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부터 소크라테스까지
내면을 돌아보려고 한 이들
진리·선함을 행동기준 삼아
전문가 양성에 사활건 교육
성숙한 교양인도 키워내야
내면을 돌아보려고 한 이들
진리·선함을 행동기준 삼아
전문가 양성에 사활건 교육
성숙한 교양인도 키워내야

'최초의 근대인'으로 불리는 인물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앞선 근대인으로 평가받는 사람은 서양 고대의 마지막이자 중세의 시작에 살았던 성 아우구스티누스다. 그는 단순히 그리스도교 사상사뿐 아니라 서양 정신사의 높은 봉우리로 자리 잡고 있으며, 그의 사상은 이후 서양 지성사의 산맥을 이뤘다. 그의 지성은 매우 뛰어나, 그리스도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조차 "이렇게 지성적인 사람이 왜 그리스도교를 믿었는지 모르겠다"고 언급했을 정도다.
아우구스티누스를 근대인으로 부르는 것은 의아하게 들릴 수 있다. 서양 근대는 16세기부터 시작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근대인의 선구자로 평가하는 이유는 서양 사상사에 고전으로 평가받는 그의 책 '고백록(Confessiones)'에 있다. 그 책은 단지 그의 개인적인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라틴어 'Confessiones'는 공개적으로 신을 찬양하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나아가 그 신앙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 모두를 포함한다. 그중 그가 근대인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 책에서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고 개인의 자아와 자유 의지를 샅샅이 탐구한 데에 있다. 근대 철학을 연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의 선구자 격으로 평가받았다. 교만하게도 근대 이후의 지식인들은 근대 이전 사람들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면에 몰두한 사람으로 간주한 것이다.
외면을 강조하는 사람은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명예와 수치를 제일의 가치로 삼는다. 고대 그리스의 최고 고전 일리아스나 로마의 고전 아이네이스 모두 영웅의 명예를 다룬다. 이 외면의 세계는 다른 사람의 눈에 따라 혹은 그것을 의식해 자신의 삶을 구성하려 한다. 어떤 사람이 특정한 일을 피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 행동이 그에게 수치를 주기 때문이다. 반면 내면을 돌아보는 사람은 진리, 선함, 아름다움을 행동과 생각의 기준으로 삼는다. 소크라테스나 예수 등은 내면을 우선시한 위인들인 셈이다. 내면의 사람이 특정 행동을 피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 행동이 그에게 죄책감을 주기 때문이다. 외면은 명예를 좇고 수치를 멀리하지만, 내면은 참된 일을 하고 죄책을 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외면은 집단지향으로, 내면은 개인지향으로 연결된다.
외면의 집단지향성 사회 속에서는 개인의 충분한 성숙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여긴다. 그런데 이러한 추론은 자신보다 덜 문명화됐다는 대상을 향해 오만하게 적용됐다. 가령 맥아더가 일본인을 '12세 어린아이'에 비유하면서 일본인의 정치적, 도덕적 성숙도가 부족하다고 했다는 일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서 죄책감의 문화로서의 그리스도교적 서구와 수치심의 문화로서의 유교적 동양을 대비한 맥락과 일치한다.
외면과 내면의 사상적, 사회적 용법을 점검하다 보면 혹시 부정확하고 오만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지 조심스러우면서도 내면 혹은 영혼으로 일컫는 그것이 옹글고 단단한 사람, 곧 교양인이 오늘날 절실하다고 새삼 느낀다. 우리 교육이 온통 전문가를 어떻게 키우는지에 몰입하고 쓸모 있는 지식 창출에 우리의 사활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난 몇 년을 돌아보면 항상 중요한 역사의 변곡점에 우리에게 희망을 준 사람들은 전문 직업인이 아니라 내면이 성숙하고 용기 있는 교양인이었다. 자신의 전문 분야 기술을 발휘해 사익을 얻어내는 데에 능숙한 이익 추구형 전문인이 아니라, 인생과 역사 전반을 통찰해 자신의 자리에서 시민의 덕성을 보여주는 교양인 말이다.
[김학철 연세대 학부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