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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위스키’ 맛이나 보자던 사람들 홀렸다 [His Story]

명순영 기자
입력 : 
2025-01-21 2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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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최초 싱글몰트 위스키’ 도정한 기원위스키증류소 대표

“왜 한국엔 없냐”는 한마디에 도전
경력 40년 스코틀랜드 장인 의기투합
최적의 위치 찾으려 1년 넘게 전국행
韓 최초 싱글몰트 호평…9개국 수출

K반도체, K조선, K컬처, K푸드, K팝, K엔터….

한국 경제가 발전하며 어느 영역에 ‘K’를 붙여도 낯설지 않게 됐다. 그런데 ‘K위스키’라면 어떨까.

“아직 거기까지는…”이라며 어색하게 느끼는 독자가 많을 듯싶다. 그도 그럴 것이 ‘스카치(Scotch)’로 불리는 500년 역사 스코틀랜드 위스키는 ‘넘사벽’이다. 폭을 넓혀도 미국, 캐나다, 아일랜드, 일본 등 위스키 강국의 위상은 공고하다.

철옹성 같아 보이는 위스키 시장에서 ‘한국산’을 알리겠다고 도전에 나선 이가 있다. 도정한 기원위스키(옛 쓰리소사이어티스)증류소 대표(51)다. 그는 2023년 한국 최초의 싱글몰트 위스키인 ‘기원(KI ONE)’을 내놓고 국내는 물론 글로벌 시장을 노크하고 있다. 싱글몰트는 보리와 물, 효모만으로 증류소 한 곳에서 만든 위스키 원액이다. ‘기원’은 주요 위스키 박람회에서 호평을 받았고, 영국 일본 등 9개국에 수출문을 열었다.

도정한 기원위스키증류소 대표. (윤관식 기자)
도정한 기원위스키증류소 대표. (윤관식 기자)

기자·PD·마케터로 살다가…

수제맥주 창업 뒤 K위스키 도전

K위스키 개척에 나선 도 대표는 애초 위스키와는 큰 관련 없는 삶을 살았다.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UCLA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1997년 한국으로 돌아와 아리랑방송에서 기자와 앵커로 일했다. 이후 글로벌 홍보사인 에델만과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경력을 쌓았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선 최연소 임원 타이틀도 얻었다. 기업에서 승승장구했던 그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2013년 수제맥주 양조장 ‘핸드앤몰트’를 만들었고 깻잎, 오미자, 김치 유산균 등 국산 농산품을 활용한 맥주로 한국 수제 열풍에 일조했다. 2018년 오비맥주 모기업이자 세계 최대 맥주 회사인 AB인베브에 양조장을 매각한 이후 새롭게 시작한 아이템이 위스키다.

“외국인들이 저에게 ‘한국은 왜 위스키가 없어?’라고 자주 물어봤어요. 한국이 발전하면 위스키 시장 또한 커질 텐데 한국산이 없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싶었죠. 특히 한국인은 젊은 층을 중심으로 위스키를 즐기기 때문에 큰 시장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냥 제가 만들자고 마음먹었어요.”

이때 의기투합한 인물이 40년 경력의 ‘마스터 디스틸러(증류 담당자)’인 앤드루 샌드다. 수제맥주 양조장을 운영할 때 인연을 맺어온 그는 1980년부터 스코틀랜드 글렌리벳증류소, 일본의 닛카증류소 등에서 경력을 쌓은 위스키 제조 전문가다. 도 대표는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샌드 씨에게 선물하며 한국에서 지내보라고 설득했다. 그는 한국에서 1년을 보내며 사계절의 다채로움에 반해 함께 일하기로 했다. 둘은 한국에서 위스키 양조장을 세울 최적의 입지를 찾아 전국을 헤맸다. 2년 가까이 백 곳 넘는 장소를 다닌 끝에 정착한 지역이 경기도 남양주다. 그는 위스키 숙성에 적합한 백봉산 중턱 북향 산자락 땅을 매입해 증류소를 지었다.

도정한 기원위스키증류소 대표
도정한 기원위스키증류소 대표

“한국은 사계절이 뚜렷하고 일교차가 크지요. 위스키를 제조하기에 천혜의 환경입니다. 위스키 원액은 배럴(나무 통) 안에서 숙성되는데 여름과 겨울 큰 온도 차이는 배럴 팽창과 수축에 도움이 됩니다. 여름에 배럴이 팽창하며 위스키 원액을 빨아들였다가 겨울에 뱉어내는데 위스키 숙성을 빠르게 하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남양주는 겨울에는 영하 20도까지 내려갈 정도로 춥고, 여름에는 30도를 웃돌 만큼 덥죠. 게다가 깨끗한 지하수가 넘쳐 최적의 장소였어요.”

그는 “기후가 상대적으로 일정한 스코틀랜드나 대만 등에 있는 증류소에서 4년은 숙성해야 하는 맛을 한국에서는 1년이면 구현할 수 있다”고 밝혔다.

위스키는 보통 6단계 과정을 거쳐 생산된다. ‘몰팅(보리 싹을 틔워 맥아로 변환)-매싱(맥아가루(그리스트)에서 당분 추출)-발효(효모 첨가)-증류(순수한 알코올 추출)-숙성(오크통에 보관)-병입(물로 알코올 도수 조절)’이다. 도 대표는 “전 과정에서 최고의 원료를 사용하고 품질을 관리한다”면서도 “발효 과정에서 한국의 맛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보통 60시간 발효하는데 우리는 120시간을 투여합니다. 시간을 많이 쏟는 만큼 비용이 들죠. 하지만 오랜 시간 발효하면 독특한 풍미가 생겨납니다. 한국산 싱글몰트 위스키의 ‘킥’이 나오는 거죠. 일본 위스키가 미소된장국처럼 슴슴하고 은은하다면, 한국 위스키는 된장찌개 같다고나 할까요.”

증류기도 세계 최고 제품을 들여왔다. 남양주 증류소 안의 커다란 구릿빛 증류기 2대는 스코틀랜드 포시스(Forsyths) 제품으로, 위스키 업계에서는 ‘롤스로이스’로 비유된다.

일단 기원 위스키 증류소 안의 커다란 구릿빛 증류기 2대는 스코틀랜드 포시스(Forsyths) 제품으로, 위스키 업계에서는 ‘롤스로이스’로 비유된다.
일단 기원 위스키 증류소 안의 커다란 구릿빛 증류기 2대는 스코틀랜드 포시스(Forsyths) 제품으로, 위스키 업계에서는 ‘롤스로이스’로 비유된다.

韓 특유의 독특한 풍미 담아

과일·오크·피트 향 3종 선보여

도 대표는 2020년부터 3년간 숙성을 거쳐 지난해 2월 ‘배치’를 출시했다. 이제 막 선보인 첫 한국산 싱글몰트 위스키지만 그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될 것 같다. 이미 ‘기원’은 런던 위스키쇼(9월)와 싱가포르 위스키 라이브(11월) 등 주요 박람회에서 ‘핫템’으로 떠올랐다.

“처음에는 ‘코리안 위스키’ 맛이나 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사람들이 왔던 것 같아요. 그러다 ‘기원만의 독특한 풍미가 있다’고 입소문 나며 점점 찾는 이가 늘었죠. 런던 위스키쇼에서는 문을 열자마자 문을 닫을 때까지 줄이 끊이지 않아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수출길도 쉽게 열렸고요.”

지난해 8월 영국에서 가장 큰 위스키 유통망인 ‘더위스키익스체인지’에 공급됐다. 첫 달부터 인기를 모았고 9월에는 2번째로 잘 팔린 제품에 이름을 올렸다. 몇 달 팔지도 않았는데, 판매 순위 ‘톱10’에 들어갔다. 국내 위스키로는 사실상 처음으로 위스키 5대 강국인 일본에도 진출했다. 일본 대형 식품사 이토추가 일본에서의 한국 문화 열풍을 감안해 기원을 수입하기로 했다. 이토추는 최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대만 위스키 ‘카발란’ 대신 ‘기원’을 선택했다. 도 대표는 “아직 규모는 작지만 점점 늘어날 것으로 기대한다”며 “현재 9개국에 기원을 수출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한국에서도 유통망을 넓히고 있다. 신세계 주류 유통 채널에 이어 편의점 CU와 GS25에도 공급하는 중이다.

도 대표는 올해 기원을 ‘호랑이’ ‘독수리’ ‘유니콘’ 등 3개 버전으로 리브랜딩하고 디자인도 새롭게 바꿨다.

“호랑이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스페인 셰리 오크통에서 숙성했어요. 달콤한 과일의 풍부한 맛이 특징이죠. 독수리는 미국 버번 위스키 오크통과 버진 오크통에서 숙성해 달콤하면서 오크의 강렬한 풍미까지 갖고 있죠.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데, 특히 버번 오크통 숙성 위스키를 즐겨온 이에게는 색다른 느낌일 겁니다. 유니콘은 ‘샌프란시스코국제주류품평회(SFWSC) 2024’에서 더블골드를 수상한 ‘기원 배치 4 스모크드’를 모티프로 만들었습니다. 부드러운 피트 향을 품었는데, 아일라(Islay) 위스키를 좋아하거나 스모키한 위스키에 도전해보고 싶은 이에게 권합니다.”

그는 “K위스키 시장이 커지기 위해선 ‘주세’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위스키 주류세는 사실상 100%가 넘는다. 판매가 10만원짜리 위스키 세금이 거의 5만원이라는 의미다.

“2019년 맥주 주세 제도가 바뀌며 ‘수제맥주 전성시대’가 열린 사례가 있습니다. 지금 한국산 위스키는 증류소가 몇 개 되지 않는 초기 단계입니다. 주세가 개편된다면 위스키 시장에 뛰어드는 이가 많아질 겁니다. 국내 시장을 키우고 해외에서도 K위스키 위상을 키울 수 있다고 봅니다.”

[명순영 기자 myoung.soonyoung@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94호 (2025.01.22~2025.02.0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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