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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투사에서 보수전사로 … 좌우 넘나든 金, 통합 깃발 들었다

진영화 기자
김형주 기자
입력 : 
2025-05-04 17:35:03
수정 : 
2025-05-04 20: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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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선출된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은 노동운동가에서 보수 정치인으로 변신하며 강성 보수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긴 정치 경력 동안 보수 정부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최근 비상계엄 이후 대정부질문에서 주목받으며 대선 레이스를 시작했다.

그는 "기업하기 좋은 대한민국"과 "노동 약자를 따뜻하게 보살피는 정부"를 목표로 삼아 국민 통합의 기치를 내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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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 국힘 대선 후보 선출
미싱 노동자로 민주화 운동
배신자 비판속 보수정당 입당
3선의원·재선 경기지사 지내
계엄 사과안해 강성보수 지지
후보확정뒤 선대위 간담회서
"좌우·동서·남녀·빈부 통합"
◆ 이재명 시대 ◆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오른쪽)가 지난 3일 최종 경선에서 승리한 뒤 경쟁자였던 한동훈 전 대표를 끌어안고 있다. 뉴스1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오른쪽)가 지난 3일 최종 경선에서 승리한 뒤 경쟁자였던 한동훈 전 대표를 끌어안고 있다. 뉴스1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선출된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은 진보와 보수의 극단을 오가며 선명한 발자국을 남겼다.

그는 노동운동가로 출발해 보수 진영 정치인으로 변신했고, 국회의원 3번과 경기도지사 2번을 지냈다. 현직을 떠난 시절에는 아스팔트 우파에 합류해 강성 보수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정치적 공백기를 거치며 한때 올드보이로 여겨졌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고, 그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움켜쥐었다. 반탄(탄핵 반대)의 대표 주자로서 찬탄(탄핵 찬성)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를 결선에서 꺾었다.

김 후보는 1951년 경북 영천에서 4남3녀 가운데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선 바람에 판잣집 단칸방을 전전했다고 한다. 그는 "방에 누우면 구멍 난 천장으로 밤하늘의 별이 보일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김 후보는 가난한 형편에도 명문 경북고를 거쳐 1970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대학 입학 전부터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시작은 1969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3선 개헌 때였다. 고교 3학년이었던 김 후보는 개헌 반대 시위를 주도했다가 무기정학을 받았다. 대학에 입학한 뒤에도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며 두 차례 제적됐다. 그래서 졸업장은 입학 후 24년이 지난 1994년에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대학 문을 뛰쳐나와 '학출'(학생 출신) 노동운동가의 가시밭길을 걸었다.

노동운동가 시절 시위에 참여한 김문수 후보.  김문수 후보 캠프
노동운동가 시절 시위에 참여한 김문수 후보. 김문수 후보 캠프




1971년 구로공단 옆 안양천 둑방길 근처에 있던 드레스 미싱 공장에 취업했다. 동대문시장 재단 보조와 한일공업주식회사 보일러 조수를 거쳐 금속노조 남서울지부 청년부장을 지냈다. 노동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떠올랐다.

평생의 반려자인 설난영 여사도 노동운동가 시절 동지로서 만났다. 김 후보는 1978년 구로공단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으로 활동할 때 세진전자 노조위원장이던 설 여사를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김 후보가 삼청교육대 수배령이 떨어졌을 때 설 여사의 자취방에서 도피 생활을 하면서 가까워졌고, 1981년 서울 관악구 봉천중앙교회 교육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노동운동가인 두 사람이 위장 결혼을 가장한 시위를 하는 것으로 생각한 경찰들이 비상 대기를 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현실 정치인의 삶을 시작한 것은 1996년 15대 총선 때였다. 한때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했던 '극좌 인사'였지만 신한국당(국민의힘 전신)에 입당했다. 김 후보는 당시 운동권에서 '변절자'라고 비판받았지만 좌익 사상에 분명히 선을 그었다.

김 후보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함께 군사정권이 막을 내린 시점에서 노동운동의 관점도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서 "변절이 아닌, 또 다른 발전을 위한 기회를 만들기 위해 정치권에 발을 딛게 됐다"고 했다.

이후 '보수의 무덤'으로 꼽히는 경기 부천시 소사 지역구에서 내리 3선을 했고, 2006년부터 8년간 경기도지사를 지냈다. 2012년에는 새누리당 대선 경선에 도전장을 냈으나 박근혜 후보에게 밀렸다. 그는 당내 경선 후보 토론에서 "지난 50여 년에 걸쳐 우리 사회의 가장 어려웠던 격동의 순간들이 제 삶 자체였다"고 회고했다.

김 후보는 보수 정부에서 굵직한 공직을 두루 거치며 강성 보수 리더로 자리 잡았다. 때로는 거친 언행으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2019년 문재인 당시 대통령을 겨냥해 "총살감"이라는 말을 해 풍파를 일으켰다.

그는 공직생활 내내 청렴을 강조했다. 저서에도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멸사봉공 선공후사'의 정신을 배웠고 공인으로 살며 '청렴영생 부패즉사'의 신념이 몸에 배었다. 지도자가 사익을 채우면 국민은 불행해진다"고 썼다.

김문수 후보가 고용노동부 장관 시절 '비상계엄에 대해 사과하라'는 야당 측 요구에 응하지 않고 꼿꼿이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 연합뉴스
김문수 후보가 고용노동부 장관 시절 '비상계엄에 대해 사과하라'는 야당 측 요구에 응하지 않고 꼿꼿이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 연합뉴스


정계에서 존재감이 사그라들던 김 후보가 이목을 끈 것은 지난해 12·3 비상계엄 이후 대정부질문에서였다. 계엄 후폭풍으로 국민의힘이 패배감에 휩싸였을 당시 그는 "사과하라"고 다그치는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 요구에 호응하지 않으면서 보수 진영에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보수 진영 후보 가운데 1위를 달리면서 일찌감치 유리한 고지를 점유했다.

김 후보는 지난 3일 전당대회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서 "기업하기 좋은 대한민국, 노동 약자를 따뜻하게 보살피는 정부를 만들겠다"며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굳건하게 바로 세우겠다"며 진보와 보수 양쪽에 손을 내밀었다. 한국 사회의 가장 왼쪽에서 시작해 가장 오른쪽까지 경험했던 김 후보가 국민 통합의 기치를 내걸고 대선 레이스의 출발선에 섰다.

[진영화 기자 / 김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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