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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1천명과 성관계했다” 자랑하던 일본 근대화 영웅…그녀만은 예외였다 [한중일 톺아보기]

신윤재 기자
입력 : 
2025-10-04 08:00:00
수정 : 
2025-10-05 17:3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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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메이지 시대의 주요 인물로, 여색을 탐닉하는 등의 방탕한 사생활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공적인 자리에서도 기생과의 관계를 숨기지 않았고, 그로 인해 '색마'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토의 성적 편력은 당시 일본 사회의 전통 관념을 흔드는 상징적 행위로 평가되며, 이는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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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톺아보기-178]
1903년 8월 20일, 9월 5일자 콧케이 신문에 실린 기사들.  ‘메이지 호색 일대남 이토 후작’이라고 씌여 있다. 이토를 식도락가에 비유해 ‘여자 식도락가’로 풍자했다. 이토의 입속에 여승(女僧)의 모습도 보인다.
1903년 8월 20일, 9월 5일자 콧케이 신문에 실린 기사들. ‘메이지 호색 일대남 이토 후작’이라고 씌여 있다. 이토를 식도락가에 비유해 ‘여자 식도락가’로 풍자했다. 이토의 입속에 여승(女僧)의 모습도 보인다.

“나는 욕심이 적고 저축이라는 걸 모른다. 좋은 집에 살고 싶지도, 막대한 재산을 모으고 싶지도 않다. 다만 공무에서 벗어난 시간에 기생들과 노는 것이 그 무엇보다 즐겁다.” - 이토

메이지 시대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주역들중에는 화려한 여성편력을 자랑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이토 히로부미 입니다.

일본 초대 총리대신이자 초대 조선통감 이었던 이토는 주지하다시피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주도하다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당했습니다. 다만 그가 일본인들도 혀를 찰 정도로 여색을 탐닉했었다는 사실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습니다.

이토와 가까웠던 외교관으로 요미우리신문 주필을 지내기도 했던 미야케 유지로는 그에 대해 “곁에 반드시 여자가 있었다. 기분전환을 위해 담배를 피우듯 여자를 찾았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이토는 스스로도 여자를 밝힌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는데 “1000명의 여성과 관계를 맺었다”고 호언하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도쿄대학교 사료편찬소 혼고 가즈토 교수에 따르면 일본 화폐에 등장하는 위인 중 상당수는 당시 상식을 깨뜨리는 연애를 하곤 했습니다. 이토는 그중에서도 가장 유별난 편이었습니다.

혼고 교수도 이토에 대해 “사생활이 방탕했던 인물” 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다만 그 같은 행동에 대해서는 “옛 질서를 허물고 새 시대를 열기 위한 도전이기도 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1963년부터 1984년까지 일본 1천엔 지폐 모델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4차례나 총리를 지낸 이토는 정치적 능력과 현실 감각, 서양 제도를 일본식으로 변용하는 실무 감각으로 일본에서는 근대 국가 건설의 실력자로 평가 받는다.
이토 히로부미는 1963년부터 1984년까지 일본 1천엔 지폐 모델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4차례나 총리를 지낸 이토는 정치적 능력과 현실 감각, 서양 제도를 일본식으로 변용하는 실무 감각으로 일본에서는 근대 국가 건설의 실력자로 평가 받는다.
150cm 왜소한 체구에도 일본 전국에 수많은 첩을 뒀던 이토
1863년 영국에 도착해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공부하던 당시 조슈 5인방의 모습. 윗줄 제일 오른쪽이 이토 히로부미.
1863년 영국에 도착해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공부하던 당시 조슈 5인방의 모습. 윗줄 제일 오른쪽이 이토 히로부미.

상식에 도전하는 건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이토의 성 편력은 당시 일본의 기준으로도 묵과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메이지 유신 직전 막부 말기, 청년 이토는 떡잎부터 남달랐습니다. 조슈번의 명령으로 정치적 동지 이노우에 가오루 등과 영국 런던 유학길에 나선 20대 이토에겐 선진문물 조사라는 명목에 맞게 더 많은 활동자금이 지급됐습니다.

그런데 이토는 이노우에와 달리 소호, 화이트 채플 등 당시 영국의 사창가 출입에 많은 자금을 탕진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토는 사별한 첫째부인을 포함해 정식 아내로 둔 사람은 두 사람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첩이나 애인의 숫자는 헤아릴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일본 전국 각지에 첩과 애인을 둬서 그 숫자가 “쓸어담을 만큼 많다”고 해서 ‘빗자루’(ほうき)라고 불릴 정도였으니까요.

지방에 출장을 가면 으례 기생들을 불러 놀곤 했는데, 일류 기생 보다 이·삼류 기생을 자주 불렀다고 합니다. 이유인즉 “그 지방의 일류 기생들은 대개 그 지역 유력자의 후원을 받고 있어서 분란이 생길수 있으니 이류나 삼류 기생을 불러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이토는 150㎝대에 불과한 작달만한 체구였지만, 정력이 워낙 강해 여자라면 나이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예컨데, 1892년 신문 반초호(萬朝報)에 실린 ‘대훈위 후작 이토의 색정’이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그가 자신의 집에 드나들던 목수 다무라의 딸들을 차례로 첩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실렸습니다.

금전을 대가로 다무라의 장녀 기세코를 첩으로 삼았던 이토는 기세코가 병사하자 차녀 쓰네코를 첩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쓰네코 마저 급사하자 이번엔 막내인 유키코 마저 첩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당시 유키코는 17살, 이토는 환갑을 앞둔 나이 였습니다.

이토와의 동침을 계기로 출세해 기생 거리인 신바시에 있는 유명 요정의 여주인 노릇까지 했던 히다 치호는 ‘신바시 생활 40년’에 다음과 같이 적고있습니다. “이토공은 남자의 배꼽 아래에는 도덕심이 없다고 말했다.”

이토가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된 이후 이를 풍자하는 삽화의 모습.  마지막 순간조차 그림자가 녀(女)로 돼 있을 만큼 여자를 밝혔음을 꼬집고 있다.
이토가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된 이후 이를 풍자하는 삽화의 모습. 마지막 순간조차 그림자가 녀(女)로 돼 있을 만큼 여자를 밝혔음을 꼬집고 있다.
“적당히 하라” 메이지 덴노까지 잔소리...일본인 최초 ‘카섹스’ 시도도
이와쿠라 도모미의 딸로 일본 사교계의 꽃으로 불기던 도다 기와코의 모습.
이와쿠라 도모미의 딸로 일본 사교계의 꽃으로 불기던 도다 기와코의 모습.

이토는 남의 아내를 건드리는데도 거리낌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표적인 상대가 바로 이와쿠라 사절단을 이끌었던 이와쿠라 도모미의 딸, 키와코 였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사교계의 꽃’으로 불리던 키와코는 이미 도다 가문의 남자와 결혼한 유부녀였습니다.

1887년 반초호는 ‘관저 뒤 정원에서의 추잡한 유희’ 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토가 무도회를 연 뒤, 키와코를 정원에서 겁탈하려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추후 실제로는 정원이 아닌 마차안에서 시도했다는 풍문이 돌았고, 이로 인해 “일본에서 처음 카섹스를 시도한 인물” 이라는 설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습니다.

논란의 사건 이후, 기와코의 남편 도다 백작은 오스트리아 빈의 전권대사에 임명되는 등 승승장구를 했습니다. 총리였던 이토가 기와코의 명예회복을 위해 뒤에서 힘을 써준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이토의 성편력은 당시 최고권력자인 메이지 덴노의 귀에도 들어갔습니다. 민망한 소문이 거듭되자 결국 덴노는 이토를 불러들여 “좀 적당히 하라”며 타이르기도 했습니다.

이토는 담담하게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자들 중엔 은밀히 첩을 두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공인된 기생들만 공공연히 부르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토도 끝내 건드리지 않았던 여성, 쓰다 우메코
1890년 미국 브린마 칼리지에 재학중이던 쓰다 우메코의 모습.
1890년 미국 브린마 칼리지에 재학중이던 쓰다 우메코의 모습.

얽히는 여성들과 끊임없이 염문을 내 ‘빗자루’, ‘색마’(色魔), ‘여자에 미친 자’(女狂い)로 풍자의 대상이 되던 이토였지만, 그런 그가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끝내 손 대지 않았던 여성이 있었습니다.

바로 일본 여성 교육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쓰다 우메코(津田梅子)입니다. 쓰다는 지난해부터 발행되기 시작한 일본 5000엔 신권 지폐 초상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여섯 살에 이와쿠라 사절단과 함께 미국에 건너갔던 쓰다에게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이토는 큰 오빠 같은 존재였습니다.

12년 뒤인 18살에 귀국해 일본어도 서툴렀던 쓰다를 이토는 발벗고 도왔습니다. 쓰다를 영어교사 및 통역으로 고용해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했고, 귀족층 자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역할을 하도록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쓰다는 귀족층 자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데서 만족하지 않았고,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당시 일본사회에서 혼기 찬 여성이 결혼도 안하고 공부만 한다는 건 있을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가정을 꾸려 육아와 살림을 하고 남편을 내조하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은 생각되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일본에서 명문으로 취급되는 사립여대 쓰다주쿠 대학 모습. [사진=위키피디아]
일본에서 명문으로 취급되는 사립여대 쓰다주쿠 대학 모습. [사진=위키피디아]

쓰다 역시 주변으로 부터 끊임없이 결혼 권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쓰다는 연애나 결혼엔 관심이 없었습니다. “내 앞에서 결혼 이야기 좀 꺼내지 말라”며 폭발한 편지가 남아있을 정도입니다.

미국에서 학위를 딴 뒤 귀국한 쓰다는 1900년 현재 쓰다주쿠 대학의 전신인 쓰다 영어학교를 설립해 여성교육의 제도화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쓰다는 학교 설립 과정에서 귀족들에게 의지하지 않았고, 정치적 영향이 개입되지 않도록 철저히 선을 그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자라면 출신, 나이를 상관하지 않았던 이토였지만 한 지붕 아래서 살면서도 쓰다에겐 아무런 성적 접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인 최초의 ‘커리어 우먼’이라고 할 수 있는 쓰다였기에 함부로 대할 수 없었고 사적 감정이 섞이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말이 잘 통했는지 이토는 집에 돌아오면 쓰다와 국가의 장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이토에게 쓰다는 여성이라기보다는 고문(顧問)에 가까운 존재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각종 염문 뿌렸던 日근대화 주역들...“자유와 속박 사이서 흔들리던 시대의 초상”
지난해부터 발행중인 일본의 신권 지폐들 견본. (위부터 시부사와 에이이치 1만엔, 쓰다 우메코 5천엔, 기타사토 시바사부로 1천엔)
지난해부터 발행중인 일본의 신권 지폐들 견본. (위부터 시부사와 에이이치 1만엔, 쓰다 우메코 5천엔, 기타사토 시바사부로 1천엔)

일본의 근대화 주역들은 상당수가 정치와 산업의 개혁자일 뿐 아니라, 사생활에서도 당대 관습을 흔드는 행보를 보였습니다. 이토처럼 도가 지나친 인물은 드물었지만, 그와 비슷하게 화려한 여성 편력으로 구설에 오른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초대 대장대신을 지내고 두 차례나 총리를 했던 마쓰카타 마사요시는 자식만 스무 명에 달했습니다. 어느 날 메이지 덴노가 “아이들이 몇 명이냐”고 묻자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조사해 보고드리겠다”고 얼버무렸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한술 더 떴습니다. 공식기록상 자식은 13명 이지만 이를 믿는 일본인들은 거의 없습니다. 사업과정에서 만난 여성들과의 사이에서 생긴 인지하지 못한 혼외자들까지 합치면 100명에 달한다는 설도 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시부사와가 자녀를 20~50명 둔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일각에서는 100명 가까이 됐다는 설도 있다. 시부사와(화살표)는 정부들로부터 얻은 7명의 자식들과 그들의 배우자, 손자들을 합쳐 동족회를 만들기도 했다.
역사학자들은 시부사와가 자녀를 20~50명 둔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일각에서는 100명 가까이 됐다는 설도 있다. 시부사와(화살표)는 정부들로부터 얻은 7명의 자식들과 그들의 배우자, 손자들을 합쳐 동족회를 만들기도 했다.

시부사와는 일본에 증권거래소를 도입하고 은행, 기업 등 500개가 넘는 회사를 만들어 일본 경제의 기틀을 닦은 기업가로 높이 평가받는 인물 입니다. 그런만큼 일찍이 1만엔의 유력 후보로 검토됐지만 한 차례 제외된 바 있습니다. 얼굴이 수염이 없이 너무 매끈해 위폐 제작 위험이 높기 때문이라는게 정설이긴하나, 지나친 여성 편력이 부담이 됐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외에도 일본 근대의학의 기초를 세운 기타사토 시바사부로, 저명한 세균학자 노구치 히데요 역시 복잡한 여성 관계로 세간에 이름이 오르내렸습니다. 학문과 과학분야에서 뛰어났던 인물들도 여성 편력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던 셈입니다.

물론 권력이나 재력을 앞세워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연애사가 비판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은 메이지 시대일본인들에겐 처음 개인의 자유를 모색하던 시기였고, 이들의 여성 편력도 새로운 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혼고 교수는 “단순한 사생활 방종이라기 보단, 기존 질서 전체를 뒤흔드는 상징적 행위였다”고 분석했습니다.

전근대 일본이 단순히 성적으로는 더 개방적이었을지 모릅니다. 기생과 유곽이 제도화돼 있었고, 첩을 두는 일 역시 비난의 대상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주목할만한건 이들의 연애가 전통적 가문 중심의 정략혼과 여성의 종속이라는 봉건적 질서에 균열을 냈다는 사실입니다.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유신삼걸’중 한사람인 기도 다카요시가 기생 이쿠마쓰를 정실로 맞아들인 일처럼 ‘사랑의 선택’은 당시로선 파격이었습니다.

메이지 시대는 자유와 속박, 개혁과 봉건의 흔적이 뒤섞인 복합적 풍경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시대 인물들의 염문은 지금도 하나의 가십거리 이상으로 격동의 시대가 남긴 모순과 긴장을 비추는 거울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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