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전체가 내우외환에 시달린 2024년이었다. 한국 기업 역시 쉽지 않은 한 해를 보냈다. 반도체·화학·건설·유통 등 한국 경제를 지탱해온 업종에 악재가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역대급 실적과 혁신 역량을 선보이며 맹활약한 CEO도 있다. 방산·식품·뷰티 등 불어온 ‘K열풍’을 등에 업고 열심히 노를 저은 기업 CEO가 저마다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총 13명 CEO가 전년보다 높은 순위를 차지했고 올해 새롭게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이도 20명이나 된다.

범현대가(家) CEO 약진
50명 중 8명이 ‘현대’…정지선 14위
범현대가 기업이 맹활약한 한 해였다. 1위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9위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 등 최상위권 2명을 비롯해 총 8명 CEO가 순위표에 이름을 올렸다. 구체적으로 현대차그룹이 4명, HD현대 3명, 현대백화점그룹이 1명이다. LG(4명), SK(3명), 삼성(3명) 등 여타 그룹 대비 ‘현대’라는 이름의 존재감이 더 돋보였다.
특히 HD현대 선전이 두드러진다. 지난해에는 정기선 수석부회장 한 명뿐이었지만 올해는 조석 HD현대일렉트릭 부회장(20위)과 이상균 HD현대중공업 사장(21위)이 나란히 상위권에 랭크됐다.
호실적이 고평가의 배경이다. HD현대 전력기기·에너지솔루션 계열사인 HD현대일렉트릭은 올해 역대급 실적을 달성했다. 인공지능(AI) 열풍과 데이터센터 확대, 노후 전력망 교체 등 글로벌 전력·인프라 수요가 급증하면서다. 올해 3분기 기준 누적 수주 금액은 30억2500만달러로 연간 목표(37억4300만달러)의 80% 이상을 달성했다. 3분기 누적 영업이익(5027억원) 역시 이미 지난해 연간 영업이익(3152억원)을 넘어섰다. 영업이익률도 20%대에 육박한다.
주력 조선사인 HD현대중공업에도 훈풍이 분다. ‘조선업 슈퍼사이클’에 진입했다는 평가에 힘입어 최근 탄핵 정국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주가가 치솟는다. 증권가에서는 올해 HD현대중공업 영업이익 추정치를 전년 대비 274% 급증한 6684억원, 내년에는 올해 추정치 두 배인 1조2361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할 정도다.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도 눈길을 끈다. 지난해 35위에서 올해 14위까지 21계단이나 점프했다. 올해 고물가와 경기 침체로 백화점 업계 전반이 힘든 시기를 보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으로 높은 순위다. 신세계·롯데 등 이른바 ‘유통 빅3’ 중 유일하게 10위권에 위치했다. 백화점 업계 새로운 트렌드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 ‘더현대’ 성공에 이어 올해 부산에 선보인 새 복합쇼핑몰 브랜드 ‘커넥트현대’까지 대박을 냈다. 올해 투표에서 혁신 부문 표를 쓸어담은 배경이다.

방산·식품·뷰티…뜨거운 ‘K열풍’
김정수 삼양식품 부회장…45위 → 11위
올 한 해 한국 기업 환경이 어려웠다지만, 그 와중에서도 두각을 드러낸 기업이 많다. 방산·식품·뷰티 등 해외에서 선전한 기업 CEO가 저마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
‘K방산’ 기업이 대표적이다. 김동관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부회장(6위), 강구영 한국항공우주(KAI) 사장(15위), 구본상 LIG넥스원 회장(19위) 등 K방산 주요 기업 CEO 모두 10위권 안쪽에 포진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이후 지정학 리스크가 커지면서 K방산 몸값이 치솟았다. 2020년 30억달러 수준에 그쳤던 국내 기업 방산 수출은 올해 150억달러를 가뿐히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K식품’ 선전도 눈에 띈다. 선봉장은 불닭 브랜드를 앞세운 삼양식품이다. ‘반짝 열풍’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가 무색하게 해외 매출 비중을 계속해서 늘려가는 모습이다. 올해 3분기 누적 기준 해외 매출 비중은 77.2%로 전년(69.4%)보다 8%포인트 가까이 더 늘었다. 3분기 누적 매출은 1조2000억원을 넘어서며 이미 전년 연간 매출을 넘었고 영업이익 역시 전년 대비 131%나 커졌다. 여기 힘입어 김정수 삼양식품 부회장 순위가 급등했다. 지난해 45위에서 올해 11위까지 수직 상승했다. 올해의 CEO 50명 중 가장 높은 상승폭이다.
함영준 오뚜기 회장(16위)은 사회적 책임 경영에서 다득표를 하며 순위를 전년보다 15계단 끌어올렸다. 새로 올해의 CEO 명단에 이름을 올린 식품사 CEO도 4명이나 된다. 지난해까지 CJ대한통운 대표를 맡다 올해 CJ제일제당 구원투수로 등판하며 호성적을 거둔 강신호 부회장(28위)을 비롯해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35위), 허인철 오리온 부회장(48위) 등이 신규 진입에 성공했다.
‘K뷰티’도 훨훨 난다. 지난해 50위에 그쳤던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은 명예 회복에 성공했다. 고질병으로 꼽혔던 높은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북미·일본·유럽 등 확장으로 글로벌 사업 재편에 성공하면서 순위가 27위까지 뛰었다. 올해 3분기 아모레퍼시픽 영업이익(750억원)은 전년 동기 대비 160.5% 커졌다. 매출도 10% 넘게 늘었다. 국내 대표 화장품 제조 기업으로 K뷰티 중소 브랜드 약진을 이끈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44위)과 이경수 코스맥스 회장(46위)도 올해 50위 진입에 성공했다.
거세게 부는 ‘여풍’
민영화 기업 CEO 신규 진입도 눈길
올해는 총 5명 여성 CEO가 순위권에 위치했다. 2005년 순위 집계 이래 ‘역대 최다’다. 2010년대 들어 1~2명 선정에 그쳤던 여성 CEO는 지난해 4명까지 늘더니 올해는 5명으로 사상 최다를 경신했다. 가파른 순위 상승을 보인 김정수 부회장(11위)을 비롯해 올해 역대 최대 실적을 연거푸 경신 중인 최수연 네이버 대표(22위), 백화점 부문 회장 승진에 성공한 정유경 ㈜신세계 회장(26위), 어느덧 14년 차 대표로 기업을 이끌고 있는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43위), 패션 기업 2세 경영 선두에 섰다는 평가를 받는 성래은 영원부역 부회장(47위) 등이 주인공이다.
포스코·KT·KT&G 등 지난해와 올 초, 잇달아 새 수장을 맞이한 ‘소유 분산 기업’에도 관심이 쏠린다. 소유 분산 기업은 과거 정부가 지분을 보유했지만 민영화 과정에서 민간으로 지분이 넘어간 기업을 말한다. 올해 투표 결과를 보면 대체로 ‘성공적인 대표 교체’였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장인화 포스코 회장(17위), 김영섭 KT 사장(31위), 방경만 KT&G 사장(37위) 등 새 얼굴이 모두 올해의 CEO 명단에 안착했다.
[나건웅 기자 na.kunwoong@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90호 (2024.12.25~2024.12.31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