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이 선포된 지난 3일은 우리가 국제통화기금(IMF)과 구제금융 합의서를 체결한지 27년 된 날이었다. 1997년 12월 3일 이후 ‘IMF 체제’로 요약되는 강도 높은 긴축과 구조조정 칼날에 많은 국민은 고초를 겪었다. 당시 IMF와 협상했던 한 고위 관료는 나라가 망할까봐 두려움에 떨며 밤새 일했다고 했다. 지금도 많은 국민이 ‘이러다 나라가 어떻게 되는건가’ 하는 불안감을 갖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박찬대 원내대표 등 의원들이 27일 국회 본청 계단에서 한덕수 국무총리 탄핵안을 가결한 뒤 윤석열 규탄대회를 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https://pimg.mk.co.kr/news/cms/202412/31/rcv.YNA.20241227.PYH2024122714780001301_P1.jpg)
하지만 그때의 정치 풍토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IMF는 그달 18일 대선에서 정권 교체 가능성을 감안해 출마 후보들에게 협정 준수 서약을 요구했다. 당시 야당은 IMF로 가면 경제주권을 빼앗기고 대량 실업 등 혼란이 커진다며 반대했다. 대선 직전 IMF행은 대정부 공세 수위를 높일 호재였지만 김대중, 이인제 등 야당 후보들은 모두 서명했다. 지금 같으면 대선 승리의 유불리를 따지며 정쟁 불씨로 삼으려 할지 모를 일이다.
이후 정치권은 IMF발 고난 극복에 초당적 협력을 했고, 국민도 ‘금 모으기’로 하나가 됐다. 훗날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본인 책에서 정치인들이 정부의 IMF와의 협상 노력을 외면한 채 비난과 책임 추궁만 일삼았다며 섭섭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중요한 점은 여야가 자기 주장을 하면서도 필요한 때는 힘을 모았다는 것이다.
반면 작금의 상황은 여야가 정권 잡기에만 매몰돼 국가 명운을 위한 협의는 실종됐다. 얻는 게 있으면 일부 잃을 것도 감수하는 게 세상 이치이건만 다들 ‘내가 다 갖겠다’는 유아적 욕심이 가득하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지난 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우원식 국회의장이 ‘국무총리(한덕수) 탄핵소추안’의 의결정족수를 재적 과반(151석) 이상으로 정하고 투표 개시를 선언하자 의장석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다. [김호영 기자]](https://pimg.mk.co.kr/news/cms/202412/31/news-p.v1.20241230.edb5675dfe2f401bb25d8daa4a3d0da4_P1.jpg)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불가능한 ‘여야 간 합의’를 내세워 헌법재판관 임명을 미룬 채 후임 대행들까지 연쇄 탄핵의 지옥문을 연 것은 보는 이에 따라 아쉬운 점도 있다. 하지만 야당이 29차례 탄핵소추 발의로 국정 마비는 물론 해외의 우려와 비웃음, 국격 하락을 초래한 것은 더 심각하다. 국난 앞에서 여야 간 대타협 같은 것을 통해 정치가 질서를 잡아줘야 하는데 정작 필요할 때 본업도 제대로 못하니 혀를 차게 만든다.
하기야 기업들이 밖에 나가 극한 경쟁속에 성과를 내는 와중에 국회는 안에서 아웅다웅하며 노란봉투법, 국회증언법 같은 걸로 옥죄려 했던 것만 봐도 싹이 노랬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 회장이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고 했지만 30여 년이 흐른 지금, 정치는 4류로 보기에도 아깝다. 이런 정치에 한국 경제가 버티고 있는 게 기적이다.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교수는 2021년 출간한 책에서 이듬해 대선 승자의 성공 확률을 제로(0)라고 봤다. 그는 “탄핵·감옥 등 지난 날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을까 두렵다”며 현 상황을 예측했다. 대통령 개인 자질 때문이 아니라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시스템 차원의 문제라고 진단했다. 이번 계엄 사태로 많은 이들이 1987년 직선제 개헌 대통령제를 폐기하고 통치 체제 변화를 제기하는 것과 동일하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27일 오후 국회에서 한덕수 국무총리 탄핵소추안 의결정족수에 대한 항의를 하며 본회의장을 나와 규탄대회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https://pimg.mk.co.kr/news/cms/202412/31/rcv.YNA.20241227.PYH2024122713910001301_P1.jpg)
하지만 상생과 협치는 말뿐이고 정글화된 한국 정치가 통치구조만 바꾸면 정도를 찾을지 개인적으론 의문이다. 폭주를 해서라도 국정 방해, 권력 획득의 기회를 경험한 야당은 바뀐 시스템에서도 상대방 허점을 찾아 물어뜯으려 할 것이다. 의원내각제만 해도 다수당 수장이 총리를 맡아 정국 안정을 기한다는 취지지만 국민 의사 반영을 놓고 정부와 의회 간 이견이 커지면 의회해산권과 내각불신임권 남용으로 혼란이 확대된다. ‘상호 자제’, ‘합의정신 복원’ 같은 입바른 소리는 아직 우리 정치에서는 사치다.
그럴 바엔 국민소환제처럼 정치인에 대한 국민 통제가 낫다. 면책특권에 숨어 황당한 일만 벌이는 의원들을 그때그때 솎아내는 장치가 있어야 국민 무서워 맘대로 못한다. 현재 국회 청원사이트에는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을 상대로 위헌정당해산심판을 청구해달라는 청원안이 올라와있는데 국민이 느끼는 정치 불신의 자화상이다.
내년에 대통령이 어떻게 되느냐 만큼이나 이번 국난을 계기로 정치권 퇴행을 끊어낼 방도를 찾는 게 절실하다.

김병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