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대 후반 미국에 대학원생 신분으로 유학 중이던 필자에게 부친이 급작스럽게 방문했다. 먼 타국에서 고생하는 아들의 위로 방문인 줄 알았는데, 방문의 진짜 목적지는 뜬금없는 펜실베이니아의 교도소였다.
필자의 거주 지역과 다소 거리가 먼 펜실베이니아까지 물어물어 몇 시간을 운전하여 교도소 면회를 가게 되었다. 당시 부친이 만난 인물이 로버트 김이다. 미국 해군정보국에서 정보분석가로 근무하던 로버트 김은 1996년 9월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에게 북한 관련 정보를 넘겨준 혐의로 징역 9년형을 받고 수감 중이었다. 평소 민족과 애국을 주문처럼 외치던 부친은 로버트 김의 구형이 부당하다고 판단했던지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날아와 면회한 뒤 국내 구명운동에 동참한 것으로 기억된다.
오래전 일화가 생각난 계기가 최근 간첩죄 관련 법 개정 움직임이다. 간첩죄 적용을 기존 적국에서 외국으로 확대하는 형법 개정안이 2004년 처음 발의된 이후 20년 만에 지난해 11월 국회 법사위를 통과했다.
현행 형법 98조는 현행법은 간첩죄를 ‘적국에 간첩하거나 적국에 군사상 기밀을 누설한 경우’에 한해 처벌하고 있다. 현재 적국으로 명확하게 규정된 북한이 아닌 외국, 외국인 또는 외국단체에 국가기밀 등을 누설하는 경우는 현행법상 간첩죄가 아니기 때문에 면죄부를 받는다. 이를 변경하여 북한뿐 아니라 다른 외국에 우리 중요 정보를 빼돌린 경우에도 간첩죄로 처벌하자는 제안이다. 이미 로버트 김 사례를 봐도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 국가는 ‘외국’이라는 개념을 일괄적으로 적용해 자국에 해가 되거나 타국을 이롭게 하는 행위를 ‘간첩죄’로 처벌한다.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법안 추진에 적극적이어서 본회의 통과가 낙관적으로 기대됐으나, 최근 ‘내부적 악용 가능성’이 거론된 후 개정 움직임은 중지된 상태다. 민주당이 언급한 ‘내부적 악용 가능성’은 아마도 간첩죄 적용 범위를 확장하면 국정원이 국내 사안에 개입할 여지가 커질 거라는 정치적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듯하다.
국제 정세가 수시로 바뀌는 오늘날 적국과 우방국 구분은 사실상 가능하지도 타당하지도 않다. 더욱이 이전의 군사 안보에 국한되던 정보 경쟁이 경제 안보로 바뀐 지 이미 오래다.
2018년부터 2022년까지 5년간 적발된 산업기술 해외 유출 건수는 총 93건에 달하다 지난 한 해만 23건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대개 국가 핵심 분야인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의 기술이다.
간첩죄 적용이 불가능해 ‘산업기술보호법’으로 처벌되기 때문에 징역형 비율이 20%로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다. 얼마 전 산업통상자원부가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지만, 그마저도 핵심 조항이 빠진 ‘맹탕’ 개정이란 비판이 강하다.
아울러 동맹국에 대한 범죄를 대한민국에서의 범죄에 준해 처벌하도록 한 형법 104조도 폐지가 고려되어야 한다. 현행법대로라면 한국의 이익을 도모하다 미국에서 형을 산 로버트 김을 한국 정부가 다시 처벌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국가도 우방이냐 아니냐를 따지면서 정보전을 하지 않는다.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치열한 국가 간 경쟁은 적과 동맹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우물 안 개구리마냥 ‘내부적 악용 가능성’이라는 과거 패러다임에 갇혀 간첩죄 관련 형법 개정에 소극적으로 접근한다면 그야말로 시대의 흐름에 동떨어진 채 국제 호구로 남게 될 수 있다.

[장지호 사이버한국외국어대 총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05호 (2025.04.16~2025.04.2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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