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화랑 가고시안 서울
용산 APMA 캐비닛서 개최

“밤은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드는 힘이다. 아이들은 꿈을 꾸고, 죄수들은 달아난다.”
벨기에 출신 작가 헤롤드 앤카트는 어둡고 고요한 밤의 풍경이 너무 내밀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내면과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 밤에는 사물의 경계가 모호하고, 변화를 감지하기도 어렵다. 그의 신작 회화 ‘Sleeping Tree’(2025)에서는 나무의 짙푸른색 잎사귀들은 검붉은 밤하늘에 물들고 있는 듯하지만, 아래 땅에는 색색의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라 마치 나무가 이들을 환하게 비추는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모순적이고, 걷잡을 수 없는 감정들을 형상화한 것일까.
미국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헤롤드 앤카트의 한국 첫 개인전 ‘좋은 밤(Good Night)’이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APMA)의 프로젝트 공간인 캐비닛에서 오는 5월 16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는 세계 최대 규모의 글로벌 화랑으로 꼽히는 가고시안이 서울에서 선보이는 두 번째 전시로, 앤카트의 회화 신작 5점을 소개한다. 아직 한국에 별도의 전시공간을 두고 있지 않은 가고시안은 지난해 9월 같은 장소에서 미국작가 데릭 애덤스의 개인전을 열면서 서울에서 전시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전시명인 ‘좋은 밤’은 밤에 대한 작가의 탐구 정신과 평소 푸른색을 즐겨 사용하는 작가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다. 앤카트는 “사실 실제 밤의 풍경을 그렸다기보다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 푸른색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회로 밤의 풍경을 활용한 것에 가깝다”며 “무엇을 그리느냐보다는 어떤 관점에서 그것을 해석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앤카트가 그린 몽환적인 분위기의 밤 풍경은 구상과 추상, 현실과 초현실을 넘나든다. 또 다른 전시작 ‘Good Night’(2024)에서는 건물 밖 나무에 핀 분홍색 꽃과 열린 창문을 통해 보이는 건물 안쪽 벽의 풍경화가 원근감 없이 나란히 배치됐다. 또 누군가 캔버스에 실수로 물감을 떨어뜨린 듯한 푸른색 얼룩이 화면 곳곳에 나타나는데, 이는 그림 속 풍경이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산물임을 상기시킨다.
앤카트는 관람객들이 작품을 보면서 각자의 내면과 마주하길 바란다고 했다. 그가 전시장 안쪽의 모든 벽에 두꺼운 커튼을 쳐서 좀 더 내밀한 공간으로 만들자고 제안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앤카트는 “완성된 회화 작품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누군가의 눈길을 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저의 경우 본능적으로 수평선과 나무, 꽃, 하늘, 구름, 별 등에 이끌리는 편이라 작품에도 이런 요소가 자주 등장한다”며 “특히 수평선은 수평선 너머의 무언가를 상상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한편 가고시안은 향후에도 서울에서 전시, 아트페어 등을 통해 한국과의 접점을 확내해나갈 계획이다. 이지영 가고시안 서울 디렉터는 “올해 9월에도 ‘프리즈(Frieze) 서울’ 기간에 맞춰 또 다른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며 “전시 공간만 확보되면 하반기에도 새로운 전시로 관람객들을 맞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