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증시가 시계제로 상황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 반도체와 석유화학·철강 등 주력 산업이 위기론을 마주한 상황에서 정치적 불확실성까지 대두되면서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해제 사태가 대통령 탄핵 정국으로 이어지자 한국 증시를 떠나는 투자자가 늘고 있다. 한국거래소 정보데이터시스템에 따르면 12월 4일부터 12월 11일까지 코스피에서 빠져나간 외국인 순매도액은 1조1482억원에 달한다. 같은 기간 개인 투자자도 1조5127억원을 순매도했다. 국민연금 등 연기금이 수천억원을 순매수하지 않았다면 코스피는 붕괴됐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떠나지 않고 남은 이들의 고민도 커진다. 포트폴리오 리밸런싱 등 생존 전략 마련에 분주하다. 전문가들은 내수 시장을 겨냥한 기업보단 주주환원·배당주 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조언한다. 산업 측면에서는 조선이나 전력기기 등 산업재나 엔터테인먼트처럼 글로벌 경쟁력이 확실한 섹터를 볼 때라는 것이다. 올 하반기 증시를 이끈 방위 산업을 두고선 의견이 엇갈린다. 경쟁력과 별개로 정치적 불확실성이 수주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단 진단이다.

코스피 밸류 2008년 수준
역가격 모멘텀 vs 신중론
코스피 밸류에이션은 역사적 저점으로 치닫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12월 10일과 11일 코스피 주가순자산비율(PBR)은 각각 0.85배, 0.86배를 기록했다. PBR은 말 그대로 순자산(자본) 대비 주가다. 코스피 PBR이 1 미만이라는 건 코스피 구성 종목 자산을 모두 내다 팔았을 때 받는 돈(청산 가치)이 코스피 시가총액보다 많다는 의미다. 주가가 워낙 부진해 청산 가치에도 못 미치는 형국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2008년 10월 글로벌 금융위기(PBR 0.83배)와 2019년 8월 미중 무역 갈등 심화(0.83배)·2023년 10월 중국 부동산발 리스크 확대(0.83배) PBR과 비슷한 수준이다.
투자자 고민도 커진다. 개념만 놓고 보면 낮은 PBR을 만드는 요인은 크게 두 가지다. ① 주가가 낮든가 ② 자본이 많은 경우다. 코스피를 구성하는 기업들 펀더멘털이 급격히 변했다고 보기 어려운 만큼 현재 코스피 PBR 저평가 원인은 ① 때문이다. 정상적 증시라고 가정할 경우 투자자 입장에서 현 수준의 PBR은 매력도가 높다. 언제든 오를 수 있는 가치를 지닌 기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낮은 PBR에도 투자금이 빠져나가기만 한다는 건 코스피를 향한 의구심이 생각보다 크다는 의미다.
증권가도 코스피 투자 방향성을 두고 갑론을박이다. 증권 업계 한 관계자는 “탄핵 정국이 유동성 리스크로 번지지 않는 선에서 현재 수준 PBR은 바닥에 가깝다고 판단한다. 다만 이와 별개로 한국 증시에 투자했을 때 돈을 벌 수 있느냐는 다른 얘기”라며 “저PBR이 한국 증시 뉴노멀로 자리 잡고 있는 데다, 전 세계 주요 증시 중 YTD(연초 대비 수익률)가 최하위다. 투자처를 한국 증시로 고집할 이유가 없다”고 꼬집었다. 12월 11일 기준 MSCI 한국 지수의 YTD는 -12.2%다. 전 세계 평균(약 20%)을 크게 밑돈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코스피는 현재 상당한 저평가 구간이지만 누구도 바닥은 가늠할 수 없다”며 “불확실성이 큰 시장에선 투자자는 투자 여부에 대한 고민부터 해야 한다”고 짚었다.
증권가 한편에선 단기 반등을 대비한 신중한 매수 전략을 외치는 목소리도 있다. PBR만 보면 코스피가 ‘초저평가’ 구간을 지나고 있어 단기 상승이 예상된다는 분석이다. 일부 증권사에선 ‘역가격 모멘텀’ 전략 활용을 추천하는 보고서까지 나왔다. 역가격 모멘텀은 약세장에서 크게 하락한 종목에 집중 투자해 반등 시 이익을 실현하는 전략이다. 설태현 DB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지난 7월 이후 코스피 약세 국면에서 시장이 단기 반등할 때 역가격 모멘텀 팩터 상위 종목은 시장 수익률을 항상 웃돌았다”며 “최근 증시에서도 가격 하락폭이 큰 종목 반등이 두드러진다”고 설명했다.
반면 신중론도 있다. 변준호 IBK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증시가 단기 급락하면서 지수의 가격 메리트가 부각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기술적으로 충분히 과매도됐다고 보기는 애매한 지점들이 있다”고 말했다. 변 애널리스트는 “12월 10일 기준, 코스피 60일 이격도(주가와 이동 평균선 간의 괴리 정도를 보여주는 지표)는 93 수준까지 하락했으나 급락 상황에서 저점 형성이 보통 90 수준에서 나타났다. 정치 불확실성이 지속될 경우 코스피는 60일 이격도 90을 반영한 약 2300포인트까지 하락할 위험도 있다”고 덧붙였다. 변 애널리스트는 실적 변동성이 적고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인식되는 대형주에 대한 관심을 높일 때라고 진단했다. 김학균 센터장도 “투자를 해야 한다면 장기적 관점에서 성장 가능한 종목이나 배당 여력이 높은 종목을 살펴야 한다”고 조언했다.
2016년 탄핵 정국과 다른 점은
이번엔 대외 악재 수두룩
일각에서는 2016년 10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과 지금을 비교한다. 당시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불확실성만 빠르게 해소되면 증시도 정상화될 것이라는 기대다. 반만 맞는 얘기다. 얼핏 보면 상황은 비슷하다. 당시 내부에선 박 전 대통령 탄핵 정국이 계속됐고, 외부에선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으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박 전 대통령 탄핵 국면이 본격화된 2016년 11월 외국인을 중심으로 한국 증시를 이탈했고,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2016년 12월을 기점으로 외국인이 돌아왔다. 코스피 역시 빠르게 회복돼 2017년 4월에는 사상 처음 2400선을 돌파했다. 당시 기준 역대 최고치다.
하지만 디테일이 다르다. 현재 한국 증시를 짓누르는 건 정치적 불확실성 하나가 아니다. 트럼프 2기로 촉발된 ‘보편 관세’ 이슈와 중국발 리스크로 커진 ‘수출 둔화’ 우려다. 오랜 기간 고금리로 침체된 내수도 문제다. 경제 전망치도 줄하향 중이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은 최근 2025년 한국 경제성장률을 2%로 전망했다. 지난 9월 발표 때보다 0.3%포인트 하향 조정했다. 씨티, 골드만삭스 등 글로벌 투자은행은 일제히 1%대 성장률을 점치고 있다. 반도체 산업이 슈퍼 사이클 초입에 들어서 수출 호조를 누리던 2016년 4분기와 2017년 1분기 상황과 정반대다.
전문가들도 “워낙 상황이 달라 동일선상에서 비교해선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앞선 (2016년 탄핵 정국) 사례와 달리 한국 경제는 내수가 침체하고 주요 산업 경쟁력이 약화한 상황에서 정치적 리스크를 마주했다”고 선을 그었다. 박희찬 미래에셋증권 리서치센터장도 “주요 산업 경기 하락 국면이 진행되는 시기에 정치적 불확실성이 겹쳐 발생한 만큼, 기본적으로 2016년과 상황이 다르다”고 보탰다.
2025년 투자처 찾는다면
민주당 집권 땐 바이오 훨훨
그럼에도 투자 시계를 중장기 관점으로 늘려본다면 기회 요인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우선 눈길 가는 업종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데다 업황이 좋은 조선 산업이다. 조선 업계는 미 해군이 발주한 ‘함정 MRO(유지·보수)’ 사업이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주목받을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는 분위기다. 이경수 메리츠증권 리테일부문장(전 리서치센터장)은 “조선이나 기계 같은 다른 국가와 경합 강도가 높지 않은 섹터가 재조명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HD현대일렉트릭과 효성중공업, LS일렉트릭 등 전력기기 부문도 관심을 모은다. 미국 등 북미를 중심으로 데이터센터 내 전력 수요가 상당하고 ‘미국우선주의’를 외치는 트럼프 2기 출범과 맞물려 미국 내수 설비 투자가 본격화되면 두드러지는 실적을 낼 것이라는 전망이다. 미국은 최근 ① 노후 전력 인프라 교체 ② 장거리 송·배전 설비 수요 확대 ③ 이상 기후에 따른 전력 수급 불안정성 해소 등의 이유로 전력 설비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특히 노후 전력 인프라가 사회 문제로 대두된 상황이다. 미국 전력 송전망과 발전소 변압기 중 70%는 설치된 지 25년 이상 지났다.
비제조업 부문에선 엔터테인먼트가 관심을 끈다. 트럼프 2기 출범 시 우려되는 ‘관세 폭탄’ 영향권과 연관이 없는 데다 실적 개선 기대감도 상당하다. 기대 배경에는 주요 아티스트 복귀가 있다. 하이브의 방탄소년단(BTS)이 대표적이다. 멤버 중 가장 늦게 입대한 지민과 정국이 전역하는 2025년 6월 이후로는 BTS ‘완전체’를 볼 수 있을 전망이다. 여기에 블랙핑크 ‘완전체’ 활동도 2025년 예고된 상태다.
일각에선 탄핵-조기 대선으로 진보 정권이 집권할 경우 제약·바이오 부문을 주목하라고 조언한다. 전통적으로 진보 정권에서 활황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나름 이유가 있다. 진보 정권은 성격상 투자자에게 미래에 대한 부푼 꿈을 꾸게 만든다. IT, 바이오, 헬스케어 등 미래 신성장 산업과 어울린다. 2003년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집권 이후 1년간 코스피 수익률을 보면 의료·정밀기기가 52.4%, 제약이 42.8% 상승했다. 2017년 문재인 전 대통령 집권 이후 1년간 코스피 수익률도 유사하다. 제약이 52%, 의료·정밀기기가 42.9% 올랐다.
이 같은 요소를 빼고 바라봐도 바이오는 2025년 주목할 만하다. 금리 인하 수혜로 가장 큰 이익을 누릴 업종인 데다 위탁개발생산(CDMO) 분야를 중심으로 미중 갈등 반사이익까지 누리고 있어서다. KRX 헬스케어 지수는 12월 11일 기준 3622포인트를 기록 중이다. 연초(3307포인트) 대비 10% 가까이 오른 상태다. 이종형 키움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바이오는 한 번쯤 봐볼 필요가 있다”며 “금리 인하 수혜 섹터인 동시에 과거 바이오 버블 사이클과 달리 주요 기업을 중심으로 이익 가시성이 명확해지는 단계고, 2025년 1월 JP모건 헬스케어 콘퍼런스 등도 기대감을 자극하는 요소”라고 설명했다.
다만, 올 하반기 한국 증시를 이끌었던 방산을 두고는 의견이 엇갈린다. 박희찬 센터장은 “방산은 정부 영향력이 반영되는 섹터인데, 지금의 정치적 불확실성은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휴전 가능성도 있어 현재로는 중립 의견인 상황”이라고 밝혔다. 방산 업계도 북미 시장 진출 계획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올해 미국 공군과 해군의 훈련기 사업에 도전장을 내밀었으나, 정부 역할이 중요한 방산 시장 특성상 정세 불안이 장기화하면 경쟁에서 밀릴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터져 나온다. 반면, 여전히 방산의 성장 가능성을 점치는 의견도 존재한다. 장남현 한국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국내 정치 불확실성이 높아지며 방산주 주가 변동성이 커지고 있지만, 방산 기업의 실적 개선과 수출 증가세는 내년에도 이어질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네이버·하이닉스 압도적…유한양행·삼바도 눈길
한국 증시 수급의 키는 외국인이 쥐고 있다. 폭락장에도 외국인 수급이 몰리는 종목을 좇는 것도 투자 전략 중 하나다.
한국거래소 정보데이터시스템에 따르면 12월 4일부터 11일까지 외국인 순매수액이 가장 높은 종목은 네이버다. 순매수액만 1974억원이다. 증권가에선 3분기 호실적과 인공지능(AI), 커머스 부문 기대감이 외국인 자금을 이끌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네이버는 3분기 5253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는데,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8.2% 증가한 수치다. 김현용 현대차증권 애널리스트는 12월 12일 내놓은 리포트에서 네이버 목표주가를 기존 26만원에서 28만원으로 상향 조정했다.
SK하이닉스와 한화에어로스페이스도 눈길을 끈다. 각각 1805억원, 883억원의 외국인 순매수액을 기록했다. 고대역폭메모리(HBM)와 방산 부문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만큼, 내부 정치적 리스크와 별개로 펀더멘털이 견조하다고 판단한 모습이다. 제약·바이오 부문에선 유한양행과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상위권을 기록했다. 유한양행은 558억원의 외국인 순매수액을 기록했는데 폐암 신약 렉라자 매출이 2025년 본격화될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긍정적 실적을 기대하는 모습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역시 미국의 중국 바이오 견제를 위한 생물보안법 통과 기대감에 외국인 자금(순매수액 419억원)이 몰렸다.
[최창원 기자 choi.changwo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89호 (2024.12.18~2024.12.24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