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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위에 상처를 남긴 자본주의의 민낯…영화 ‘브루탈리스트’

송경은 기자
입력 : 
2025-02-12 11:5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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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브루탈리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홀로코스트에서 탈출한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 토스의 삶을 그린 작품으로, 그의 고난과 재기를 다룬다.

주요 캐릭터들은 서로 다른 출신과 경제력을 배경으로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반영하며, 극중의 강렬한 연기와 음악이 관객을 매료시킨다.

그러나 애드리언 브로디의 발음 보정 논란과 헝가리 건축가 마르셀 브로이어와의 유사성 지적 등으로 논란이 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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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개봉 ‘브루탈리스트’
오스카상 유력 후보작 주목
215분 상영 인터미션 15분
긴 시간에도 불구 관객 압도
영화 ‘브루탈리스트’의 한 장면. 헝가리 출신 건축가인 주인공 라즐로 토스가 설계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유니버설 픽쳐스
영화 ‘브루탈리스트’의 한 장면. 헝가리 출신 건축가인 주인공 라즐로 토스가 설계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유니버설 픽쳐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노예는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노예다.’ 독일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서 탈출해 미국으로 떠난 라즐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에게 아내 에르제벳(펠리시티 존스)은 괴테의 문장을 언급한다. 헝가리 출신 유대인인 토스가 낯선 땅에서 혹시나 겪을지 모를 일들에 대한 걱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우려는 예외 없이 현실이 되고 만다.

지난 12일 개봉한 ‘브루탈리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쫓기듯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유대인 건축가 토스의 굴곡진 삶을 그린 영화다. 토스는 헝가리에서 대담하고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건축가였다. 하지만 나치 독일은 그의 건축 디자인이 게르만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핍박한다. 전쟁통에서 가까스로 탈출해 미국까지 왔지만 목숨만 겨우 건졌을 뿐, 그는 하루살이처럼 거리에서 먹을 것과 일자리를 구걸하는 신세가 된다.

미국 뉴욕에서 맞춤형 가구샵을 운영하는 사촌 아틸라가 토스의 정착을 돕는 듯했지만, 고객의 갑질로 손해를 입자 가차없이 그를 내쫓는다. 뒤늦게 토스의 재능을 알아본 필라델피아의 갑부 해리슨(가이 피어스)이 교회, 도서관 등 지역을 빛낼 대규모 설계 프로젝트를 맡기면서 분위기는 전환된다. 토스는 드디어 재기할 기회가 왔다며 기쁜 마음으로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고, 해리슨 가의 도움으로 아내와 조카까지 안전하게 미국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한다. 해리슨 가 사람들은 토스 부부에게 예우를 갖추고 따뜻한 음식과 머무를 곳을 제공하며 자비를 베푼다.

그러나 15분의 인터미션을 기점으로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러 롤러코스터를 타듯 위태롭게 달리는 토스의 삶을 따라간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내와 함께하게 됐지만 불쑥불쑥 터져나오는 불안과 공포, 분노가 끊임없이 토스를 잠식한다. 새 삶을 꿈꾸면서도 마약과 술에 의존해 밤낮 없이 교회 설계에 몰두하는 모습에선 광기마저 느껴진다. 추가 비용을 자기 급여에서 깎으면서까지 성전의 높이를 가능한 한 높게 만들기 위해 애쓰는 토스를 보며 에르제벳은 “자유에 대한 갈망일까”라며 어렴풋이 그를 이해한다.

해리슨 가 사람들은 겉으로는 젠틀한 모습이지만, 묘하게 뒤통수를 치거나 은연 중 그들 간의 명확한 상하 관계를 암시한다. 결국 해리슨은 ‘천재 건축가’라며 자신이 띄워줬던 토스를 처참히 짓밟는다. 영화는 이런 부조리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대신, 하늘을 향해 거대하게 쌓아올려지는 건축물과 처참하게 영혼이 부서져가는 토스의 모습을 교차시키면서 서서히 드러낸다. 또 괴로워하는 토스를 지켜보는 아내 에르제벳의 절망을 함께 보여주면서 부부에게 닥친 비극을 더욱 극대화한다.

영화는 출신 성분과 경제력이 다른 두 가족의 구도를 통해 자본주의의 민낯을 그렸다는 점에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2019)을 떠올리게 한다. 다만 전쟁과 핍박, 성추행, 마약 등으로 점철된 ‘브루탈리스트’의 서사는 블랙코미디로 비극적인 상황을 유쾌하게 풀어낸 ‘기생충’보다는 훨씬 무겁게 다가온다.

‘브루탈리스트’는 개봉 전부터 215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으로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극중 희로애락을 절절하게 표현한 애드리언 브로디의 압도적인 연기와 옛 음악들이 속도감 있게 어우러진 장면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시간을 잊게 만든다. 중간 중간 따스한 햇빛이 드리운 멋진 건축 공간들을 보여주는 장면도 소리 없이 감탄을 자아낸다. 이례적으로 영화 중간에 넣은 인터미션은 단순히 긴 시간을 끊는 것을 넘어 희망이 보이는 1막과 비극으로 치닫는 2막 사이의 간극을 강조하는 듯하다. 수십 년의 시간이 흘러 국제 건축 비엔날레에서 다시 토스의 건축물이 조명을 받으며 영화는 끝나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이유다.

‘브루탈리스트’는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은사자상) 수상에 이어 골든글로브 작품상·감독상·남우주연상 등 주요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고 있다. 다음달 예정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10개 부문 후보에 올라 강력한 수상작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처럼 영화계에서 쏟아지는 찬사와 달리 영화는 각종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주인공 역의 배우 애드리언 브로디의 발음을 인공지능(AI)으로 보정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다. 건축계에서는 가상의 건축가로 그려진 라즐로 토스와 배경이 상당히 유사한 헝가리 출신 건축 거장 마르셀 브로이어의 삶을 왜곡했다는 비판도 일었다.

영화 ‘브루탈리스트’의 한 장면. 미국의 억만장자이자 건축 설계 의뢰인인 해리슨이 라즐로 토스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유니버설 픽쳐스
영화 ‘브루탈리스트’의 한 장면. 미국의 억만장자이자 건축 설계 의뢰인인 해리슨이 라즐로 토스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유니버설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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