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고상·네뷸러상·세계환상문학상 모두 석권…SF거장 켄 리우 인터뷰
인간·기술을 나눠서 생각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 동의 못해
기술의 선악 여부 따지기 전에
인간 속성 자체를 들여다봐야
문학이란 시간을 초월한 대화
작가의 신념만 강요하면 안돼
독자에 영속적인 질문 던져야
소설가는 집을 짓는 사람일 뿐
결국 집을 채우는 것은 독자들
인간·기술을 나눠서 생각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 동의 못해
기술의 선악 여부 따지기 전에
인간 속성 자체를 들여다봐야
문학이란 시간을 초월한 대화
작가의 신념만 강요하면 안돼
독자에 영속적인 질문 던져야
소설가는 집을 짓는 사람일 뿐
결국 집을 채우는 것은 독자들

순수문학과 대항하고 때론 결합하는 장르 중 하나가 SF·판타지 소설이다. 이 계열의 작품들은 우주적인 장엄함이나 미래 기술의 아이디어에 천착하는, 흔히 공상과학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딴 세상 이야기'로 오인되곤 한다. 하지만 책을 펼쳐 차분히 들여다보면 이게 간단치가 않다. 미래 기술을 통해 인류가 직면할 현실을, 그리고 그 속의 인간 존엄을 질문하는 힘과 자장이 강렬해서다.
SF·판타지를 대표하는 3대 문학상으로는 'SF계의 노벨 문학상'으로 불리는 휴고상, 그리고 휴고상과 쌍벽을 이루는 네뷸러상, 세계환상문학상이 주로 꼽힌다. 그런데 저 3개 상의 트로피를 전부 석권한 인류사 '최초의 인간'이 있다. 미국 소설가 켄 리우(49)다.
그는 삶의 이력도 다채롭다. 책상 앞에 앉아 글쓰기만을 전업 삼는 골방의 작가가 아니다. 리우는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한 변호사이며, 마이크로소프트(MS)에서 프로그래머로도 일했고, 심지어 넷플릭스로 영상화된 소설 '삼체'를 미국에 처음 알린 최정상급 번역가이기도 하다. 지난 몇 년간 '종이 동물원'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신들은 죽임당하지 않을 것이다' '은랑전' '민들레 왕조 연대기' 등을 한국에 출간한 소설가 그를 이메일로 만났다. 대표작 '종이 동물원' 출간 직후 이뤄진 인터뷰 이후 7년 만이다.
―7년 만의 인터뷰다. 근황이 궁금하다.
▷대화를 재개할 수 있음에 감사드린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했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서 글을 사랑하는 독자들과 작가들의 마음은 여전하다고 믿는다. 최근 독자로서는 앨릭스 슈바르츠만의 소설 'The Best of All Possible Planets'를 읽었고, 작가로서는 새 소설을 집필 중이다. 머지않은 미래를 배경 삼은 스릴러인데 생성형 인공지능(AI), 유비쿼터스의 절대적인 감시, 그리고 격렬하게 변모하는 세상에서 '예술가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담은 작품이다. 창작에 완벽히 몰입하는 만족스러운 순간으로 삶을 채우고 있다.

▷나와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분들이, 나에 대해, 자신들의 도그마(신념과 확신)를 따르지 않는다고 비판할 때가 있다. 한 명의 작가이자 한 인간으로서 모든 도그마를 혐오하며, 한 가지 사상에 순응하기를 고집하는 자세를 경멸해 왔다. 난 그런 비판을 되레 긍지로 받아들여 왔다. 극렬분자들의 사랑에 기대어 생존을 도모하는 작가가 아닌, 소설 속 여러 세계에 존재하며 영속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가로 남고 싶다.
―최근작 '추모와 기도'로 작품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책 '은랑전'의 수록작인데, 인상 깊게 읽었다. 여학생 헤일리가 총기 난사로 희생되자 유족들이 딸 헤일리를 애도하는 영상을 올린다. 그런데 AI와 딥페이크로 조작된 헤일리 영상이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죽은 헤일리가 음란물 사이트에서 검색된다. 현실과 판박이다. 소설을 쓸 때 '지금, 여기'라는 현재적 요소가 자주 틈입하는지 궁금하다.
▷소설은 독자와의 대화이며, 난 그 대화가 여러 겹에서 또 여러 층위에서 진행되길 원한다. 소설을 쓰고 읽을 때 가시적인 첫 대화는 물론 '현재적인' 물음과 응답에서 출발한다. 이야기는 반드시 현재의 삶으로부터 배태되기에 존재하는 것 자체의 걱정과 불안이 포함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소설은 더 높은 층위의 대화도 가능하게 만든다. 바로, 시간을 초월해버린 대화다. 시간을 넘어서는 작품에선 덧없는 것이 영원한 것들로 바뀐다. 이 소설 '추모와 기도'는 치명적 폭력이라는 끔찍한 역병(인터넷 트롤링)에 대처할 능력조차 없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겨냥했지만, 동시에 인간의 기억에 관한 넓은 차원의 주제도 담겨 있다. '망자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란 보편적인 주제 말이다. 작가는 저 '두 대화'를 동시적으로 펼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다른 소설 '비잔티움 엠퍼시움'은 난민 기부 플랫폼을 둘러싼 첨예한 갈등을 다룬 작품이다. 난민이 겪는 진짜 고통을 시각, 청각, 심지어 후각으로도 경험 가능한 신형 기계('몰입 체험 슈트')가 개발되자 국제기부단체는 저 슈트를 이용해 세상 사람들의 동정심을 자극한 뒤 기부금 규모를 극대화하려 한다. '고통의 상품화'를 위한 전략이다. 그러나 반대파는 블록체인 기술을 통해 국제기부단체를 '거치지 않는' 난민에의 직접 기부, 즉 수수료 없는 송금에 가까운 기부문화를 확산시키며 저 단체를 절멸시키려 한다. 이 역시 현재적인 문제다.
▷수천 년간 인류는 주어진 현실에 대한 '합의'를 구축하려는 싸움을 이어왔다. 이 소설의 경우 '난민이 처한 현실'에 대한 인식적 합의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어떤가? 가짜뉴스, 생성형 AI, 음모론이 만연하다 보니 우리가 아는 현실이 과연 무엇인지, 어떠한지조차 합의해내지 못하고 있다. 현대 민주주의와 전 세계 시민사회가 직면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저 '합의의 불가능성'이다. 블록체인과 같은 분산 네크워크에선 신뢰할 수 없는 환경에 관한 합의 도출이 꼭 필요하다. 인류가 종(種)으로서 생존하려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소설은 그런 마음으로 쓴 것이다.
―당신의 소설엔 진보적인 기술로 인해 임계치를 넘어버린 세상, 그리고 그 안에 속한 인간의 흔들리는 표정이 자세하다. 정작 맞닥뜨렸을 때 해답이 없는 세상을 그들은 바라보고 있고, 독자는 저들의 표정으로부터 자신의 미래를 본다. 첨단 기술의 발전이 현실 속 인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까.
▷난 인간과 기술을 갈라치기하며 이분법적으로 구획하려는 시선에 반대한다. 언어, 기계, 수학, 컴퓨터, 로켓, 정치체계, 경제체계, 사상, 종교, 이야기, 농담, 도구 등은 모두 인간 본성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우리가 벌집이나 비버가 만든 물막이를 깊이 이해하지 않고는 벌이나 비버란 존재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로, 우리는 인간의 기술과 인간의 기예를 이해해야만 인간이라는 존재를 논의할 수 있다. 이런 라틴어 문장도 있지 않은가. "아르스 후마나 나투라 후마나(Ars humana natura humana·인간의 기예는 곧 인간의 본성이란 뜻)."
―이제 식상한 질문이겠지만, 당신은 한 인간이 한 생에서 갖기 어려운 직업을 여럿 가졌다. 변호사이며, 프로그래머였고, 번역가다. 복수의 직업에 따른 각각의 정체성이 다른 정체성과 삼투하진 않는지, 또 여러 정체성 위에서 쌓아 올리는 글쓰기 과정에서 멀미가 나진 않는지 궁금하다.
▷아시다시피 난 변호사이기도 하다. 법조인은 로고스(이성), 파토스(감정), 에토스(신뢰)를 활용하는 수사학의 대가들인데, 이들이 쓰는 '기능적인' 글쓰기는 메시지와 목표가 뚜렷하다. 의도한 결론에 도달하도록 다른 가능성을 '제거'하면서 특정한 방향으로 향하는 글쓰기다. 반면 내가 작가로서 쓰는 글, 즉 '예술적인' 글쓰기는 앞서 말한 기능적인 글쓰기와 다르다. 좋은 이야기는 해석의 가능성과 상상력을 확장하며, 독자가 새로운 길과 방향을 발견하도록 초대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다시 말해 읽을 가치가 있는 이야기에는 명확한 메시지나 목표가 없다는 말이다.
―당신의 소설도 선악이 불분명하다. 절대적 악을 상정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절대적 선도 없다. 그러나 발표하는 소설마다 비판과 고민의 방향성은 뚜렷해 보인다.
▷'이것은 나쁜 일이며, 우리는 이런 일을 해선 안 된다'는 비판을 위해 소설을 쓰진 않는다. 한 가지 문장으로 요약과 압축이 가능한 문학은 읽어볼 가치가 없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내 유일한 관심사는 '진실'이다. 진실이란 하나의 '입장'으로 드러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당신의 본업은 아마도 한 세상의 미래를 창조하는 SF소설가다. SF소설가는 미래의 기술을 상상하기에 적합한 직업이며, 당신은 그 상상력의 최전선에 위치해 있다. 미래 기술이 허락할 세상은 낙관적일까, 아니면 부정적일까.
▷'우리 기술이 선한가 혹은 악한가'라는 질문은 사실 '우리 본성이 선한가 혹은 악한가'라는 질문과 같다.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 이후 철학자, 과학자 그리고 예술가는 기술의 선악에 관한 질문을 놓고 깊이 논의해 왔다. 따라서 이 논의 자체는 흥미로울 게 없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인류가 기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난 미래가 우리 모두에게 달렸다고 믿는다.
―앞서 '창조'란 단어를 썼다. 당신은 과거 글에서 "좋은 이야기는 텅 빈 집이며, 울타리가 없는 정원"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당신의 문장을 빌린다면 소설가는 결국 창조하는 건축가란 은유가 가능할 것이다. 좀 더 나아간다면 소설가는 집을 세우는 건축가를 넘어 '세계를 짓는 신(神)'으로 비유될 수 있다. 소설가를 신으로 보는 관점에 대해 동의하는지 궁금하다.
▷어떤 의미에서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등장인물과 세계 속에 거주하는 절대적 신과 같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 역시 신이 아닌, 필멸자에 불과하다. 집, 즉 소설이라는 텍스트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특정한 관점과 그 안에서 살아갈 삶의 형태를 반영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분명하게도, 그 집에 들어가 삶을 일궈가는 것이 그 작가가 아니라 그 텍스트를 읽고 있는 독자라는 점이다.
―당신의 글이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은 어디서 올까.
▷우리는 우리가 동의하는 프로파간다적인 글을 읽고 싶어 하지만, 그것이 좋은 예술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요약되거나 압축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난 쓰려 한다. 소설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반영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며,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담고자 했던 게 소설가로서의 나의 의도였다. 소설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답이 없는 영원한 질문들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고민하는지를 포착하는 것이다.
―소설이란 작가와 독자가 서로 소통하는 공간에서의 대화다. 그런데 이런 소통이 이뤄지기 위해선, 먼저 작가가 자기만의 외로운 방, 즉 골방에 갇혀 있어야만 한다. 당신이 머무는 골방의 풍경이 궁금하다. 글을 쓰는 순간 당신의 정신적인 골방은 어떤 풍경으로 채워지는지.
▷글을 쓰는 동안 난 내가 만든 캐릭터와 함께 그 세계 속에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화성이든 고대 로마든, 또는 SIO-21 은하 어디쯤의 소행성을 유영할 때도 있다. 소설가로서 나는 마치 또 하나의 삶을 살아본 것만 같다. 난 당신에게 되묻고 싶다. 이 세상에서 이토록 마법 같은 경험이 가능한 직업이 또 있는지를. 난 정말 축복받은 사람이다.
켄 리우 작가는
1976년 중국 간쑤성 출신으로 11세 때 미국으로 이주했다. 하버드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마이크로소프트 프로그래머로 일했으며, 이후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로 7년간 일했다. 2002년 소설을 본격 쓰기 시작해 '종이 동물원'으로 휴고상, 네뷸러상, 세계환상문학상을 모두 받은 최초의 작가로 기록됐다.
[김유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