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억달러(약 11조3000억원).
올해 10월 누적 기준 한국 농식품이 달성한 수출 기록이다. 단연 역대 최대 규모로, K푸드 열풍이 본격화됐던 지난해 동기와 비교해도 8.7% 늘어난 액수다. 쌀가공식품 수출액(약 3445억원)은 전년 대비 40% 넘게 증가, 10월인데도 이미 지난해 기록을 넘어섰고 라면은 10월 기준 사상 최초 10억달러(약 1조4000억원) 수출 고지를 넘어섰다. 과자(17.6%), 음료(15.8%), 김치(3.1%) 등 K푸드 주요 품목 모두 전년을 훌쩍 뛰어넘는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3분기까지 한국 식품 기업 표정이 썩 좋지 않다. 훨훨 나는 K푸드가 무색하게, 전년 대비 실적이 오히려 악화된 기업이 태반이다. 주가도 이상하리만치 우울하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국내 주요 식음료 기업 10개로 구성된 코스피 음식료품 지수는 올해 6월 4924포인트로 최고가를 기록한 후 내리막길을 타는 중이다. 11월 21일 기준 약 3800포인트로 고점과 비교하면 23% 가까이 빠진 수치다.
문제는 우울한 내수 시장에 있다. 고물가와 경기 침체 탓에 해외 실적 개선분을 국내에서 모두 갉아먹는 모양새다. 미래도 불투명하다. 인구 절벽으로 시장 자체가 쪼그라들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게 식품 업계 중론이다.

결국 ‘답은 글로벌’이다. 올해 3분기 기준 국내 주요 식품 기업 20개 실적을 분석한 결과, 실제 해외 매출 비중이 높고 전년 대비 늘어난 기업일수록 호실적을 보이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투자자 의견도 비슷하다. 매출과 영업이익 규모가 적어도, 해외에서 호성적을 낸 기업이면 주가가 폭등한다. 연매출 1조원을 겨우 넘는 삼양식품 시총이 연매출 18조원에 달하는 CJ제일제당 턱밑까지 쫓고 있을 정도다.
올해 3분기 기준, 주요 K푸드 기업 글로벌 성적표를 분석해본 배경이다.
韓 식품, 모두 어렵다고?
해외 비중 77% 삼양, 영업이익 2배↑
해외 실적 개선에도 불구하고 올 3분기 전체 매출과 영업이익이 감소한 건 식품 업계 전반적인 경향이다. 국내 식품 매출 1위 CJ제일제당부터 그렇다. 올해 3분기 해외 식품 매출이 1조4031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5.1% 늘었지만 전체 식품 매출은 1.1%, 영업이익은 31.1% 감소했다. 내수 소비 부진으로 국내 식품 매출이 6.1% 줄어들면서 나타난 결과다.
‘라면 빅2’ 농심과 오뚜기 상황도 비슷하다. K라면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매출과 영업이익 모두 전년 대비 역성장했다. 농심은 올해 3분기 연결 기준 매출액 8504억원, 영업이익 376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액은 0.6%, 영업익은 32.5% 줄었다. 국내 수출액(33.5%)을 비롯해 베트남(20.4%)과 일본(20.3%), 호주 사업 부문(15.4%) 판매 모두 두 자릿수 성장률을 보였음에도 내수 부진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모습이다. 중국 사업 부진(-21%)도 뼈아팠다.
오뚜기 상황도 꼭 닮았다. 3분기 연결 기준 매출은 9041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0.5% 줄었고 같은 기간 영업이익(636억원)은 23.4% 감소했다. 해외 매출이 전년보다 6% 이상 늘며 선전했지만 주력인 면 제품을 비롯한 국내 사업 매출이 감소한 여파다.

물론 예외도 있다. 해외 매출 비중이 60%를 넘는 ‘유이’한 기업, 삼양식품과 오리온이 주인공이다. 삼양식품 3분기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101%, 오리온은 삼양식품보다는 못하지만 9.1% 성장한 준수한 활약을 보였다. 삼양식품은 국내 식품 기업 중 해외 매출 비중이 단연 높다. 올해 3분기 누적 기준 해외 매출 비중은 77.2%로 전년(69.4%)보다 8%포인트 가까이 더 늘었다. 오리온은 같은 기간 63.7%에서 65.7%로 증가하며 성장세를 이어갔다.
삼양식품 전성기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3분기 누적 기준 매출이 1조2000억원을 돌파하며 이미 전년 전체 매출 기록을 넘어섰다. 누적 영업이익은 전년보다 131% 늘어난 2569억원을 기록했다. 기존 일본·중국·미국 법인에 이어 올해 3월 본격적으로 수입·유통을 시작한 인도네시아 법인, 올해 7월 설립한 유럽 법인 호조가 더해졌다.
오리온은 내수 부진과 중국 법인 실적 악화로 잠시 고전했지만 베트남·러시아 등 매출에 힘입어 견조한 성장세를 유지했다. 베트남은 쌀과자, 양산빵의 성장과 참붕어빵 등 신제품으로 매출이 늘었고 러시아는 대형 체인스토어인 ‘X5’, 그리고 주류·식품 전문 채널 ‘K&B’와 거래가 정상화되며 매출과 영업이익이 각각 27.6%, 37.5% 뛰었다.
삼양식품과 오리온, CJ제일제당 뒤를 이어 해외 매출 비중 4위를 차지한 업체는 의외로 롯데칠성음료다. 롯데칠성음료의 해외 매출 비중은 지난해 22.2%에서 올해 3분기 누적 기준 39%까지 치솟았다. 성장폭으로는 삼양식품을 웃돈다. 해외 매출 증대에 힘입어 올해 3분기 누적 매출도 전년 대비 35% 가까이 늘었다. 지난해 3분기 말 종속기업으로 편입한 ‘필리핀펩시’가 효자다. 연매출 1조원에 달하는 필리핀 음료 업계 2위 기업. 필리핀 법인(PCPPI)은 3분기 누적 매출액 7694억원, 영업이익 43억원을 기록하며 전년 대비 각각 9.7%, 165% 신장률을 기록했다. 파키스탄(22.6%)과 미얀마(13.6%) 등 여타 동남아 지역 법인 매출도 호조를 보이고 있다. 대표 제품인 ‘펩시’ ‘세븐업’ ‘마운틴듀’ 등 판매 호조와 경영 효율화에 힘입은 결과다. 5위 농심(37.7%), 6위 대상(32.9%), 7위 풀무원(25.9%) 순이다. 이 중 3분기 영업이익이 늘어난 곳은 풀무원뿐이다. 여타 3개 기업은 높은 해외 매출 비중에도 불구하고 그 증가폭이 전년 대비 1%포인트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점이 삼양식품·오리온·풀무원과 다른 점이다. 국내 식품 업계 관계자는 “해외 매출 비중을 맹신하기는 어렵다. 국내 매출 증가폭이 해외 매출 증가폭보다 낮을 경우 해외 매출 비중이 높아지는 착시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라며 “다만 내수 시장이 부진한 가운데 위험 분산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해외 비중 수치가 유의미하다”고 말했다.
[나건웅·반진욱·조동현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86호 (2024.11.27~2024.12.03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