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호 표기를 변경한 지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익숙한 부름은 '터키'다. 하지만 나라의 이름을 제대로 말하는 것은 당연한 예의다. 튀르키예(Turkiye), 그곳으로 향했다. 한국에서 튀르키예로 가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이스탄불 항공편에 오르는 것이다. 튀르키예 최대의 도시 이스탄불. 하지만 이번 여정은 그곳이 아니다. 좀 더 깊숙이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수도 앙카라, 그리고 그 주변의 고대도시다. 국내선으로 한 번 더 갈아탄 끝에 앙카라(Ankara)에 당도했다.
뽀얀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춘삼월 황사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같은 흙일 텐데 14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마주한 아나톨리아(Anatolia)의 흙 내음은 분명 묘했다. 기원전까지로 계산해도 2000년이 훌쩍 넘는 시간. 사실 그 이전으로 수천 년이 지나간 흔적도 이곳 튀르키예에서는 평범하다. 좀 보태 표현하면 널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네스코도 일찌감치 이를 인정했다. 가깝게는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5곳 더 등재시키며 튀르키예는 30곳을 이름에 올렸다.
동행에 나선 가이드 아이발라 괵수 아브즈는 "'해가 뜨는 곳' 아나톨리아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인사를 건넸다. 그의 말답게 앙카라의 햇살은 한낮이 오기 전인데도 강렬했다. 하지만 여명처럼 보드랍기도 했다. 어쩌면 고대인들이 받은 느낌도 같았으리라. 우리가 동해 일출에 뭉클하듯, 그들에게 해 뜨는 곳은 이곳이라 여겨졌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가이드를 맡은 괵수는 "아나톨리아는 세상의 중심"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했다. 실제로 튀르키예 현지인들은 자신들을 튀르키예인 또는 아나톨리아인, 터키인 등 다양하게 칭했다. 굵직한 역사를 켜켜이 쌓아온 민족답게 그 역사를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이 전해지는 말로 들렸다. 아나톨리아를 압축적으로 만나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을 찾는 것이다. 박물관의 규모가 꽤 크다. 그도 그럴 것이 구석기·신석기는 물론 이곳을 거쳐 간 여러 시대의 유물 20만여 점을 전시 중이다. 왕과 왕비 또는 신들을 상징하는 조각상과 부조, 장신구, 생활용품이나 그림 등이 놀라울 만큼 다양하게 관람객을 맞고 있다. 특히 수천 년 전 유물의 보존 상태는 '느낌표' 여러 개를 찍게 한다. 생생하다 할 정도로 섬세함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결혼·이혼 증명서나 영수증, 지금 내놔도 손색없을 만큼 정교한 조각이 담긴 식탁이나 와인병 등이 대표적이다.

박물관에서 달궈낸 역사를 향한 탐구욕을 그대로 둘 수는 없는 법. 앙카라에서 약 90㎞ 떨어진 고르디온(Gordion)으로 발길을 옮겼다.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새롭게 등재된 곳이다. 이곳은 그리스 신화 속 미다스 왕의 거대 고분과 고르디우스의 매듭으로 유명하다. 손만 대면 황금으로 변하게 했던 미다스 왕의 무덤은 멀리서 보면 큰 구릉처럼 보인다. 무덤 안까지 동굴을 냈는데, 안타깝게도 황금빛은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시신이 있는 곳을 돌도 아닌 나무로 쌓아 올렸다. 상전벽해, 격세지감 같은 사자성어를 떠올릴 때쯤, 가이드 괵수가 "지금 보는 묘실은 세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재 건축물"이라고 귀띔했다.


아피온은 좀 더 특별했다. 지구가 아닌 '혹성탈출' 분위기를 방불케 하는 동굴 마을 '아야지니' 때문이다. 구멍이 듬성듬성 난 암석 사이로 햇볕이 드는 모습이 다른 세상처럼 보인다. 이곳은 10~12세기 때 응회암을 깎고, 자연에 퇴화한 형태를 살린 비잔틴 교회다. 군데군데 살림을 했던 곳도, 무덤도 공존한다. 그래서 층층이 계단식으로 이어진 동굴집을 두고는 '인류 최초의 아파트'라고까지 불렀다.
대미는 코니아(Konya)에서 치렀다. 무려 7000년 전 인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차탈회위크 유적지가 이곳에 있다. 1958년 처음 발견한 이래 근 90년 가까이 발굴에 힘을 쏟고 있다. 천장에 구멍을 뚫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2층 구조라는 점, 맹수의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침실, 화장실, 부엌 등이 한 곳에 있다는 점 등이 인상적이다.

앙카라, 그리고 고대도시에서의 여정은 시공간을 초월했다. 시계를 거꾸로 얼마나 돌려야 할지 감을 잡을 수조차 없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1년을 걷는 듯했다. 아니 10년, 어떤 때는 100년을 걷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튀르키예에서 한 걸음의 가치는 남달랐다. 더 옹골차게 한 발을 내디뎠다. 앞으로 그 발걸음은 여러분의 몫이다.
[튀르키예 장주영 여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