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바로가기

기사 상세

문화

“전 남편이 10대 소녀와 동거한다네요”···변태적 욕망이 예술로?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
입력 : 
2025-10-05 12:00:00
수정 : 
2025-10-06 17:10:59

뉴스 요약쏙

AI 요약은 OpenAI의 최신 기술을 활용해 핵심 내용을 빠르고 정확하게 제공합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려면 기사 본문을 함께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폴 고갱은 성공적인 주식 중개인으로 살다가 경제 공황을 맞이한 후 전업 화가로 전향했다.

그는 초기에는 좋은 평을 받았으나, 어려움을 겪으면서 어린 시절 동경하던 원시의 나라로 떠나 현지 소녀들과의 관계를 통해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비록 생전에 성공을 누리지 못한 채 타히티에서 사망했지만, 그는 사후 전설적인 예술가로 평가받게 되었다.

언어변경

글자크기 설정

2014년 9월, 세계인의 눈이 한 ‘그림’으로 향했다. 엄청난 판매가를 기록해서였다. 중동 카타르의 왕족이 작품 한 점을 구매하는 데 우리 돈 2100억원을 냈다. 당시 기준으로 미술 사상 두 번째로 비싼 거래 대금. 작품은 인상파 화가 폴 고갱의 ‘When Will you Marry’였다. 남태평양 타히티 원주민 여성들을 자신만의 화풍으로 구현해낸 그림. 고갱은 살아 있을 땐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은 화가였지만, 죽음으로써 비로소 불멸의 예술가로 자리매김했다.

작품이 오늘날까지도 회자하는 건 단순히 ‘가격’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타히티’에 남긴 폴 고갱이라는 한 예술가의 족적이 남성중심적 성애로 가득해, 오늘날 아름답지 않은 모습으로 독해되기 때문이다. 10대 초반 원주민 소녀들을 임신시키고, 그들을 백인 남성의 시선으로 성적 대상화 한 사람이 폴 고갱이었다. 그의 그림은 우리를 새로운 영감으로 안내하지만, 그의 캔버스에는 난잡한 성생활이, 체액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한화 2100억원에 거래된 폴 고갱의 ‘When will you marry’.
한화 2100억원에 거래된 폴 고갱의 ‘When will you marry’.

혁명의 복판에서 태어난 고갱

1848년 프랑스는 혁명의 한복판이었다. 민주주의자와 왕정복고주의자들의 대립이 만든 파고 위에서출렁거렸다. 그 속에서 폴 고갱이 태어났다. 아버지 클로비스는 급진적 성향의 언론인이었고, 외가에도 사회주의 운동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프랑스는 그해 대통령으로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선택했다. 나폴레옹의 조카였다.

그로부터 4년 뒤, 대통령은 자신이 ‘황제’임을 선언했다. 나폴레옹 3세 시대의 개막. 민주주의자, 무정부주의자, 혁명가로 불린 모든 이들이 탄압받을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 폴 고갱의 집안은 외가 댁이 있는 페루 리마로 향했다.

1848년 프랑스 혁명.
1848년 프랑스 혁명.

어린 시절 마주하는 풍경은 평생의 밑그림이 되기 마련이어서, 폴 고갱은 이 시기를 평생 잊지 못했다. 페루 원주민 하인과 노예가 딸린 저택 생활을 누리면서, 동시에 거친 삶을 살아가는 농부와 상인들에게서 눈을 돌리지 못했다. 햇볕에 그을리면서도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살아가는 굳은 심지가 풍기는 매력때문일 것이다.

학교에 갈 무렵, 폴 고갱은 프랑스 파리로 돌아왔다. 야만의 시골에서, 문명의 최전선으로 이동이었다. 프랑스 아이들은 고갱을 ‘페루의 야만인’이라 불렀다. 페루에서 배운 스페인어밖에 못하는 그의 모습을 조롱하는 것이었다. ‘문명’ 프랑스는 고갱을 모질게 맞았고, 고갱은 너그러운 페루가 그리웠다. 이방이 고향이 되고, 고향이 이방이 된 역설. 고갱의 마음속엔 원시를 향한 애정이 싹텄다. 10대 시절부터 그가 상선의 선원이 되어 세계를 유랑한 것 역시 이같은 마음에서였다. 그에게 프랑스는 억압이었고, 원시의 세계는 자유였으니까.

“프랑스는 저의 조국이지만, 고향은 아니예요.” 젊은 시절의 고갱.
“프랑스는 저의 조국이지만, 고향은 아니예요.” 젊은 시절의 고갱.

번듯한 일자리를 가졌으나...

성인이 되어 고갱이 처음 얻은 일자리는 증권 중개인이었다. 우연히 친구의 소개로 얻은 직업이었다. 셈에 밝고, 경제 흐름을 읽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는지, 그는 대단한 수완을 보였다. 그가 중개한 주식이 잇따라 대박을 쳤다. 그에게 주식을 사기 위한 사업가들이 줄을 섰다. 고갱은 어엿한 파리의 유명 금융인이었다. 오늘날 가치로 연봉이 2억원을 넘는 고수익자였다. 덴마크 여성을 만나 어엿한 가정도 꾸렸다.

일을 치르는 재간은 증권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붓을 쥘 때도 그는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주식 시장이 마감하면, 그는 집에서 그림을 그렸다. 어린 시절 심어진 풍경, 사람들이 주제였다. 붓칠이 끝나면, 자택 인근 카페를 찾았다. 당대 인상파 화가들의 아지트였다.

폴 고갱의 초기 작품 중 하나인 ‘누드 연구’. 1880년 작품.
폴 고갱의 초기 작품 중 하나인 ‘누드 연구’. 1880년 작품.

초짜 고갱의 붓터치에서 남다른 감각을 읽어낸 이는 카미유 피사로였다. 피사로는 인상파 화가의 세계로 고갱을 안내했다. 붓의 매력에 빠진 고갱은 돈이 덧없이 느껴졌다. 예술의 세계가 주는 황홀은 돈으로는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1881년에는 인상파 전시회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그는 자신을 주식중개인이 아니라, 화가로 여겼다.

1884년. 시대가 고갱을 압박했고, 고갱은 더 세게 붓을 쥐었다. 주식시장이 폭락하는 공황이 찾아와서였다. 모두가 유가증권을 휴지통으로 던져버리는 시절이었다. 주식으로 벌어 먹고살기 힘들다는 의미였다. 예술의 세계 역시 돈줄로 연명하는 건 매한가지여서, 붓질로 먹고살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고갱은 어차피 둘 다 돈이 되지 않는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기로 했다. 건사해야 할 아내와 다섯 아이도 개의치 않았다. 가장을 믿을 수 없는 가족들은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떠났다. 아내의 고향이었다.

“춤 바람보다 무서운 게 그림 바람이에요...” 고갱 부인의 초상화. 1880년.
“춤 바람보다 무서운 게 그림 바람이에요...” 고갱 부인의 초상화. 1880년.

고립되어가는 고갱

취미로 했을 때 찬란해 보이던 예술이, 전업으로 마주하자 거대한 산처럼 보였다. 애써 그린 그림은 평가가 좋지 않았고, 돈은 떨어져 가고 있었다. 고갱과 함께 지낸 유일한 아들 클로비스는 병을 앓았다. 고갱의 동생 마리가 생활비를 대줄 정도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예술계의 우군까지 잃었다. 고갱은 신성 조르주 쇠라의 작품을 지독히 싫어했는데, 이게 피사로의 심기를 건드렸다.

피사로는 고갱과 거리를 뒀다. 자신을 예술계로 이끌어 준 은인과의 결별이었다. 고갱은 점점 고립되어 갔다. 인간에게 고립은 저주이겠지만, 예술가에겐 창조의 원천과 같은 것이어서, 고갱은 기존 인상파와 다른 자신만의 화풍을 쌓아가고 있었다. 굵은 윤곽선과 단순한 색상으로 대상의 본질을 구현하는 ‘쿨루아조니즘’(Cloisonnisme)이었다.

폴 고갱의 ‘노란 그리스도’.
폴 고갱의 ‘노란 그리스도’.

거칠게 고립됐기 때문이었을까. 고갱은 고향 파리에서 향수를 앓았다. 어린 시절, 자신을 풍만하게 안아주던 페루 리마와 같은 예스러운 곳이 그리웠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카리브해 마르티니크 섬으로 향하는 배. 갑판 위에 서 있는 남자는 고갱이었다. 문명 이전의 삶을 간직한 곳에서, 고갱은 마침내 고향을 찾은 기분이었다. 문명의 이기가 없는 곳, 그래서 더 찬란한 생명이 숨 쉬는 곳이었다. 5개월 동안 그는 이곳에서 그림 11점을 그렸다.

카리브해 마르티니크의 풍경을 그린 폴 고갱의 작품.
카리브해 마르티니크의 풍경을 그린 폴 고갱의 작품.

반 고흐와의 운명적 만남

고갱은 ‘마르티니크’ 그림을 갤러리에 내놨다.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사내 두 명이 고갱의 그림 앞을 떠나지 않았다. 빈센트 반 고흐와 미술상인 동생 테오였다. 두 사람은 고갱의 예술 세계에 푹 빠졌다. 빈센트는 고갱과 예술 철학을 얘기했고, 테오는 돈 있는 바이어들에게 고갱을 소개했다. 세 사람의 우정은 깊어졌다. 고갱이 빈센트가 거주하는 아를에 놀러 갈 정도로.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이 방문이 미술사에서 영원히 회자할 사건이 될 줄은.

두 사람의 혼불은 짙고 짙어서, 서로 섞이지 않았다. 철학이 부딪쳤고, 고성이 오갔다. 1888년 12월 23일.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던 평화로운 저녁 날. 고흐가 고갱에게 면도칼을 휘둘렀다. 고갱은 기함하며 그 길로 아를을 떠났다.

“고갱, 그림이 뭔지 알려줄게.” 반 고흐가 해바라기를 그리는 모습을 그린 폴 고갱 작품.
“고갱, 그림이 뭔지 알려줄게.” 반 고흐가 해바라기를 그리는 모습을 그린 폴 고갱 작품.

홀로 남은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잘랐다. 고갱은 프랑스가 상징하는 모든 것에 질려있었다. 고갱은 본인이 나고 자란 곳에서 실향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의 비극은 비가 되어 그의 머릿속 원시의 자연림이 울창했다. 전신주 대신 아름드리나무가, 기차의 경적 대신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전구의 자리에 별빛이 쏟아지는 곳이었다.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고갱은 홀린 기분이었다. 이국의 풍경에 황홀을 느껴서였다. 전시에 마련된 ‘타히티관’이었다. 쨍한 태양과 자연의 맥박이 요동치는 곳. 도시가 감히 범접하지 못한 곳. 이듬해 고갱은 타히티행 배를 탔다.

“내 예술혼을 찾을 수 있는 곳으로 가겠어...” 폴 고갱.
“내 예술혼을 찾을 수 있는 곳으로 가겠어...” 폴 고갱.

타히티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다

“내가 사랑한 것은 옛날의 타히티였다.” 1891년 6월, 타히티의 수도 파페테에 도착했다. 그는 실망했다. 도시에 교회가 가득하고, 사람들은 영국 빅토리아 풍의 옷을 입었다. 고갱이 그토록 도망치고 싶어하던 ‘유럽’의 모습이었다. 고갱은 타히티의 시골 해안 마을 마타이에라로 거처를 옮겼다. 유럽의 색으로 오염되지 않은 곳이었다. 고갱은 그제야 한숨을 크게 쉬었다.

타히티 소녀를 그린 폴 고갱의 작품.
타히티 소녀를 그린 폴 고갱의 작품.

마을에서 유럽인은 고갱 혼자였다. 고갱은 현지인처럼 굴었고, 마을 추장들은 이방인을 열렬히 받아들였다. 13세의 원주민 소녀 테후라를 고갱에게 접대시킬 정도였다. 고갱의 나이 43세. 이곳에 머무는 내내 테후라는 고갱의 시중을 들었다. 침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갱은 낮에는 타히티의 자연에 흠뻑 젖었고, 밤에는 테후라로부터 욕망을 채웠다. 유럽에서의 무감했던 고갱의 모든 감각이 깨어나고 있었다. 성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두 세계의 감각기관이 연결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감정의 풍요함이 열매를 맺었다. ‘타히티의 여인들’, ‘해변에서’, ‘아베마리아’, ‘마나오 투파파우’가 탄생했다. 그는 작업한 그림들에 타히티어로 제목을 달기도 했다. ‘마나오 투파파우’는 “영혼을 생각하다”는 의미의 타히티어. 타히티를 향한 고갱의 애정이 읽히는 대목이다.

“나는 타히티 섬에서 비로소 나로 존재하지.” 폴 고갱의 자화상.
“나는 타히티 섬에서 비로소 나로 존재하지.” 폴 고갱의 자화상.

유럽에서 다시 상처받은 고갱

“파리로 돌아가겠소.”

1893년 여름, 고갱이 짐을 쌌다. 돈이 떨어져서였다. 그림을 팔고 다시 돌아올 요랑이었다. ‘어린 신부’ 테후라가 임신했으나 데려갈 생각은 없었다. 언제 타히티로 올 것인지 언질도 주지 않았다. 성적 만족과 예술적 영감이 되어 줄 원주민 여인은 얼마든 있어서였다. 그는 타히티를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그가 진정으로 사랑한 건 타히티가 주는 쾌락뿐이었다. 파리에 돌아오자마자 인도네시아 자바섬 출신의 14세 소녀를 동거인으로 들였다.

“고갱, 지금 뭘 그리는 거예요?” ‘아레오이의 씨앗’. 1892년 작품.
“고갱, 지금 뭘 그리는 거예요?” ‘아레오이의 씨앗’. 1892년 작품.

파리의 반응은 타히티의 뜨거움과 달라, 차갑고 건조했다. 한때 친구였던 미술 평론가들은 그의 타히티 작품을 두고 “엉터리 환상”이라고 쏘아붙였다. 고갱은 격분했으나, 그에게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그저 원주민 소녀를 탐하는 변태적 중년일 뿐이었으니까.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성병 매독과, 다리에 생겨난 종기와, 멋모르고 함께 사는 어린 이국의 소녀뿐이었다.

1895년 6월, 고갱은 다시 쾌락의 땅으로 향했다. 타히티였다. 유럽에서 맛본 좌절을 뜨거운 태양빛으로 소독하고 싶었다. 다시 도착할 당시 고갱은 47세의 아픈 중년이었다. 몸은 썩고 있었지만, 성적 욕구는 시들거나 상하지 않아서 또다시 14세 소녀 ‘파푸라’를 동거인으로 들였다. 파푸라가 아들을 출산한 해 대작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그렸다.

폴 고갱의 작품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폴 고갱의 작품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오염되는 타히티를 견디지 못한 고갱

타히티는 프랑스화되고 있었다. 고갱이 끔찍이도 싫어하던 것들이었다. 유럽의 교회와 건축물과 옷과 음식을 피해 고갱은 더 깊은 섬으로 떠났다. 아내 파후라와 아이를 두고서였다. 새로 정착한 마르키즈 제도에서 그는 14살 소녀를 아내로 삼았다. 통나무집을 짓고는 ‘기쁨의집’(Maison du Jouir)으로 이름 붙였다.

소박맞히고, 골려대고, 벌주던 프랑스에 고갱은 조롱으로 저항했다. 현지 주교를 모델 삼아 추잡한 노인으로 묘사한 그림(‘음란한 신부’)을 그리기도 했다. 식민 당국은 선동 혐의로 그를 감옥에 넣었다. 형 집행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숨을 거뒀다. ‘심장마비’라는 보고가 있었지만, 성병인 매독 때문이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원주민 여성을 향한 지독한 성적 욕구가 그를 집어삼켰다. 성욕은 그의 몸을 썩게 만들면서도, 기어이 비료가 되어 예술로 꽃피운 역설이었다.

‘노란 그리스도와 폴 고갱’.
‘노란 그리스도와 폴 고갱’.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히바오아 섬의 폴 고갱 무덤. [사진출처=콜린 카네기]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히바오아 섬의 폴 고갱 무덤. [사진출처=콜린 카네기]

<네줄요약>

ㅇ폴 고갱은 주식 중개인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다가 공황을 맞아 전업 화가로 나섰다.

ㅇ제법 좋은 평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어려움을 겪으면서 어릴 때부터 동경하던 원시의 나라로 떠났다.

ㅇ그곳에서 현지 소녀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는 수 많은 작품을 그려냈다.

ㅇ생전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로 타히티에서 죽음을 맞았지만, 사후 고갱은 전설이 됐다.

역사(史)에 색(色)을 더하는 콘텐츠 사색(史色)입니다. 역사 속 외설과 지식의 경계를 명랑히 넘나듭니다. 가끔은 ‘낚시성 제목’으로 알찬 지식을 전달합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해주세요. 격주 주말 알롱달롱한 역사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