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사소통의 심리학(2)
정치인의 터치와 관련하여 꼭 언급하고 싶은 현상이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Barack Obama·1961년~)의 터치 방식인 ‘오바마 터치(Obama Touch)’입니다. 얼마나 특별했으면 터치에 오바마라는 이름까지 붙였을까요?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기 전, 미국에서 흑인(혹은 흑인 혼혈) 대통령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2008년, 그가 미국 44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전 세계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미국에서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묻기 시작했습니다.
다양한 사회학적, 정치학적, 혹은 역사학적 설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심리학자인 내게는 오바마의 매력적인 태도와 관련한 가설이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그의 연설, 카리스마 넘치는 그의 태도는 미국 사회의 인종적 편견을 잠재웠습니다. 무엇보다 친화력 있는 비언어적 소통 방식이 그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특히 사람들은 그의 ‘피스트 범프(fist bump)’, 즉 ‘주먹 인사’에 주목했습니다.
2008년 6월 민주당 대선 후보로 지명을 받은 후, 오바마는 무대 위에서 아내 미셸과 기뻐하며 포옹한 후 가벼운 주먹 인사를 나눴습니다. 이 사소한 행동은 당시 모든 미국 언론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 이전까지 주먹 인사는 ‘하이파이브’처럼 친구 사이나, 스포츠 경기에서 운동선수끼리 인사, 축하 혹은 친근감의 표현으로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어린 친구들이 주로 하는 행동이었지요. 이렇게 기원이 불분명한 비공식적인 인사법을 미국의 대통령 후보가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기분 좋은 문화 충격이었던 셈이지요.
늙고 상투적인 백인 정치인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이 친근한 비언어적 표현은 이후 오바마가 주장하는 ‘희망과 변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대통령에 선출된 후, 오바마는 주먹 인사를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만들었습니다. 백악관의 청소부, 바비큐 레스토랑의 직원, 혹은 길거리의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나누는 오바마의 주먹 인사에 지지자들은 열광했습니다. 아주 매력적으로 보였고, 그의 피부색에 대한 미국 사회의 오래된 편견을 상쇄하고도 남았습니다.

권력과 터치: 어깨 두드리기
사회적 지위와 터치의 상관관계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례는 ‘어깨 두드리기’입니다. 어깨나 등을 두드리거나 악수하며 팔을 슬쩍 건드리는 것은 친밀감이나 신뢰의 표현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런 긍정적인 의미는 윗사람이 할 때만 해당됩니다. 아랫사람이 하면 무례해 보입니다. 위계와 태도의 관계가 분명한 동양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동양에서 나이 어린 사람이 윗사람 어깨를 두드리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중국을 공식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공식 환영식에서 문 대통령은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을 비롯한 사람들과 악수를 나눴습니다. 왕이(王毅) 외교부장을 마주한 문 대통령은 그의 팔을 두드리며 친근함을 표시했습니다. 그때 왕이 부장도 문 대통령의 팔을 두드리며 반가운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행동에 한국 네티즌은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장관급 왕이 외교부장이 한국 국가수반에게 아주 무례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지요. 서구에서는 이런 행동을 사회적 지위와 연결해 설명하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물론 윗사람이 할 때 더 자연스러운 행동이기는 하지만, 친근함의 의미가 더 큽니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터치와 권력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동양에서는 종종 논란이 됩니다.
‘어깨 두드리기’와 ‘박수’의 기원은 같습니다
클래식 음악회를 갈 때마다 조금 낯설게 느끼는 점이 있습니다. 이른바 ‘커튼콜(Curtain Call)’입니다. 17~18세기 유럽 극장은 커튼으로 무대를 열고 닫았습니다. 공연이 끝난 후, 연주자는 관객 요청에 따라 커튼이 내려진 무대 앞으로 나와 인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커튼콜’입니다. 연주자가 인사를 하면 관객은 박수로 그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연주의 감동이 클수록, 관객은 박수로 계속해서 연주자를 무대 앞쪽으로 불러냈습니다. 커튼콜이 길고, 반복될수록 연주회는 성공적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앙코르(encore) 연주가 이어지기도 합니다.
나는 매번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우리는 박수로 감동이나 격려, 찬사를 표현하는 걸까요? 흥미롭게도 박수는 거의 모든 문화에서 유사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참고로 아프리카 특정 부족은 박수를 조롱이나 경멸의 표현으로 사용합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엄숙한 자리에서 박수를 피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와 관련해 아주 흥미로운 주장이 담긴 책이 있습니다. ‘털 없는 원숭이’라는 책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Desmond Morris·1928년~)는 ‘인간의 친밀행동’에서 ‘어깨 두드리기’와 ‘박수’ 같은 친밀행동은 유아기 엄마의 포옹에서 기원한다는 주장을 합니다.
아기를 안고 있을 때, 엄마는 아기의 등을 쉬지 않고 가볍게 토닥입니다. 이 행동은 ‘안심해, 지금 모든 것이 잘되고 있어’라는 의미라고 모리스는 주장합니다. 이 동작은 아기를 안고 있지 않을 때도 지속됩니다. 엄마의 손이 닿는 범위에 아기가 있으면, 엄마는 아기를 어떻게든 두드려주려고 합니다. 두드리는 범위도 다양해집니다. 등뿐만 아니라, 어깨, 팔, 머리, 뒤통수, 엉덩이, 무릎 등 다양한 신체 부위를 두드립니다. 꼭 엄마만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아기 몸을 건드리는 행동은 아기에 대한 친근함과 애정을 표현하고 싶은 거의 모든 성인이 취하는 방식입니다.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면 타인이 터치할 수 있는 신체의 부위는 축소됩니다. 머리를 비롯한 특정 신체 부위를 건드리는 것은 극히 무례한 행동이 됩니다. 때에 따라서는 성희롱이 되기도 합니다. 등이나 팔 등이 자연스러운 터치가 가능한 신체 부위로 제한됩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축하하거나 위로할 때, 포옹을 동반한 등 두드리기가 행해집니다.
‘어깨 두드리기’처럼 ‘박수’ 또한 엄마와의 포옹에서 기원한다는 것이 모리스의 주장입니다. 생후, 일정 시기가 지나면 아기도 엄마를 포옹하려고 팔을 벌립니다. 아직 껴안는 행동을 할 정도로 성숙하지 않은 아기는 팔을 벌렸다가, 엄마가 미처 다가오기도 전에 두 팔을 탁하고 마주치기도 합니다. 이러한 행동을 엄마는 몹시 흥미롭게 바라보다 박수치며 흉내 냅니다. 둘의 행동은 마치 서로 박수를 치며 즐겁게 다가서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 이 행동이 박수의 기원이라는 주장입니다. 아주 그럴듯합니다.

‘건방진 박수’ 때문에 숙청된 장성택
박수를 쳐보면 두 손에 같은 힘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한쪽 손은 가만히 있고, 다른 손으로 두드립니다. 어깨 두드리기를 박수의 기원으로 본다면, 한쪽 손은 ‘타인의 등’ 역할을 하고, 나머지 손은 등을 두드리는 동작으로 해석할 수 있지요. 이때, 박수는 포옹하며 어깨를 두드리는 것처럼 애정이나 격려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어깨나 등을 두드릴 수 없을 때, 박수는 어깨 두드리기의 대안적 행위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공연이 끝난 후, 연주자가 인사하는 방식을 보면 포옹과 박수의 관계가 보다 명확해집니다. 어린 연주자나 아마추어 연주자와 달리 연주 경험이 많은 노련한 연주자는 관객의 박수를 받을 때, 두 팔을 벌려 한참 동안 관객을 바라봅니다. 박수 소리는 더 커집니다. 연주에 쏟은 수고에 합당한 보상(박수)을 받았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연주자는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합니다. 아주 천천히. 이때 팔을 벌리는 연주자의 행동은 엄마가 안아주기를 기다리는 아기의 행동과 발생학적으로 동일합니다. 간절하게 사랑을 표현해달라는 행동이지요.
그러나 박수라고 다 같은 박수가 아닙니다. 한 손이 어깨나 등처럼 기능하고, 다른 한 손이 두드리는 형태의 박수는 때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윗사람만 아랫사람의 어깨를 두드릴 수 있는 동양 문화에서 이 같은 박수는 극히 불손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예의를 갖춘 박수는 양손에 동일한 힘을 주고 정면을 향해 두드려야 합니다. 한쪽 손등이 바닥을 향할수록 등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렇게 치는 박수는 마치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격려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특히 북한의 김정은과 같은 독재자를 향한 박수를 그렇게 치면 생명이 위험해집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김정은 고모부인 장성택의 박수치는 모습이 한국 언론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이른바 장성택의 ‘건성 박수’지요. 김정은에게 권력이 이양된 후, 거의 모든 행사에서 목격된 장성택의 박수치는 모습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었습니다. 주위 모든 사람의 두 손이 정면을 향해 같은 각도를 취하고 동일한 힘을 주며 박수를 칠 때, 장성택만 ‘한쪽 손등이 바닥을 향하고 그 손바닥을 다른 손으로 천천히 두드리는 박수’를 쳤습니다. 그런 박수는 북한에서 김정일과 김정은만 가능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만 그런 박수를 칠 수 있다는 얘기죠. 장성택의 ‘건성 박수’는 수시로 목격되었고, 삐딱하게 뒤로 기댄 자세까지 취하곤 했습니다. 독재자가 아랫사람 어깨를 두드리는 것과 같은 행동을 취한 ‘건성 박수’의 결말은 우리가 아는 대로입니다.
포옹할 줄 몰랐던 대통령
장성택의 ‘건성 박수’와 비슷한 맥락으로 한국 정치를 살펴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정치 현상을 해석할 수 있는 몇 가지 심리학적 단서가 보입니다. 대통령의 ‘스킨십(skinship)’입니다. 오바마의 ‘주먹 인사’나 다선 의원의 ‘악수’처럼, 인기 있는 대중 정치인은 자기만의 스킨십이 있어야 유리합니다. 여기서 잠깐 설명하자면, ‘피부(skin)’에 접미사 ‘-ship’을 결합해 만든 ‘스킨십’은 ‘콩글리시’의 대명사로 여겼습니다. 실제로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일본 교육학자인 히라이 노부요시(平井信義·1919~2006년)가 1953년 세계보건기구(WHO)에 참석했다가, 한 미국 여성이 사용한 단어를 듣고 일본에 도입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2021년부터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정식으로 등재되어 공식적인 영어 어휘가 되었습니다. 심리학자 눈으로 보자면, ‘스킨십’은 접촉을 통한 의사소통을 설명할 때 아주 괜찮은 단어입니다.
스킨십에 가장 문제가 있었던 대통령은 박근혜입니다. 2012년 대통령 선거철, 악수 많이 했다고 손에 붕대를 감고 나타날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당시 그녀는 시민들이 악수하려고 달려들면 등 뒤로 손을 숨기기까지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영애(令愛)’라고 불렸던 그녀가 주변 사람들과의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익히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서적 효과가 지대한 스킨십의 부재는 그녀에게 치명적이었습니다. 특히 세월호 사태 당시 유족들에게 보인 그녀의 절제된 태도는 이후 탄핵 과정에서 그대로 되돌려받게 됩니다.
세월호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스킨십 역량이 드러났습니다. 공식 행사에만 굳은 표정으로 나타났습니다. 대통령의 근엄함은 유지되는 듯 보였지만, 대중은 그녀의 모습에서 자녀를 잃은 부모의 슬픔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단서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당시 대중이 목격한 박근혜의 위로의 스킨십은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습니다. 정부의 합동분향소에서 헌화하고 돌아서며 옆에 서 있는 할머니 손을 잡고 몇 마디 말을 건넨 뒤 아주 어색한 포옹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도 지극히 냉정한 표정이었습니다. 더 황당한 사실은 그 할머니가 유족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일반 조문객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당시 이 장면은 청와대 측 연출이라는 논란까지 일었습니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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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00호 (2025.03.06~2025.03.18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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