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바람조차 뜨거운 늦여름 어느 날 찾은 서울 종로구 가회동 ‘락고재 서울’. 그런데 이게 웬일. 이 한옥호텔 안에는 서늘한 바람이 지나간다. 2시가 지나자 캐리어를 끌고 도착한 가족, 커플 단위 손님이 속속 눈에 띄었다. 짐을 옮겨주는 직원은 흔한 호텔 유니폼 아닌 개량한복을 입고 있다.
늦여름 무더위가 기승이지만 객실 내 옥돌마루에서 올라오는 냉기 덕분에 시원하고 쾌적하게 숙박할 수 있을 듯싶다. 서울을 자주 찾는다는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이추이 씨(35)는 “서울을 방문할 때마다 되도록 한옥에서 숙박하려 하는데 최소 3개월 전에는 예약해야 자리가 있다”며 “친구들 사이에서 소문난 인기 한옥호텔은 이미 만실이라 아직 한 번도 방문해보지 못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안지원 락고재 대표는 “한옥호텔은 객실 가동률이 90% 이하로 내려간 적이 없다”고 전했다.
전통 한옥의 멋과 정취는 살리면서 현대식 호텔의 편리함을 접목시켜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하는 한옥호텔이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마침 SNS에서 이런 한옥 인증샷을 찍는 것이 트렌드가 되면서 ‘힙’한 여행지를 찾는 MZ세대 사이에서도 한옥호텔이 각광받는 모습이다.
인스타그램에는 ‘한옥’으로 해시태그(#)된 게시물이 57만개에 이른다. 한옥마을(99만6000개), 한옥스테이(12만2000개), 한옥숙소(5만6000개), 한옥호텔(3만5000개)도 자주 태그되는 주제 중 하나다. 이런 트렌드를 반영해 에어비앤비는 아예 2022년 11월부터 ‘한옥’ 카테고리를 신설했다. 이에 따라 앞으로 세계 어느 나라에서 에어비앤비에 접속해도 한옥 숙박 메뉴에 연결할 수 있다. 각국 전통 가옥 중에서 정식 카테고리를 부여받은 것은 한옥이 유일하다.
이런 관심 덕에 한옥스테이와 같은 ‘한옥체험업’ 숙박 형태도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2019년 1724개(1월 기준)에 그쳤던 한옥체험업은 올해 2754개소(2월 기준)로 4년 만에 59% 증가했다.
서울 열린데이터광장에 따르면 서울에서 한옥스테이 등 ‘한옥체험업’으로 인허가를 받는 규모는 2017년 13건, 2018년 19건에 그쳤는데 2021년 41건, 2022년 37건으로 늘더니 지난해에만 51건에 달했다. 또 서울시 내에 품질을 인증한 한옥스테이는 26곳뿐이지만, 구청 허가를 받아 숙박업소로 운영 중인 넓은 의미의 한옥스테이는 총 249곳에 이른다. 이 가운데 209곳이 종로구에 몰려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대체숙박업(외국인 관광 도시민박업·한옥체험업)에 대한 시 지원금이 늘어남에 따라 한옥체험업을 운영하는 건축주의 경제적 부담은 줄어들고 있다”며 “한옥 숙박시설과 한옥스테이 인증시설이 확대될 것”으로 내다봤다.
한옥 숙박시설이 인기를 끄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한옥이 인증샷 명소로 떠오른 것이 한옥 숙소 인기에 한몫했다. 특색 있는 경험을 원하는 이가 많아지면서 호캉스 대신 이색 숙소를 찾는 트렌드가 대세가 된 덕분이다. 특히 최근에는 연예인들이 SNS에 올린 한옥호텔 인증 사진이 화제를 모으면서 한옥 숙소가 ‘여행 트렌드의 정점’이라는 인식도 확산됐다.

일례로 배우 장동건·고소영 부부는 지난 8월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더한옥헤리티지하우스’에 머무르고 “아름다운 한옥에서”라는 글과 함께 인증샷을 공개했다. 이 숙소의 하룻밤 가격이 무려 1000만원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화제를 모았다. 더한옥헤리티지하우스는 연면적 1만6332㎡의 리조트형 한옥호텔로, 2027년까지 독채형 35실을 포함해 총 137실로 확장될 예정이다. 현재는 영월종택 1~2동 독채형 2곳만 운영 중이다. 한옥 내부는 자연광이 잘 들어와 사진 명당으로 알려졌다. 블랙핑크·장근석 등 연예인이 방문했고 영화·드라마·뮤직비디오 촬영지로 알려진 ‘락고재 서울’도 1박 평균 30만원대임에도 국내외 2030 젊은 고객이 ‘힙’한 공간으로 인식해 예약 전쟁을 벌일 정도다.
또 엔데믹 이후 외국인 관광객이 급증하기 시작했는데, 단순히 늘기만 한 게 아니라 ‘개별 여행’ 위주로 여행 트렌드가 재편되면서 한옥이 더욱 주목받았다. 면세점보다는 쇼핑과 맛집, 체험 위주로 여행하려는 수요가 급증하면서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한옥 숙박시설이 인기몰이를 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 방문객은 1103만명으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245%나 증가했다. 올 들어서는 상반기에만 전년 동기 대비 73.8% 늘어난 770만명이 한국을 방문했다. 지난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가운데 84%가 개별 여행객이다. 한옥 숙박시설은 서울 서촌과 북촌, 경복궁과 덕수궁, 창경궁 등 볼거리 많은 관광지 근처에 위치한 경우가 많다. 개별 여행객 입장에선 관광과 전통문화 체험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을 수 있는 한옥 숙박시설을 선호하는 게 당연해 보인다. 그뿐인가. 한옥호텔은 단순히 한옥이라는 인프라 외에 다양한 전통 체험을 함께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전통 방식의 한옥은 아파트나, 현대식 주택에 익숙한 여행자에게 그리 편한 숙소는 아니다. 씻고 자고 먹고 볼일 보는 장소가 제각각이고 공동시설이라는 점, 비좁은 공간과 방음이 안 돼 노출되기 쉬운 사생활 등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사정을 반영해 국내에서는 전통 한옥의 멋과 호텔식 편의성을 접목시킨, 이른바 고급 한옥호텔·리조트가 속속 등장해 인기를 얻고 있다. 겉보기에는 전통 한옥이지만 객실 내부에 호텔식 욕실과 어메니티(일회용품)를 갖추고, 요 대신 낮은 매트리스를 깔아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하는 식이다. 전화로만 예약을 받던 예전과 달리 안내 데스크와 각종 모바일 플랫폼을 통해 편하게 예약할 수 있게 된 점 또한 한국어 소통에 익숙지 않은 외국인 방문객을 끌어모으는 데 한몫했다. 덕분에 과거에는 한옥을 경험할 방법이 ‘일일 방문’이나 ‘한옥 민박 체험’이 주를 이뤘다면 최근에는 고급화된 프리미엄 한옥스테이가 각광받는 모습이다.
[정다운 기자 jeong.dawoon@mk.co.kr, 조동현 기자 cho.donghyu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76호 (2024.09.11~2024.09.26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