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7일 서울 중구 명동 주한중국대사관 앞에서 열린 ‘멸공 페스티벌’ 집회. [연합뉴스]](https://pimg.mk.co.kr/news/cms/202503/02/news-p.v1.20250302.0fad4b07218f4f3eb9e54a3a0b02ed66_P1.png)
트럼프와 젤렌스키가 지난 28일(현지 시각) 백악관에서 험하게 싸우는 걸 보고 이승만을 떠올린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위대한 이승만은 ‘미국이 빠지면 남한 단독으로 북진 통일하겠다’며 한국전쟁을 서둘러 봉합하려는 아이젠하워에 맞섰다. 사실은 공갈이었다. 어쨌든 이승만의 벼랑 끝 전술은 통했고 한국은 동아줄 같은 한미동맹을 얻어낸 결과 70년 넘게 번영하고 있다.
젤렌스키는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모델로 한국을 따르고 싶어한다. 한국이 한미동맹을 얻은 것처럼 우크라이나는 나토 회원국이 되든가 미군이 주둔하길 바란다. 그는 6.25 전쟁사와 이승만의 일대기를 공부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 한다. 이승만의 오기가 통했던 것은 그 시대가 냉전의 개막기였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의 미국은 자유진영의 대장으로서 위신이 중요했다. 트럼프는 그 따위 위신은 개에게나 주라고 한다. 이승만이 살아 돌아와도 트럼프를 상대로 동맹을 얻어내기는 불가능하다.
그 한미동맹이라는 것도 더 이상 도깨비방망이는 아니다. 이전에는 미국의 친구가 되면 군사 보호와 경제적 지원이 후하게 주어졌다. 미국은 중국을 포위하기 위해 여전히 친구를 필요로 하지만 살갑게 대하지는 않는다. ‘중국이 지배하는 세상이 싫으면 돈을 더 내라’고 윽박지른다. 이런 협박이 언제까지 통할지는 알 수 없다. 미국이 더 이상 자애롭지 않다면 미국 편에 서는 매력도 반감된다. 다만 지금은 중국보다 미국이 확실히 우위에 있고 당분간 바뀔 것 같지 않으니 일단 미국 줄에 서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영원히 대장일까? 누가 알겠나.
지금 한국 사회에는 반중·혐중 열풍이 매우 강력하다. 부정선거 음모론과 혐중이 결합하면서 상호증폭 현상이 일어나는 중이다. 역시 한국은 진폭이 큰 나라라는 것을 실감한다. 지난 정권 때는 중국에 간 대통령이 혼밥 대우를 받고도 ‘중국은 큰 봉우리’ 어쩌고 하면서 낯을 뜨겁게 하더니 지금은 피해망상에 가까운 증상을 보인다. 전 헌법재판소 대변인의 얼굴형을 두고 ‘광대뼈가 없는 것이 전형적인 중국 여성의 골상’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나치의 유대인 솎아내기 분위기가 느껴져 흠칫했다.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중국의 선거개입설이 공공연히 거론되고, 중국대사관 앞에서 ‘멸공 페스티벌’이 열리고, ‘캡틴 아메리카’ 복장을 한 인물이 대사관 난입을 시도한다. 어떨 때는 비굴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표변해 무례하게 구는 나라. 감정의 진폭이 매우 큰 나라. 중국은 우리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나.
“중국은 경제와 안보,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 안정을 위해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나라다. 한미동맹을 아무리 중시하더라도 그 다음으로 중요한 나라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28일 페이스북에 쓴 글이다. 문은 비굴과 무례 중 비굴로 우리를 부끄럽게 했지만 이번에는 말을 바로 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나라는 미국이고 중국은 그 다음으로 중요하다. 미국은 태평양을 격하고 있지만 중국은 걸어서도 넘어올 수 있다. 그 나라를 상대로 조롱하고 터무니없는 혐의를 씌우는 것은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중국을 부당하게 의심하고 혐오한 대가를 치를 날이 반드시 온다.
외환위기 때 한국 정부가 일본에 도움의 손길을 구했으나 냉정히 거절당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 배경으로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던 YS의 외교적 무례를 거론하는 사람이 많다. 국내용으로, 분풀이 삼아, 별 뜻 없이 한 말이지만 상대는 차곡차곡 쌓는다. 우리는 일본을 상대로도 진폭이 컸다. 대통령이 독도에 가고, 죽창가에 가까운 3.1절 기념사를 하는가 싶더니 바뀐 대통령은 생맥주 건배를 청하며 ‘다 잊자’고 한다. 과잉 친절을 베푼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면 180도 달라지니 상대는 속으로 ‘얼마나 갈까’ 한다.
비굴과 무례의 교차는 자존심 없는 인격의 특성이다. 한국이란 나라의 성정에선 중간의 평정을 찾아보기 어렵다. 외교를 하기 어려운 성격이다. ‘셰셰’하고 ‘아리가또’ 하다가 수가 틀어진다 싶으면 바로 침 뱉는다. 이재명의 ‘셰셰’ 발언이 불안하게 들리는 이유도 민족성만큼이나 그 개인의 성정도 진폭이 커 보여서다.
인간은 상냥한 상황에서만 살 수 없고 험악한 상황에서 절도 있고 우아하게 처신해야 인격자 소리를 듣는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중국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모욕할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