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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저성장 늪, 깊고도 넓다

박수호 기자
입력 : 
2025-01-01 2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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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다 죽는데…수출 해법 ‘안갯속’
뜰 만하면 韓 경제 발목 잡는 ‘을사5적’

포스코는 2023년 7월 포항제철소 1제강공장을 폐쇄했다. 이듬해인 2024년 11월 포항 1선재공장까지 문을 닫았다. 현대제철도 비슷한 시기에 포항 제2공장 폐쇄를 결정했다. ‘산업의 쌀’로 인식되는 철강 산업의 두 주축 회사가 어려움을 겪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한국무역협회는 2024년 한국 철강 수출액이 전년 대비 6.5% 감소한 160억달러를 기록할 것이라 내다봤다.

국내 양강이 고전하는 배경에는 중국과 일본 철강제품의 밀어내기식 덤핑 수출이 자리한다. 중·일 제품은 국내 생산단가 대비 10%, 많게는 20% 이상 저렴하다. 이 제품이 한국으로 들어오며 국내 대표 철강업체 위기감이 높아졌다.

한국 경제가 2025년 ‘1% 저성장’에 그칠 수밖에 없는 산업계의 대표적인 장면이다. 이외에도 한국 경제 발목을 잡는 5적(敵)은 무엇일까.

중국산 저가 공세에 포스코는 2024년 11월 포항 1선재공장 문을 닫았다. (포스코 제공)
중국산 저가 공세에 포스코는 2024년 11월 포항 1선재공장 문을 닫았다. (포스코 제공)

1. 수출 중심 경제의 부진

반도체 부진하면 나라 경제 흔들

대한민국 경제는 전통적으로 수출 주도형 모델에 의존해 성장해왔다. 반도체, 자동차, 조선 등 주요 수출 산업이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하지만 최근 글로벌 시장 환경 변화와 경쟁 심화로 이 모델의 한계가 뚜렷해졌다.

2024년 한국무역협회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무역 의존도는 65%다. 일본(29%)의 2배가 넘는다. 독일(40%)이나 미국(23%) 등 주요 선진국과 비교해도 상당히 높다.

특히 산업 다변화 부족은 경제 안정성을 저해하는 주요 요인이다. 최근 한국 경제성장률을 낮춰 잡은 IMF는 보고서에서 “한국 경제는 다변화된 산업 구조와 안정적 내수 시장이 부족하다”며 “반도체 중심의 경제 구조가 장기적인 성장 잠재력을 제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외 환경이 변화하면 고스란히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특히 지속되고 있는 고금리와 강달러 흐름 속에서 원화 가치 하락, 무역수지 악화로 이어지는 구조다.

대중국 의존도가 높은 수출 구조 역시 발목을 잡는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중국에 중간재를 수출하는 한국 입장에서 중국 경기 위축은 뼈아프다”며 “그렇다고 중국 내수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소비재 수출을 하려 해도 중국 내 애국주의 소비, 소비 침체 여파 등으로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최근 ‘알테쉬톡의 공습’ 책을 펴낸 박승찬 한중연합회 회장(용인대 AI융합대학 중국학과 교수)은 “알리바바, 테무, 틱톡 등 글로벌 플랫폼을 만들어낸 중국이 한국 대신 자국 중소기업의 해외 진출 판로를 개척, 한국 중소기업 수출 경쟁력은 더 약화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 생산성 정체

총요소생산성 증가율 선진국에 뒤져

수출 부진은 제조업 생산성과 관련 깊다. 한국 경제가 살아나려면 해외에서도 통할 경쟁력 있는 제품을 계속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최근 주변국이 더 앞서나가는 모양새다. 미국은 AI 등 혁신제품으로 멀찍이 치고 나가고 후발 주자인 중국과 동남아 국가는 한국 주력 제조 산업을 위협한다. 반도체, 조선, 디스플레이 등은 확고한 우위에 있다고 안심하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경쟁국에 언제 역전될지 모르는 상황에 놓였다.

이런 배경에는 생산성 둔화가 자리한다. 한국무역협회의 2024년 보고서인 ‘생산가능인구 감소 대응을 위한 기업의 생산성 제고 방안’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우리나라의 노동생산성은 OECD 37개국 중 29위로 하위권을 기록 중이다. 보고서는 우리나라 생산성 증가율이 크게 둔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 배경으로 ▲기업의 저조한 디지털 전환 수준 ▲대·중소기업의 생산성 격차의 심화 ▲제조업과 서비스업 간 생산성 격차의 심화 ▲경직된 노동 시장 등을 꼽았다.

남창우 KDI 연구부원장 역시 ‘한국 경제 생산성 제고를 위한 개혁방안’ 보고서에서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이 1% 이하로 선진국 증가율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언급했다. 총요소생산성이란 자본·노동·에너지·원재료·서비스 등 모든 투입 요소를 고려한 생산 과정 전반의 효율성 지표를 뜻한다.

남 부원장 역시 생산성 저하의 3대 원인으로 ▲노동 시장 이중 구조·경직성과 과도한 중소기업 지원 정책 등에 따른 생산 자원의 비효율적 배분 ▲공교육 시스템 약화·연구개발(R&D) 실질적 성과 부진 등 창조적 혁신 둔화 ▲중앙집권적 행정 체계에 따른 생산성 저하 등에 따른 미약한 사회자본을 꼽았다.

민간 기업에도 책임이 있다는 의견도 있다. 신동엽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혁신을 통한 성장보다 기존 시장을 방어하려는 기업 경영 방식의 한계가 저성장 기조를 고착화시키는 핵심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3. 저출생·고령화 이중고

초고령 사회 진입…세계 최고 속도

2024년 12월은 한국 인구학계에서 역사에 남게 됐다.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전체 주민등록 인구의 20%를 웃돌기 시작한 시점이다. 이로써 한국은 유엔 기준인 ‘초고령 사회’에 사상 처음으로 진입했다.

1981년까지 4%에 미치지 못했던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중은 2000년 7.2%로 고령화 사회(노인인구 7% 이상) 진입을 알렸다. 18년 만인 2018년 14.3%를 돌파, 고령 사회(노인인구 14%)에 돌입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이번 초고령화 사회(노인인구 20%) 진입은 7년 만으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다.

애초 2025년 초 진입을 예상했으나 낮은 출산율, 기대수명 증가 등으로 시기가 예상보다 대폭 앞당겨졌다.

무엇보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청년층의 출산 기피 현상이 가장 크다. 한국은행은 “양질의 일자리는 줄어들고 비정규직 비중이 늘어나며 청년층 취업 경쟁이 심화됐다”며 “여기에 더해 주택 가격도 급등해 청년의 고용·주거 여건이 과거보다 악화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인구 구조의 급격한 변화는 한국 경제 지속 가능성을 위협할 수 있다. 저출생으로 인해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급감하며 노동력 감소와 소비 위축이 동시에 나타난다. 반면, 고령화는 연금, 의료비 등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킨다.

한국은행은 저출생·고령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2050년대에 0% 이하 성장세를 보일 확률을 68%로 예상했다.

삼성전자는 첨단 반도체 개발을 하려 해도 주 52시간제로 발목이 잡히고 있다며 국회를 설득 중이다. (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는 첨단 반도체 개발을 하려 해도 주 52시간제로 발목이 잡히고 있다며 국회를 설득 중이다. (삼성전자 제공)

4. 경직된 정책·규제

삼성전자 “주 52시간이 늪”

삼성전자 주요 고위 임원 등은 탄핵 정국에도 불구하고 요즘 국회를 찾아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반도체 연구 인력을 주 52시간 근무 대상에서 제외해달라는 현장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반도체 산업에서 한국을 위협하는 중국은 ‘996’ 근무(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 6일 근무)는 물론 최근에는 ‘007’ 근무(24시간 주 7일 근무)도 불사하고 있다. 미국이나 대만 역시 고용 관련해서는 한국 대비 상대적으로 유연하다.

이를 본 삼성전자의 위기감은 상당하다. 한 삼성전자 임원은 “밤을 새고 노력해서 이뤄낸 성과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지불할 수 있으니 제발 법 규제를 한시적으로라도 완화해줬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반면, 한국 정치권은 탄력적 근로시간제 등 현행 유연근로제를 적극 활용하면 된다며 관련법 개정에 소극적이다. 정부와 여당이 규제 완화에 나서고 있지만 야당 협조를 구하기가 녹록지 않다.

중소기업 사정은 더욱 힘겹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중앙정부가 규제를 풀어준다 해도 지자체별로 또 다른 규제가 있어 비효율적”이라며 “구두 지시, 법령에 근거하지 않은 행정지도 등 ‘그림자 규제’를 공공연히 펼치는 공무원 행태에 두 손 들게 된다”고 한숨을 쉬었다. 스타트업이나 신산업에 대한 규제 역시 견고해 혁신 경제로의 전환이 쉽지 않다는 현장 목소리도 높다.

재계에서는 이러다 현대차처럼 국내보다 해외에 공장을 더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이 경우 산업 공동화 현상이 고착화되면서 국가 경쟁력은 후퇴할 수밖에 없다. 천장현 머서코리아 부사장은 “현재 정부 주도의 과도한 규제, 노동 시장 경직성 심화는 기업에 국내 생산활동을 저해하고, 결국 해외로 나가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 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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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내수 부진

소득 양극화·주택 시장 불안

수출에 차질이 빚어진다면 기댈 곳은 국내 경제다.

현대차그룹이 1980~1990년대 ‘마이카’ 시대의 내수 호황으로 돈을 벌어 해외 진출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특수’를 기대하기 힘들다. 글로벌 고금리, 소득 양극화 등으로 내수 시장만으로 우리 기업이 자립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당장 급한 불은 글로벌 고금리 고착화다. 2024년에는 미국 기준금리 인하로 한국은행 역시 기준금리를 소폭 인하하기는 했다. 하지만 2020년대 초반 초저금리 시절을 떠올려보면 일반 서민이 체감하기에 여전히 시중금리는 부담스럽다. 가뜩이나 가계 자산 중 부동산 비중이 높은데 주택담보·전세대출자들은 상대적으로 많은 이자를 내야 하다 보니 소비 여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더불어 경기 침체로 신용대출, 연체율이 동반 상승하고 있다는 점도 내수 회복의 걸림돌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민간신용 레버리지(명목 GDP 대비 민간신용)는 2024년 2분기 말 202.7%로 GDP의 2배를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양극화 역시 내수 부진 탈출을 어렵게 만든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 격차 확대로 소비 여력이 있는 계층은 제한적으로 바뀐 결과다. 소비 주축인 중산층이 줄어들면 전반적으로 경제 활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노동 시장 이중 구조 심화로 소득 양극화가 일어난다’는 가설은 통계로 뒷받침된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소득 이동통계에 따르면 고소득자와 저소득자는 같은 계층에 머무는 비율이 높았다. ‘부자는 더 부자로,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하게 산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빈곤층인 1분위(하위 20%)의 소득분위 유지 비율이 69.1%로 5분위(86%)에 이어 두 번째로 높았다는 점은 양극화의 우울한 숫자다.

정치가 발목을 잡는다는 시각도 있다. 계엄 사태 이후 2024년 12월 소비자심리지수(CCSI, 한국은행 자료)는 전월 대비 12.3포인트 급락한 88.4로 집계됐다. 이는 코로나19 창궐 당시인 2020년 3월(-18.3포인트) 이후 최대폭 하락이다. 이성엽 고려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정치적 불확실성 증가로 소비 심리가 살아나기 힘들다는 점이 가장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박수호 기자 park.suho@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91호 (2025.01.01~2025.01.0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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