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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도의 귀부인, 많은 이의 뮤즈가 된 그녀의 매력은 [전형민의 와인프릭]

전형민 기자
입력 : 
2025-03-31 18:00:00
수정 : 
2025-04-05 18: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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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당신에게 있어 행복이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샤또 마고 1848년 빈티지라는 답을 하며,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이상을 동시에 표현했습니다.

샤또 마고는 100헥타르 이상의 땅을 소유하고 있지만, 포도밭 확장을 하지 않고 각 플롯에서 최상급 포도를 추려내어 그랑 뱅 양조를 진행하는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샤또 마고는 역사적 인물들로부터 찬사를 받아왔으며, '보르도의 귀부인'으로 알려져 있는 이 와인은 단순한 와인을 넘어 기억과 관계를 이어주는 특별한 존재로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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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있어 행복이란 무엇인가요?”

“샤또 마고(Chateau Margaux) 1848년 빈티지.”

칼 마르크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을 저술한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사적인 자리에서 행복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영국 사회주의자 어니스트 벨포트 박스(E. Belfort Bax) 등 동시대 인물들이 엥겔스를 회고하며 이 일화를 전했다고 하죠.

엥겔스의 대답은 단순히 와인을 사랑했던 그의 사적인 취향을 드러내는 대답 같습니다만, 중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848년은 <공산당 선언>이 발표·출간된 해이자, 유럽 전역에서 혁명이 일어난 해이기 때문입니다.

즉 “샤또 마고 1848 빈티지”라는 그의 대답은 육체적 쾌락(와인)과 정신적 이상(혁명)을 동시에 담은 그만의 유머이자, 인생 철학의 농축된 표현인 셈입니다. 혁명가적 열정, 인간적인 허영, 미식가적 감각, 그리고 시대의 상징이 고작 와인 이름과 양조 연도 한 줄에 모두 담겨 있는 거죠.

더 흥미로운 점은, 실제로 샤또 마고의 1848년 빈티지가 아주 뛰어난 품질의 빈티지로 기록돼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 입니다. 엥겔스는 와인에 대한 안목도 참 뛰어났던 사람이었던 셈입니다. 오늘 와인프릭은 엥겔스는 물론 역사속 다양한 인물들이 사랑했던 샤또 마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샤또 마고 와이너리의 상징인 샤또 마고. 프랑스어로 샤또(Chateau)는 성(Castle)이라는 뜻이다.
샤또 마고 와이너리의 상징인 샤또 마고. 프랑스어로 샤또(Chateau)는 성(Castle)이라는 뜻이다.
5대 샤또, 그 찬란한 이름

여러 번 소개하지만, 와인의 역사는 인류 역사와 견줄 정도로 오래됐습니다. 당연하게도 셀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얽혀있습니다. 이 때문에 낭설과 루머, 주장과 공지가 혼재된 채 전파되기도 합니다.

주로 와인이 생산되는 지역의 언어가 영어와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타국어이기 때문에 오역이나 의역이 종종 생기기도 하고, 광고나 이미지 구축 등을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구전 전설이나 야사(野史)로 남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와인 업계에서도 정석으로 통용되는 말들이 존재합니다. 마치 샴페인(Champagne)처럼 전세계 어느 나라 와인 업계에서 말하더라도,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대명사로 쓰이는 단어들이죠.

세계 와인 시장의 기둥 중 하나인 보르도(Bordeaux)에서는 보르도 블렌드(Bordeaux blend)라는 말이 그런 단어입니다. 국제 포도 품종인 까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를 중심으로 섞어서 와인을 양조하는 방식을 일컫는 말인데, 와인 업계에 발을 걸치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겁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보르도 와인 산업에서 가장 유명한 5개 와이너리를 통칭하는 단어인 ‘5대 샤또(First Growth, Premier Cru)’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오히려 와인 업계와 관련이 없는 사람이더라도, 와인을 잘 모르는 초보자더라면 보르도 블렌드보다 익숙하게 들릴지도요.

5대 샤또는 1855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가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프랑스 최고 와인을 소개하기 위해 분류한 4개의 샤또(라피트 로칠드, 라뚜르, 마고, 오브리옹)에 예전에 와인프릭에서 소개한 바 있는 샤또 무똥 로칠드(1973년에 승격)를 합친 것입니다. 단지 와인의 품질을 넘어서, 역사적 명성과 문화적 권위의 상징으로 통용됩니다.

보르도 5대 샤또. 왼쪽부터 무똥 로칠드, 라피트 로칠드, 오브리옹, 라뚜르, 마고.
보르도 5대 샤또. 왼쪽부터 무똥 로칠드, 라피트 로칠드, 오브리옹, 라뚜르, 마고.
그들 중에서도 가장 컸던 자부심

현대 프랑스 와인의 명성을 떠받치는 기둥은 누가 뭐라해도 보르도와 부르고뉴(Bourgogne) 두 지역에서 양조되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와인입니다. 두 지역은 양조에 사용하는 포도에서부터 양조 방식에 이르기까지 뭐하나 겹치는 구석이 없지만, 나란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 산지가 됐습니다.

두 지역의 가장 핵심적인 대립은 바로 입니다. 부르고뉴 지역은 클리마(Climat) 중심의 수세기에 걸쳐 미세하게 구분된 포도밭 하나하나가 독립적 정체성을 가지기 때문에, 수백년 간 그 경계가 고정됐고 와이너리를 확장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반대로 보르도는 와이너리의 브랜드가 된 샤또를 중심으로 여러 구획을 통합해 하나의 그랑 뱅(Grand Vin·플래그쉽 와인)으로 병입합니다. 샤또가 인접 밭을 인수·통합 하면서 확장하는 게 가능하고, 확장하더라도 샤또 고유의 철학과 기술력으로 고품질의 와인을 만들어내죠.

일례로 보르도에서 가장 비싼 와인으로 꼽히는 샤또 패트뤼스(Chateau Patrus)의 경우, 초기 4.5헥타르(㏊) 정도였던 밭이 거듭된 확장으로 현재는 11.5㏊에 이르기도 합니다. 2배 이상 넓어진 밭 덕분에 생산량을 늘려왔습니다.

5대 샤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마고를 제외하고는 모두 약간의 혹은 적극적인 포도밭 확장이 있었고, 이를 통해 사업 다각화나 생산 와인의 볼륨을 키웠습니다. 반면 마고는 구획 확장을 단 한 차례도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떼루아와 전통에 대한 자부심 때문입니다.

과거 수백년 전 샤또 마고의 포도밭 조감도. [샤또 마고 제공]
과거 수백년 전 샤또 마고의 포도밭 조감도. [샤또 마고 제공]
실험은 하되, ‘마고’라는 이름은 보호한다

12세기부터 존재한 마고가 천년에 가까운 역사 동안 포도밭을 함부로 확장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한 보수주의가 아니라, 아주 정교하고 철학적인 와인관에 근거한 결정입니다. 마고는 그 어떤 1등급 샤또보다 땅의 순수성(Terroir purity)을 중시하며, 그 철학은 수 세대에 걸쳐 유지되어 왔습니다.

마고는 오랜 역사에 걸맞게 100㏊ 이상의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지만, 오래 전부터 포도밭을 100개가 넘는 플롯(plot·미세하게 구분된 작은 구획)을 나눴습니다. 그리고 이들 플롯에서 각자 가장 잘 재배할 수 있는 품종을 재배하고 수확한 후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통해 최상급 플롯을 따로 추립니다.

이렇게 추려진 최상급 플롯 만이 그랑 뱅 양조에 쓰일 수 있죠. 같은 샤또 마고에서 재배한 포도라고 해도, 어떤 플롯에서 왔느냐에 따라 쓰임새와 운명이 갈리는 겁니다. 넓히는 순간, 마고라는 이름의 절대성이 무너지고 타협하게 된다는 엄격한 철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마고가 실험조차 하지 않는 엄격한 전통주의는 아닙니다. 바이오다이내믹을 시도하거나 토착 효모 연구, 스크류캡이나 디암(Diam) 코르크 등 샤또 마고는 업계에서도 실험적인 재배나 신기술 도입에 아주 적극적인 샤또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난 3월 한국을 찾은 오를리앙 발랑스 샤또 마고 부사장이 샤또 마고 2009 빈티지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전형민 기자]
지난 3월 한국을 찾은 오를리앙 발랑스 샤또 마고 부사장이 샤또 마고 2009 빈티지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전형민 기자]

이에 대해 샤또 마고의 부사장인 오를리앙 발랑스씨는 “전통과 떼루아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에 집중했다”“실험은 하되 ‘마고’라는 이름은 보호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발랑스씨는 지난 3월 에노테카가 수입하는 샤또 마고의 홍보차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흔히 큰틀에서 보르도 와인을 남성형, 부르고뉴 와인을 여성형이라고 부르는데요. 마고의 생산 과정을 보면 오히려 보르도 스타일보다는 부르고뉴 스타일에 가깝습니다. 그렇기 때문일까요. 마고는 5대 샤또 중에서도 여성스럽고 우아한 스타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맛본 마고는 부드러움 속에 강건함이 자리잡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보르도 와인 특유의 강건함과 남성적인 매력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 가운데 여성적인 부드러움과 우아함이 섞인 느낌입니다.

블랙베리, 잘 익은 체리, 카시스, 견과류, 미네랄 등 보르도 와인들에게서 느껴지는 아로마가 순수하고 섬세하게 나타나지만, 마시는 순간 묵직한 무게감과 입안을 가득 채우는 풍성한 과일향, 산도가 조화를 이룹니다. 피니시에서는 우아한 매력이 극대화됐습니다.

오를리앙 발랑스 샤또 마고 부사장이 직접 와이너리 셀러에서 공수해온 샤또 마고 2009 빈티지, 2019 빈티지, 파비용 블랑과 루즈 2018 빈티지. [사진=전형민 기자]
오를리앙 발랑스 샤또 마고 부사장이 직접 와이너리 셀러에서 공수해온 샤또 마고 2009 빈티지, 2019 빈티지, 파비용 블랑과 루즈 2018 빈티지. [사진=전형민 기자]
보르도의 귀부인, 많은 이의 뮤즈가 되다

이 때문에 샤또 마고는 ‘보르도의 귀부인’이라는 평가부터, ‘한 모금의 시’ ‘와인 속의 발레’ 등과 같은 추상적인 평가까지 마고는 시대를 주유한 수많은 인물들의 찬사를 받아왔습니다.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프랑스 대사로 재직하던 시절 마고를 마시곤 “보르도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와인이 없다”는 평가를 남겼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는 미국 대통령이 된 뒤엔 샤또 마고를 백악관 와인 리스트에 포함시키기도 했죠.

<노인과 바다>로 유명한 어니스트 헤밍웨의 역시 마고의 열렬한 팬입니다. 오죽하면 자신이 가장 아끼는 손녀의 이름을 마고라고 지었을까요. 헤밍웨이는 “내 삶에서 변하지 않았던 것은 손녀와 마고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헤밍웨이의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등장하기도 합니다. 주인공 제이크는 파리에서 혼자 저녁을 보내며 샤또 마고 한 병을 천천히 음미합니다. 그는 “혼자라도 와인 한 병이면 훌륭한 동무가 된다(I drank a bottle of wine for company... A bottle of wine was good company.)”라며, 한 모금씩 맛보는 마고를 말벗 삼아 고독을 달랩니다.

영화 실락원에서 등장하는 사기 그릇과 샤또 마고. [영화 실락원 캡쳐]
영화 실락원에서 등장하는 사기 그릇과 샤또 마고. [영화 실락원 캡쳐]

한편 와인 문화 발달이 상대적으로 더딘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1997년 와타나베 준이치의 소설 실락원에서 샤또 마고가 등장하면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주인공 중년 남녀 둘이 눈 덮인 별장에 숨어들어 마지막 만찬을 즐기며 특별히 준비한 샤또 마고 와인에 청산가리를 타 나눠 마시는 것으로 자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작중에 마고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레스토랑에서 주문했던 것이기도 해서, 사랑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는 상징적인 소도구(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결합)로 쓰였습니다. 샤또 마고는 작품 내에서 비극의 촉매인 동시에, 작품 밖에서는 이 소설과 영화의 성공으로 일본 대중에게 각인돼 샤또 마고를 와인의 여왕으로 유명하게 만든 계기가 됐습니다.

12세기 이후 800년을 넘게 이어져 내려오는 샤또 마고. 단순히 비싼 와인, 보르도 5대 샤또의 와인으로 기억하기보다, 기억을 깨우고 관계를 이어주며 마음을 데우는 한 병의 시로 기억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역사 속 수많은 인물들이 그랬듯, 우리에게도 언젠가 그런 한 모금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사진설명

*이번 주 와인프릭은 3월 중순 방한한 오를리앙 발랑스 샤또 마고 부사장과 수입사 에노테카가 주최한 세미나를 토대로 작성했습니다. 귀한 자리에 초대해준 에노테카에 특별한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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