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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겨울만 되면 가로수마다 볏짚 외투…근데 그거 뭐지? [그거사전]

홍성윤 기자
입력 : 
2025-01-13 09:00:00
수정 : 
2025-01-18 06:55:44

뉴스 요약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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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 나무 보호를 위한 볏짚으로 만든 '그거'는 해충 방제를 위한 인위적인 잠복소로, 최근 들어 그 효용성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지자체들은 비용이 많이 드는 잠복소 대신 도시 미관을 위한 얀 바밍을 점차 선호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해충 방지를 위한 효과가 제한적이다.

나무 보호를 위한 적절한 보온재는 이미 존재하지만, 이는 열심히 감싸더라도 보기에는 덜 아름다워 대중의 인기를 끌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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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사전 - 53] 겨울철 나무 감싸는 볏짚 ‘그거’

“그거 있잖아, 그거.” 일상에서 흔히 접하지만 이름을 몰라 ‘그거’라고 부르는 사물의 이름과 역사를 소개합니다. 가장 하찮은 물건도 꽤나 떠들썩한 등장과, 야심찬 발명과, 당대를 풍미한 문화적 코드와, 간절한 필요에 의해 태어납니다. [그거사전]은 그 흔적을 따라가는 대체로 즐겁고, 가끔은 지적이고, 때론 유머러스한 여정을 지향합니다.
2023년 11월 8일, 절기상 입동일 이날 서울 을지로입구역 인근 거리 나무에 잠복소가 둘러져 있다. [사진 출처=연합뉴스]
2023년 11월 8일, 절기상 입동일 이날 서울 을지로입구역 인근 거리 나무에 잠복소가 둘러져 있다. [사진 출처=연합뉴스]

명사. 1. 잠복소(潛伏所)【예문】“나무가 옷을 입은 것 같지 않아? 귀여워.” 그녀가 가로수의 잠복소를 껴안으며 말했다. 그 안에는 온갖 벌레와 애벌레가 가득하겠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잠복소(潛伏所)다. 겨울철 나무줄기에 묶어두는 20~30㎝ 너비의 볏짚·지푸라기 거적을 말한다. 어른 가슴 높이에서 가로수를 둘러싸는 방식으로 설치한다. 단어의 의미는 ‘드러나지 않게 숨기 위한 장소’이지만 실은 앞에 (해충)이란 말이 생략돼있다. 인위적으로 해충 월동을 위한 은신처를 만들어주고, 유인된 해충을 제거하는 병충해 방제의 한 방법이다. 소나무와 벚나무, 포플러, 양버즘나무 등에 주로 사용한다.

나무에 기생하는 해충은 주로 나뭇가지에 서식하다 기온이 내려가면 월동을 위해 땅이나 낙엽 밑으로 이동한다. 그 시점에 맞춰 잠복소를 설치하면 해충은 따뜻한 잠복소 안에서 겨울을 나게 된다. 이후 봄철이 되면 잠복소를 수거해 태우는 식으로 한꺼번에 해충을 제거한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참 치사한 유인책인 셈이다.

미국흰불나방 유충이 갉아먹은 잎. 기어 다니는 속도가 무척 빨라 수목 피해가 큰 해충이다.  원산지는 캐나다·미국·멕시코인데 제2차 세계대전 때 군수물자를 따라 전 세계로 퍼졌다. [사진 출처=산림청]
미국흰불나방 유충이 갉아먹은 잎. 기어 다니는 속도가 무척 빨라 수목 피해가 큰 해충이다. 원산지는 캐나다·미국·멕시코인데 제2차 세계대전 때 군수물자를 따라 전 세계로 퍼졌다. [사진 출처=산림청]

국내에서 1960년대 등장한 잠복소는 1980년대 해충 미국흰불나방과 솔나방 유충(송충이) 방제를 위해 활발히 설치·보급됐다. 친환경적이고 효과적인 방제 방법으로 알려지며 동절기 거리 풍경의 일부로 자리 잡았지만, 요즘 들어서는 평판이 영 시원찮다. 병충해 방제를 위한 다양한 약제가 발달했고, 도심 환경에서 해충이 눈에 띄게 줄어든 탓이다. 에도시대(17~19세기) 때부터 해충 구제에 잠복소를 활용해온 일본에서도 1990년대 전후로 ‘해충 퇴치보다 거미 등 익충을 포집하는 역효과가 더 크다’라는 연구 결과를 토대로 잠복소 사용을 속속 폐지했다. 해충을 잡으려다 해충을 포식하는 거미를 제거하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제 효과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면서, 잠복소는 예산 낭비 탁상행정의 사례로 전락했다. 나무 한 그루당 잠복소 설치 비용은 약 1만~1만3000원 수준으로, 지자체에서 관리하는 수목의 규모를 생각하면 적지 않은 예산이 필요한 작업이다. 이에 산림청은 해마다 전국 지자체 산림부서에 잠복소 사용을 ‘권장하지 않는다’라며 ‘잠복소 설치에 의한 방제는 무의미하며 설치를 지양할 것’이라는 의견을 전달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겨울철 거리에서는 잠복소가 보인다. 지자체가 관리하는 가로수는 물론, 아파트 단지내 수목에서도 잠복소는 현역이다. 이유가 뭘까. 첫째, 계속 해오던 일이기 때문이다. 둘째, 동절기를 대비해 뭐라도 한 티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반성 없는 관성(慣性)은 해충만큼 박멸하기 어렵다.

입지가 좁아질 대로 좁아진 잠복소 자리를 꿰차고 있는 ‘그거’가 있다. 뜨개질로 만든 털실 덮개다. 이 뜨개옷은 얀 바밍(yarn bombing), 그래피티 니팅(Graffiti Knitting)이라고 한다. ‘직물 폭격’ ‘뜨개질 낙서’라는 뜻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뜨개질로 만든 직물을 도심의 공공 건축물에 입히는 활동과 그 결과물을 말한다. 물론 가로수도 대상이 된다. 얀 바밍은 2005년 텍사스 휴스턴에서 시작됐는데, 니타 플리즈(Knitta Please)라는 ‘익명의 게릴라 뜨개 집단’이 시초다.

2022년 신사동 가로수길 은행나무에 입힌 그래피티 니팅 작품들. 신사동 주민과 학생 130여명의 자원봉사자가 참여했다. [사진 출처=강남구청]
2022년 신사동 가로수길 은행나무에 입힌 그래피티 니팅 작품들. 신사동 주민과 학생 130여명의 자원봉사자가 참여했다. [사진 출처=강남구청]

얀 바밍은 겉보기에 잠복소와 닮았지만 해충 구제가 목적은 아니다. 도시 미관을 위한 일종의 공공 설치미술이다. 거리를 더 따뜻하고 포근하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최근 국내 지자체에서는 비효율·예산 낭비 논란이 있는 잠복소 대신 얀 바밍을 택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형형색색 뜨개옷을 입은 가로수들을 보는 행인의 마음은 따뜻해지겠지만, 사실 나무는 따뜻하지 않다. 사람에 비유하면 엄동설한에 발가벗고 있는데 양말만 신고 있는 격이다. 보온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동절기 한파로부터 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보온재는 이미 있다. 추위에 약한 배롱나무·모과나무·복숭아나무·장미 등은 밑동부터 윗가지까지 볏짚이나 부직포, 녹화마대(황마로 만든 천연섬유 시트)로 된 보온재로 꼼꼼히 감싸주면 피해를 막을 수 있다. 물론 붕대로 둘둘 말린 이집트 미라처럼 보여 얀 바밍 같은 심미성은 기대하기 어렵다. 모든 나무에 보온재가 필요한 것도 아닐뿐더러 얀 바밍처럼 일부만 감싸는 형태로는 방한 효과도 없다.

다음 편 예고 :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금속 술병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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