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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원화 가치 급락…‘가난해진’ 대한민국 [대혼돈의 자산 시장: 대체 투자]

나건웅 기자
입력 : 
2024-12-17 2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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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인·금·달러로 정치 리스크 ‘헤지’

갑작스럽게 맞이한 계엄 사태와 대통령 탄핵 정국은 우리나라 국민을 ‘가난하게’ 만들었다. 외부 변수에 국내 정세 불안이 겹쳐 원화 가치가 급락하면서다. 현금을 비롯해 원화를 기반으로 하는 대부분 자산 역시 덩달아 가치가 떨어지게 됐다. 최근 원화 가치 변동과는 무관한 ‘대체 투자처’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도 여기 있다. 국내 상황과는 관계없이 글로벌 수요·공급으로 가격이 결정되는 자산이다. 전통적인 안전자산으로 평가받는 금과 달러, 여기에 최근에는 디지털자산(코인)에까지 유동성이 몰리며 가격이 오르는 중이다. 원화 자산 가치 하락을 방어하기 위한 ‘헤지(위험 분산·회피)’가 목적이다.

최근 비트코인이 사상 첫 10만달러를 돌파하는 등 강세를 보이고 있다. 불안한 글로벌 정세 위기를 헤지할 수 있는 대체 투자처로 자리매김한 모습이다. (연합뉴스)
최근 비트코인이 사상 첫 10만달러를 돌파하는 등 강세를 보이고 있다. 불안한 글로벌 정세 위기를 헤지할 수 있는 대체 투자처로 자리매김한 모습이다. (연합뉴스)

코인 이제는 위험 ‘헤지’ 자산

미국 親코인 기조에 우상향곡선

코인이 갖는 자산으로서 위상은 날로 견고해지는 중이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으로 대표되던 투기성 자산에서, 이제는 화폐 가치 변동을 헤지할 수 있는 글로벌 대체 자산으로 자리매김하는 모습이다. 특히 비트코인은 전체 공급량이 2100만개로 한정돼 희소성이 있는 데다 채굴에도 비용이 필요한 만큼 ‘금’과 유사한 특징을 갖는다.

가격은 우상향곡선을 그린다. 시가총액 1위 비트코인은 사상 첫 10만달러를 돌파했다. 친비트코인 공약을 쏟아냈던 트럼프 대통령 당선으로 기대감이 커진 데다, 최근에는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 역시 공식 석상에서 “비트코인은 디지털 금과 같다”고 언급하는 등 달라진 위상을 자랑한다.

“이제 과거와 같은 대규모 하락장은 실현 가능성이 줄었다”는 게 전문가와 업계 관계자 중론이다. 비트코인의 전 세계 자산 시총 순위가 7위까지 오르는 등 워낙 덩치가 커진 데다, 현물 ETF 상장으로 글로벌 자본이 대거 몰리면서다. 파사이드인베스터스에 따르면 12월 12일 기준 미국 시장에 상장된 비트코인 ETF에 유입된 돈은 344억달러(약 49조원)에 달한다. 전체 시총 약 17%를 ETF가 차지하고 있다.

미국 투자은행 번스타인의 가우탐 추가니 애널리스트는 “2025년 말까지 비트코인 가격이 20만달러에 이르면서 기관과 기업 재무 자산의 새로운 표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박수연 메리츠증권 애널리스트는 “트럼프 당선으로 코인 규제 완화 분위기가 커졌다. 달러인덱스와 비트코인을 별도 자산으로 구분하고 둘 사이 상관관계보다는 정책 변화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투자 시 주의해야 할 점도 있다. 비트코인을 제외한 대부분 ‘알트코인’은 여전히 가격 변동성이 워낙 크다. 하루 10~20% 변동폭은 흔히 나타날 정도다. 알트코인 투자자 역시 헤지 목적보다는 고위험 투자 관점에서 접근한다. 전체 코인 시총에서 비트코인이 차지하는 비중을 뜻하는 ‘비트코인 도미넌스’는 2022년 38%에서 최근 55%를 넘어설 만큼 커졌다. 알트코인보다는 상대적으로 검증된 비트코인에 돈이 몰리는 모습이다.

글로벌 거래소마다 가격이 다르다는 점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코인 시장은 거래소별로 투자자 수급이 다르다. 예를 들어 국내 비트코인 가격은, 계엄 선포 직후 순간적으로 글로벌 평균 시세 대비 30% 넘게 밑돌았다. 계엄 선포로 두려움을 느낀 한국 투자자만 ‘패닉 셀’에 나서면서다.

탄핵 국면 이후 정권 교체가 이뤄질 경우에도 국내 코인 가격은 단기 충격이 나타날 수 있다. 최근 2년 유예가 결정되기는 했지만,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코인 과세를 적극 추진하는 등 상대적으로 코인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해왔다. 한 코인 투자 업계 관계자는 “거래소마다 가격 차이가 나타날 수 있지만 차익을 노린 투자자들이 다른 거래소로 코인을 옮겨 파는 과정에서 글로벌 가격은 결국 수렴한다”며 “즉각 충격에 반응하기보다는 글로벌 시세와 차이를 살피면서 투자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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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안전자산

골드뱅킹·골드바 매수 ‘껑충’

안전자산 대표 격으로 불리는 ‘금’에도 유동성이 몰린다. 비단 탄핵 국면을 맞이한 한국 얘기만은 아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시리아 내전 등 중동 정세가 불안해지며 그야말로 ‘금값’이 됐다. 인베스팅닷컴에 따르면 글로벌 금 현물 가격은 올해 들어서만 33% 넘게 올랐다. 12월 12일 기준 온스당 가격이 약 2721달러로 올 초(약 2045달러)보다 700달러 가까이 상승했다.

탄핵 국면으로 정신없는 한국 역시 계엄 선포 직후 금값이 뛰었다. 골드뱅킹을 취급하는 시중은행 3곳(KB국민·신한·우리은행)의 최근 골드뱅킹 계좌 잔액은 12월 한 달 동안에만 100억원 가까이 늘었다. 골드뱅킹은 실물을 직접 사는 대신 금을 0.01g 단위로 매입할 수 있는 금 투자상품이다. 7400억원 수준을 유지하던 골드뱅킹 잔액은 계엄 사태 다음 날인 지난 12월 4일 하루에만 84억원 증가했다. 골드뱅킹 거래 가격은 국제 금 가격에 원달러 환율을 곱한 값으로 결정된다. 자연히 원화 가치 하락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금 현물 ETF인 한국투자신탁운용의 ‘ACE KRX금현물 ETF’도 비상계엄 사태 이후 연일 상승세다. 계엄 선포 전날인 12월 2일 1만6955원에서 12일에는 1만7895원까지 뛰었다.

실물 투자도 눈에 띄게 늘었다. 지난 4일에는 ‘골드바’가 15억원 넘게 팔렸다. 5대 은행 하루 평균 골드바 판매액(약 7억원)의 2배 수준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금 실물은 거래 시 부가가치세와 수수료, 여기에 보관 비용까지 들어간다. 단기 투자 차익을 노린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실물 금을 확보하려는 수요가 많았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달러 트럼프 집권에 ‘강세’

‘차익 실현’에 가격 하락 우려도

미국 달러를 둘러싼 투자자 관심 역시 커지고 있다. 원화 가치 하락을 헤지하는 한편, 최근 지속되는 강달러 기대감에 매수세가 몰린다. 계엄 선포 직후에는 차익 실현 수요에 따라 국내 달러 예금 잔액이 급감하기는 했지만, 내년 원달러 환율이 1500원까지 오를 것이라는 일부 전망이 나오면서 ‘추가 베팅’에 힘이 실리는 모습이다.

원달러 환율이 요동치면서 국내 달러 예금 시장도 출렁이는 요즘이다. 5대 시중은행에 따르면, 계엄 사태 직후인 12월 4일 달러 예금 잔액은 하루 만에 6억6550만달러 줄었다. 두어 시간 만에 40원 넘게 급등한 환율에 ‘팔자’ 심리가 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로는 꾸준히 잔액이 느는 중이다. 12월 9일 기준 달러 예금은 4일 대비 10억달러 넘게 늘었다. 노무라증권은 “내년 5월까지 원달러 환율 1500원을 전망, 달러 매수를 추천한다”며 “한국은행 외환보유고 대응 여력이 부족해졌고, 달러 매도 헤지에 따른 손실 우려가 커진 만큼 국민연금이 환헤지에 나설 유인 역시 감소했다”고 분석했다.

달러화 자체도 강세를 보인다. 주요 6개 통화에 대한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미국달러지수(DXY)는 최근 3개월 동안 5% 가까이 올랐다. 내년 초 미국 트럼프 정권이 본격 출범하면 달러 강세가 가속화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관세 인상 등 인플레이션 압박이 커질 수 있어 금리 인하 속도를 조절할 것으로 예상된다.

단 너무 많이 오른 달러 투자에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최근 모건스탠리는 고객들에게 ‘달러 매도’를 권고하는 내용의 메모를 보냈다. 데이비드 아담스 모건스탠리 연구원은 “달러에 대한 좋은 소식은 이미 가격에 반영됐다. 투자자들이 트럼프 새 행정부가 시행할 정책의 속도와 폭, 규모를 과대평가하고 있다”며 미국 달러보다는 유로화나 호주 달러, 영국 파운드 등 매수를 권했다.

[나건웅 기자 na.kunwoong@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89호 (2024.12.18~2024.12.2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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