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금융가는 퇴직연금 때문에 정신이 없다. 종전 은행에서 가입한 퇴직 관련 금융상품을 ‘갈아타기’할 수 있다는 소식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퇴직연금 실물 이전 제도다. 퇴직연금 계좌를 갖고 있는 투자자가 종전 포트폴리오를 그대로 다른 금융사로 옮길 수 있게 한 제도다. 이전에는 다른 금융사로 옮기려면 이미 가입된 상품을 해지해야 했다. 이럴 경우 해지 수수료가 발생하거나 매도 과정이 번거로울 수 있다. 그래서 정부 당국은 10월 15일부터 자유롭게 퇴직연금 상품을 은행, 증권, 보험사 상관없이 옮겨가게 할 수 있도록 정책을 완화했다.
시장 규모 어떻길래
2030년이면 445조원 껑충
퇴직연금 시장은 2016년만 해도 적립금 기준 147조원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지난해에는 382조원 규모로 훌쩍 커졌다. 2030년이면 445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최재원 키움증권 애널리스트는 “한국의 퇴직연금 적립금은 지난해 기준 382조원으로 연평균 성장률 15%를 기록하며 빠른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제도 개선, 다양한 자산 배분 상품 등장으로 국내 퇴직연금 시장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종전 퇴직연금 ‘큰형님’인 은행은 물론 증권, 보험사 간 ‘머니무브’ 전쟁이 일어난 모양새다.
누가 유리할까
다양한 상품 취급…증권사 분주
KB증권은 제도 시행 전부터 분주했다. 실물 이전 사전 예약 기간인 10월 14일까지 예약을 완료한 후 이벤트 기한 내 KB증권으로 실물 이전까지 한 모든 고객에게 ‘배달의민족 상품권 5000원권’을 지급했다. 내년 초까지 이 이벤트는 계속된다. KB증권으로 퇴직연금(IRP, DC) 순입금(이전)한 금액에 따라 ▲100만원 이상 900만원 미만은 ‘배달의민족 상품권 1만원권’ ▲900만원 이상 3000만원 미만은 ‘배달의민족 상품권 2만원권’ ▲3000만원 이상 시는 ‘배달의민족 상품권 3만원’을 제공한다. NH투자증권도 타사에서 자산을 100만원 이상 이전한 고객에 한해 이마트 상품권(3만원)을 전원 지급한다.
비슷한 시기 신한투자증권은 ‘프로가 수익률로 말하는 신한투자증권 프로(%) IRP’라는 제목의 개인형 퇴직연금(IRP) 광고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광고에서는 신한투자증권의 자산관리 전문가들이 제공하는 맞춤형 상담과 수익률 리밸런싱을 통해 퇴직연금 상품의 경쟁력을 강조했다. 회사 관계자는 “이번 광고는 연금리더와 투자상품솔루션부가 제공하는 1:1 맞춤형 컨설팅 서비스를 통해 고객의 연금 자산을 종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소개했다.
삼성증권은 비슷한 시기 ‘자산관리 실력’을 과시하는 자료를 잇따라 내놓고 ‘맞불’을 놓고 있다. 삼성증권 측은 퇴직연금 잔고가 2019년 말 5조5000억원 수준이었던 것이 올해 8월 말 기준 18조7000억원대로 증가했다고 강조한다. 연평균 30%가량 고속 성장한 꼴이다. 이는 증권업계 연금 잔고 5대 사업자 중 가장 높은 연금 잔액 증가율이다.

은행권은 시무룩 왜?
수익률 증권사에 밀려
반면 은행권은 표면적으로 조용해 보인다. 금융감독원 기준 은행이 2023년 기준 퇴직연금 적립액 51.8%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KB국민은행이 실물 이전 사전 예약을 신청한 고객 중 선착순 1만명에게 스타벅스 커피 쿠폰을 제공한다는 이벤트를 내놓은 정도다.
정리하자면 전반적으로 이번 제도는 증권업계가 좀 더 유리하게 보는 측면이 있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은행, 보험사 금융상품 대비 증권사는 보다 다양한 퇴직연금 상품 라인업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ETF를 예로 들면 은행 연금 계좌가 운영하는 ETF 상품은 100~170여개 정도. 그런데 증권사에서는 최대 700개까지 선택지가 넓어진다. 연금 계좌 내에서 실시간 매매도 가능하다. 그런데 은행 계좌에서는 같은 상품이라 하더라도 예약 매매와 같이 미리 주문하는 형식으로만 거래할 수 있어 불편하다는 투자자가 많다.
수익률 면에서도 증권사가 압도적이다. 최근 5년 평균 기준 퇴직연금 상품 수익률은 증권사가 2.9%로 1위, 생보사 2.3%, 은행 2.2% 순이다. 지난해만 놓고 봐도 증권사 수익률이 7.11%인 반면 은행은 4.87%에 그쳤다. 이러니 증권사는 ‘화색’, 은행은 속으로는 호떡집에 불난 눈치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은행권에서 실물 이전 제도 시행 일자를 내년 1월로 늦춰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최근 금융투자협회 관련 회의에서 은행권 인사들 연기 요청 목소리가 커서 실물 이전 논의가 한때 중단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관련 제도 시행이 임박한 상황에서 은행권 인사들 반대 목소리가 높아 금융감독당국, 협회 관계자가 당혹스러워했다”고 귀띔했다.
시간을 벌면 뭘 할 수 있을까. 한 은행권 관계자는 “뒤늦게 연금지원센터를 만드는 등 관련 조직을 늘리고 취급 ETF 숫자를 200개 이상 늘리기 위해 IT 작업을 강화하는 등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털어놨다. 업계 자료를 취합해보면 신한은행은 펀드를 358개에서 413개로, ETF를 131개에서 177개로, KB국민은행은 예금 상품을 현재 830개에서 890개로, ETF는 68개에서 101개로 대폭 늘리기로 했다. 여타 시중은행 역시 ETF와 펀드 개수를 계속 늘릴 방침이다. 업계 관계자는 “증권에서 안정적인 수익률을 원하는 고객을 빼앗아 오려고 특판 예금 상품에 좀 더 힘을 쏟는 곳도 꽤 있다”고 들려준다.
유의 사항은 없나
그럼에도 제도가 본격 자리 잡는다면 이때부터는 유의 사항을 잘 알아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내가 보유하고 있는 금융상품이 이전이 가능한지 사전에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황선아 KB증권 더퍼스트 WM지점장은 “만약 은행에서 증권사로 이전하려고 할 때 실물 이전 신청은 같은 유형의 계좌끼리만 할 수 있다”며 “실물 이전 가능 상품 중에서도 조회 시점과 실제 계좌 이체 완료 시점 사이에 만기상환 연금 지급 수수료 매도 등의 사유로 인해 실제로 실물 이전이 되지 않을 수도 있고 이 경우 사전 안내 없이 매도 처리돼 현금으로 이체될 수 있으므로 상대 금융사 선택 시 실물 이전 가능 여부를 꼭 확인해 신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 금융상품 이전은 제한된다는 점도 변수다. 리츠(REITs)나 MMF, ELS 같은 상품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전이 불가한 상품을 보유한 경우 중도해지에 따른 손실, 투자상품의 원금 손실 가능성도 함께 따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퇴직연금 계좌 보유 자산의 ‘전부 이전’만 가능하고 부분 이전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박수호 기자 park.suho@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80호 (2024.10.16~2024.10.22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