다 정치적 탐욕을 위해 주판알을 굴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국회의 시간'이 되레 무질서를 불러온다면, 국민이 들고 일어나 '국민의 시간'을 만들 게 틀림없다.
[심윤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