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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칼럼

국가의 모든 힘은 결국 ‘경제력’에서 나온다 [한순구의 ‘게임이론으로 보는 경영’]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입력 : 
2025-01-23 2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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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티무르 제국 흥망史
티무르는 중앙아시아에서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지만, 패권을 뺏기고 말았다. 포르투갈이 인도와 직접 연결하는 항로를 발견하면서, 경제력을 상실한 영향이 컸다. 사진은 티무르의 동상. (매경DB)
티무르는 중앙아시아에서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지만, 패권을 뺏기고 말았다. 포르투갈이 인도와 직접 연결하는 항로를 발견하면서, 경제력을 상실한 영향이 컸다. 사진은 티무르의 동상. (매경DB)

지금부터 2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우즈베키스탄에 출장을 갔다 실크로드의 역사적인 도시 사마르칸트(Samarkand)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리고 당시까지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인물들의 이름을 알게 됐는데 바로 티무르(Timur) 제국을 건설한 티무르왕과 그 티무르의 후손 바부르(Babur) 같은 중앙아시아의 위대한 왕들이었다.

한반도에서 조선이 건국될 무렵에 활약한 티무르왕은 군사적 능력이 출중했다. 중앙아시아 지역의 드넓은 영토를 점령하고 제국을 만들었다. 티무르 제국 영토는 지금의 국가들로 생각해보면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이란, 이라크, 튀르키예,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투르크메니스탄, 파키스탄을 모두 합한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실로 광대하기 그지없다.

티무르는 몽골인이었다고 한다. 칭기즈칸 친척 중 한 명의 피를 이어받았고, 칭기즈칸이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할 때 아마도 중앙아시아 지역의 한 부대를 책임진 인물이었던 듯하다.

티무르는 몽골이 세운 원나라가 주원장의 명나라에 패배해 중국 본토를 상실하고 몽골 제국 전체 위계질서가 흔들리던 시기에 사마르칸트 부근에서 태어났다. 군사적 능력이 뛰어났던 티무르는 원나라 붕괴로 사분오열된 중앙아시아 지역을 다시 통합했다. 티무르는 몽골인이었지만 이슬람교를 받아들여 이슬람 신자가 되었고 그 덕분에 사마르칸트같은 찬란한 이슬람 문화 중심지를 건설해 제국의 수도로 만들었다.

심지어 자신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국 명나라를 침공해 다시 몽골 땅으로 만들겠다며 군대를 동원해 명나라로 쳐들어가던 중 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티무르 제국은 아들들이 서로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서 싸움을 벌이다 결국 여러 개의 작은 왕국으로 쪼개진다. 그 작은 왕국 중 하나가 바로 지금 아프가니스탄의 수도인 카불에 자리 잡았다. 통치자는 티무르의 자손 바부르였다. 바부르는 다른 친인척과 우즈베키스탄 지역을 놓고 벌인 쟁투에서 밀려난 처지였다. 그래서 남쪽으로 도망쳐 내려와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이렇게 밀려난 바부르는 남쪽 인도 대륙으로 눈을 돌린다. 카불을 근거지로 인도를 침공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군사력이 약해 밀렸던 바부르가 인도 공략에 성공해 결국 바부르의 손자인 악바르 대제(Akbar the Great)가 인도 전역을 차지한다. 인도 무굴 제국의 탄생이다.

이처럼 상당 기간 중앙아시아 지역에는 세계적인 강대국이 자리했다. 1200년경 몽골 칭기즈칸이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한 것뿐 아니라 그 몽골 제국이 세운 원나라가 중국에서 세력을 잃은 후 세워진 티무르 제국이 다시 중앙아시아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이후 티무르의 자손들이 심지어는 인도 대륙 전체를 차지하고 무굴 제국을 건설했을 정도로 중앙아시아에서 유목민의 힘은 강력했다.

몽골 이전에도 흉노족이 큰 세력을 떨쳐서 이를 두려워한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건설할 정도였고, 한나라를 세운 유방도 흉노족에게 포위돼 죽을 뻔한 위기를 간신히 넘긴 적이 있다. 이후에는 거란이 세운 요나라가 당시 중국 송나라를 위협하면서 조공을 받았던 기록이 있다.

유럽 역사에서도 중앙아시아 훈족이 4세기에서 5세기경 서쪽으로 이주하면서 시작한 게르만 민족 대이동으로 로마 제국이 붕괴할 정도였고, 훈족 아틸라왕이 결국 유럽의 한가운데에 헝가리라는 나라를 세웠다.

분명 15세기에 티무르의 후손 바부르가 인도에 무굴 제국을 세울 당시만 해도 중앙아시아인의 군사력은 세계를 공포에 떨게 만들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1500년 이후로는 중앙아시아 지역에 강대국이 존재한 적이 없다. 지금도 세계적으로 군사와 경제를 이끄는 위치의 나라를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러시아와 중국 힘에 눌려 두 강대국 눈치를 보는 상황이다. 한때 러시아와 중국과 인도를 모두 쥐락펴락하던 중앙아시아의 힘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강성했을 때 유럽에서도 강력한 국가로 부상한 나라가 있었으니 베네치아다. 베네치아는 영토는 크지 않지만 이탈리아 반도 동쪽에 자리하면서 지중해 동쪽 바다를 장악한 해운 강국이었다. 몽골이 아시아를 통치했던 때 먼 길을 왕복해서 중국 원나라를 방문하고 돌아가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 또한 베네치아 사람이었다. 그 베네치아 또한 유럽의 최강대국으로 활약했으나 15세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힘이 약해졌다.

어째서 중앙아시아와 베네치아의 힘이 갑자기 약해진 것일까? 경제학자로서 답을 한다면 포르투갈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의 인도 항로 개척 때문이다. 1498년 포르투갈인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 남서부 캘리컷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유럽에서 바다를 통해 바로 인도로 갈 수 있는 항로가 개척된 순간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포르투갈이 인도 항로를 개척한 1500년경 무렵부터 중앙아시아 유목민 세력이 갑자기 약화되는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지중해 무역을 주도하던 베네치아의 힘도 동시에 약해졌다.

인도 항로 개척이 중앙아시아와 베네치아에 주었을 경제적 타격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중앙아시아는 실크로드라고 불리는 동서 교역로에 위치해 중국의 비단이나 도자기 같은 상품,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각종 향신료를 유럽으로 운반해 판매하고자 하는 상인들이 지나갈 수밖에 없는 요충지였다. 그래서 지중해 동쪽에 도착한 동양 특산물들은 다시 지중해를 지배하는 베네치아인들에 의해 유럽 각지로 팔려 나갔다. 비단이나 도자기는 중국에서 생산되었고 향신료는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됐으며 그 상품을 사용한 것은 유럽인이었지만 돈을 번 사람들은 생산을 한 것도 아니고 소비를 한 것도 아닌 중앙아시아와 베네치아 사람이었다. 동서양 특산물이 안전하게 운반되기 위해서는 중간에 위치한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베네치아의 안전 보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유럽에서도 동양과 가장 거리가 먼, 서쪽 끝에 위치한 포르투갈은 귀한 동양의 특산품을 이탈리아나 독일 같은 유럽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더 많을 돈을 주어야 구입할 수 있었다. 원산지 동남아시아에서의 향신료 가격에 비해 유럽에서 판매될 때의 가격은 최소한 100배였고 상황에 따라서는 수백 배에 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동양 특산물을 원했던 유럽의 나라들, 그중에서도 가장 서쪽에 위치해 다른 유럽 국가보다 더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했던 포르투갈 사람들은 중앙아시아와 베네치아 상인에게 말도 안 되는 중간 이익을 뜯기지 않고 동양 특산물을 바다를 통해 직접 사오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간절한 마음으로 포르투갈은 8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국력을 기울여 인도 항로를 개척했다. 이렇게 포르투갈이 동양의 향신료와 특산품을 직접 바다를 통해서 들여오기 시작하자 중간 이익을 취하며 번성했던 실크로드의 중앙아시아와 베네치아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됐다. 국가의 모든 힘은 결국 경제력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경제력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져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부국강병을 꿈꾸는 국가 지도자라면 반드시 상업을 발전시켜 경제력을 키우는 것이 필수조건이다. 어떻게 하면 전 세계 상인들이 자신의 국가로 몰려들게 할 수 있을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면서 지속적으로 노력해야만 이룰 수 있는 것이 부국강병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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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구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94호 (2025.01.22~2025.02.0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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