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단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지만, 정작 그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쓰곤 합니다. 고학력과 스마트 기기가 일상화된 시대에, ‘문해력 감소’라는 ‘글 읽는 까막눈 현상’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습니다. 단어는 사물과 현상의 특성을 가장 핵심적으로 축약한 기초개념입니다. 우리는 단어의 뜻을 찾아가면서, 지식의 본질과 핵심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의 학업성취도와 학교를 떠난 이들의 지식 인싸력도 레벨업됩니다.
[Prologue] 우연한 행운(serendipity)
여행은 기회비용과 매몰비용 사이의 곡예입니다. 즐길 체험과 얻을 추억에 대한 설렘으로 계획을 짜지만, 투입할 경비와 시간으로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을 비교하며 망설입니다.
여행 중에도 ‘온 김에’와 ‘이 돈이면’ 사이에서 고민합니다. 여기까지 온 김에, 볼거리와 먹을거리에 더 투자해 잊지 못할 추억을 기억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반대로 아낌없이 아껴서, 그 자산으로 다른 소망의 실현을 시작하는 상황도 그려 봅니다. 여러 차례 시뮬레이션을 반복하며 선택을 내리는 과정은, 서커스의 줄타기 같습니다. 어떤 판단을 하든,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면, 그 여행은 추락합니다. 기대했던 여운은 부상의 여파로 전락합니다.
우연히 여행 동행 제안을 보았습니다. 낯선 이름이 타이틀로 걸린 사진전인데, 세상 곳곳을 돌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뭔가 알 듯 모르겠는 키워드에 상상과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그리고 검색을 시작합니다.
궁금증이 기대감으로 자라납니다. 이번 여행은 망설일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시간과 비용에 대한 부담감 없이, 다채로운 세상 곳곳을 여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대단한 우연이 되길, 우연한 행운이 되길.
세렌디피티(serendipity)는 ‘행복하고 예기치 않은 발견을 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페르시아의 설화 ‘세렌디프의 세 왕자’에서 온 말입니다.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그들이 찾고 있지 않은 것들을 우연과 통찰력으로 발견하곤 했답니다. ‘Serendip’는 스리랑카(Sri Lank)의 옛 이름으로, 산스크리트어 단어인 ‘Simhaladvipa’는 ‘사자들이 사는 섬’을 의미합니다.
1월 24일 금요일, 열흘 가까운 명절 연휴를 앞둔 사무실은 분주한 듯 느슨합니다. ‘두 시에는 마치려나? 혹시 연휴가 기니까 정상 근무 다 하는 거 아냐? 그러면 사진전 모임 시작하는 네 시까지 도착 불가능인데… 생각이 많아집니다.
불현듯 2001년 무렵 갔던 퓰리처상 수상작 사진전이 떠오릅니다. ‘베트남전 당시의 즉결 처형’, ‘네이팜탄 폭격을 피해 달아나는 소녀’, ‘굶주림에 시달리며 졸고 있는 소녀가 쓰러지기를 기다리는 독수리’처럼 참혹한 시대상을 고발하는 강렬한 모습들만 기억납니다. 사진이 예술일까 의문이 듭니다.
사진(寫眞). 한자로 ‘베낄 사’에 ‘참 진’자를 씁니다. ‘보이는 실제를 똑같이 그리다’라는 의미입니다. 영어로는 ‘photograph’, 즉 ‘빛으로 쓴 세상’입니다. ‘빛에 비친 세상을 설명한 모습’, 혹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담은 빛’이라는 뜻으로 유추해 봅니다. ‘포토(photo)’는 빛입니다. 전략 게임 ‘스타크래프트’에 등장하는 프로토스(Protoss) 종족의 공격 건축물 ‘photon cannon’도 ‘광자포(光子砲’)입니다. 카메라(camera)는 ‘빛이 닿은 세상 모습을 담는 방’입니다. ‘camera obscura(방 + 어두운)’에서 온 말로 챔버(chamber)와 뿌리가 같습니다.
사진은 소수의 생각과 개념을, 다수에게 쉽고 폭넓게 공유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래서 커뮤니케이터들은 다양한 자료와 작품에 사진을 활용합니다. 대중에게 낯선 분야를 설명하는 데, 익숙한 것들을 더 명확히 보여주는 데, 사진은 최고의 도우미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모든 곳에 사진을 끼워넣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가슴 속 느낌을 공유하려고, 적당한 사진을 찾는 데 골몰해 왔습니다.
어느 순간, 매몰돼 가고 있단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진은 손쉽게 상상하도록 돕는 동시에, 독특하게 상상할 수 없도록 가로막기도 합니다. 그 이상 더 많이 머릿속에 그리던 즐거움은, 그려진 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합니다. 소설 ‘플란더스의 개’는 만화영화 속 네로와 파트라슈의 이야기보다 다채롭고 애틋했습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 키팅 선생님의 이야기도 영상보다 글 속에서 더 감동적이었습니다.
물론 사진과 영상의 순기능은 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광활합니다. 그저 오랜만에 글을 쓰려다가, 사진 갤러리부터 뒤적대는 내 모습에 뭔가 공허했을 뿐입니다. 상상하는 즐거움을 잊고 사는 듯 느꼈을 뿐입니다.
*상상(想像: 생각할 상, 모습 상): 머릿속, 마음속으로 떠올리는 모습
“대표님이 갈 사람 다 가시랍니다.”
퇴근에 진실한 입사 3년차 후배가,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이야기합니다. 전생에 마라톤 벌판을 달렸던 전령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42.195km를 달려가 “퇴근하시랍니다!”를 외치고 쓰러지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3시 10분, 시작까지 남은 시간 50분. 담배 한 모금에 물 한 잔 마실 시간은 충분하지만,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전시장 입구 [말록이네]](https://pimg.mk.co.kr/news/cms/202502/14/news-p.v1.20250207.ed0266606c224391b904c3d1a071037c_P1.jpg)
전시장 입구에서 길벗분들과 조우합니다.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넵니다. 사람 대하는 일을 오랫동안 해오다 보니, 첫 인사는 제게 꽤 자연스럽습니다. 수줍고 어색한 인사야말로 사람을 더 진솔하게 조명해 주는 필터 같단 생각이 스칩니다. 난 때묻고 얼룩진 녀석인가 자문해 봅니다.
![웨스 앤더슨 [출처: 네이버]](https://pimg.mk.co.kr/news/cms/202502/14/news-p.v1.20250207.37e57ae50d614f6bb83adc0a9004e167_P1.jpg)
전시회 제목은 ‘우연히 웨스 앤더슨 2’입니다. 타이틀의 ‘웨스 앤더슨(Wes Anderson: Wesley Wales Anderson)’은 미국인 영화감독입니다. 1969년에 태어나, 90년대 중반부터 영화 연출을 시작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같은 작품을 창조했습니다. 그의 작품들에는 사물과 공간의 좌우대칭과 파스텔톤 색감이 트레이드 지문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웨스는 ‘미장센의 대가’라고도 불리죠. *영화나 연극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 ‘미장센(mise-en-scène)’은 ‘장면(scène) 속(en) 배치(mise)’를 뜻합니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출처:네이버]](https://pimg.mk.co.kr/news/cms/202502/14/news-p.v1.20250207.9f305c9ba69e48bb819e051fe5286737_P1.jpg)
‘우연히 웨스 앤더슨(Accidentally Wes Anderson)’은, 웨스 앤더슨이 기획하지 않았습니다. 2017년 여행가 부부인 윌리 코발과 어맨다 코발이 여행 계획을 구상하다가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우연히 마주한,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에 나올 듯한 장소’를 사진에 담아, 인스타그램 채널에 게시하기 시작한 거죠. 신선한 주제와 흥미로운 사진에 많은 이들이 응원했고, 전 세계 팔로워들이 자신들이 찍은 사진을 공유하며, 전시회와 도서 출간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비대칭을 찾아내고 말 테야!’
아, 겨울잠에 푹 빠졌던 똘기가 갑자기 기상했습니다. 이상한 데 매몰돼서 본질을 망각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듭니다. 요 녀석 살살 달래서 자장자장 재워야 합니다. 그렇게 첫 번째 공간에 발을 디딥니다.
“부페 가면 김밥 조심해야 돼요.”
국민학교 4학년 때 담임 형국 씨가 강조했던 말입니다.
“부페에 가면 맛있는 음식들이 참 많아요. 보통 맨 앞에는 여러분이 좋아하는 김밥이나 불고기 같은 것들이 있는데, 여기 넘어가면 안 돼요. 뒤로 가면 갈수록 아직 구경도 못 해본 팔보채나 회, 스테이크 같은 귀한 음식들이 즐비해요. 그런데 김밥이나 불고기로 배 채우면 돼요, 안 돼요?”
지식, 학습법, 양심 같은 데서 존경할 점을 찾긴 버거웠지만, 이 말만큼은 평생 기억합니다. 실제로 그는 학부모와의 부패가 드러나 징계를 받고 다른 지역으로 전근 갔습니다. 의문의 일격을 당한 그 지역 학생들과 학부모에게 심심한 위로를 표합니다. 아, 이게 아닌데…
잘 차려진 부페식단처럼 볼거리가 많은 장시간 전시회를 가기 전에는, 미리 프로그램을 읽고 코스를 정해야 망설임과 후회가 적습니다. 초반에 과도한 몰입으로 에너지를 쏟아내면, 나중에 정말 멋진 작품 앞에서 소 닭 보듯 지나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전시회 제목이 “어쩌다 웨스 앤더슨”입니다. 발길 닿은 대로, 눈길 끌리는 대로 가보자는 생각이 듭니다. 작품들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며, 상상의 창고를 채워야겠다는 포부를 다집니다. 비대칭 구도 사진도 찾고 작품 설명도 꼼꼼하게 읽어나갑니다.
그런데 설명글 글씨가 너무 작습니다. 저처럼 눈이 낡아버린 아저씨가 보려면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습니다. 피로감이 엑셀러레이터를 밟아 제곱그래프로 누적됩니다. 입장한 지 불과 20분 만에 퍼져버렸습니다. 저 너머 어딘가에 난자완스와 안심스테이크가 있을 텐데, 김밥만 실컷 먹다 지쳐버렸습니다. 갑자기 머릿속에 부페교사 형국 씨가 나타납니다.
“쯧쯧쯧, 생각이란 걸 좀 해보세요. 니가 부페 주인이면, 비싸고 맛있는 걸 입구에 놓겠어요?”
“꺼져, 뷔정뷔패!”
옆에서 관람하던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성들이 수근댑니다.
“저 아저씨 이상해.”, “우리 다른 데로 가자”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전시회 사진들 [말록이네]](https://pimg.mk.co.kr/news/cms/202502/14/news-p.v1.20250207.b337c75e670c4b46bac7b8d2c34b4066_P1.jpg)
굳이 모든 요소에 다 집중하지 않기로 맘먹습니다. 힘을 빼니(사실은 빠지니) 긴장감이 이완되고 마음도 가벼워집니다.중요한 건 대칭구도와 파스텔톤이 아니었습니다. 가보지 못한 세계 곳곳의 풍광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쁨입니다. 우리나라, 중국, 일본, 태국 같은 아시아국가부터 중동의 아랍에미리트와 이집트, 유럽의 그리스, 이탈리아, 스위스, 아일랜드, 아이슬랜드, 아메리카 대륙의 다양한 나라들의 여행지들을 눈에 담습니다.
사진에는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장소들도 있고, 작가부부가 네바다와 안타티카(남극)에 애정이 가득하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사진 설명이 작품 바로 아래가 아니라 옆쪽이나 멀찍이 떨어져 있던 이유는, 다른 이들의 관람에 불편을 주지 말라는 배려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웨스 앤더슨이 사랑하는 구도로 세계 곳곳을 촬영하며, 환호하고 기뻐했을 여행자들의 표정도 상상해 봅니다.
![전시장 풍경 [말록이네]](https://pimg.mk.co.kr/news/cms/202502/14/news-p.v1.20250207.7860c1c4695c4f62b2a2aaeb88d80c0e_P1.jpg)
전시공간도 인상깊습니다. 조명과 벽면의 색조가 사진을 더 돋보이게 만들어 주는 듯합니다. 코스 사이에 창을 내고 공간을 테마별로 분리한 컬러존도 신선합니다. 하지만 이미 체력이 고갈되어, 빨리 이 길이 끝나기를 고대합니다.
![여행 독려글들 [말록이네]](https://pimg.mk.co.kr/news/cms/202502/14/news-p.v1.20250207.cd2f780060684e428931226fd08f02b7_P1.jpg)
새로운 테마를 만날 때마다 여행을 독려하는 문구가 보입니다. ‘즐거움은 컴퓨터앞이 아니라 파란 하늘 아래서 펼쳐진다’, ‘일단 떠나자’,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또 다른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 때로는 잔잔한 울림으로, 때로는 강렬한 충동으로 다가옵니다.
여행을 의미하는 영단어 ‘travel’은 뜻밖에도 ‘힘들게 일하다, 노동하다’를 뜻하는 고대 프랑스어 ‘travailler’에서 왔습니다. 이 말은 라틴어로 ‘고문하다’란 뜻의 ‘tripaliare’에서 유래했는데, 고문도구였던 ‘세 개의 말뚝(tripalis: tria + palus)’에서 파생됐다고 하죠. 도로도 없고 탈것도 마땅찮던 중세시대에, 먼 곳으로 떠나는 건 고문만큼 고단한 일이어서 파생된 말인가 봅니다.
한자어 ‘여행(旅行)’은 ‘나그네 려(旅)’자와 ‘갈 행(行)’자로 이뤄졌는데, ‘나그네 려’자는 본래 군사를 의미했습니다. 군사들이 훈련이나 전투에 나가면 오랜 기간 객지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말이 길 떠나는 ‘나그네’와 즐거운 ‘여행’으로 의미가 확장되었습니다. 유럽이나 아시아나 ‘먼 길 가는 고단하고 빡센 활동’에서 시작되었다니, 신기합니다.
전시장을 나와, 마치 직접 지구촌 곳곳을 다녀온 듯한 풍요로운 마음이 듭니다. 심지어 80일 간의 세계일주라도 다녀온 것 같은 피로감도 듭니다. 갑자기 어디든 떠나고 싶어집니다. 나 자신에게 여행을 선물하고 싶어집니다. 함께하는 공감, 혼자만의 사색, 모두 기쁘고 의미 있을 겁니다. 올해에는 꼭 그리스에 가보겠단 마음이 일렁입니다. 우연히 웨스 앤더슨을 만나, 운 좋게 여행의 풍요로움을 배우고 말았습니다. 완전 럭키 비키잖아~ (그런데 경비는 어쩔?)
![전시회 사진 [말록이네]](https://pimg.mk.co.kr/news/cms/202502/14/news-p.v1.20250207.1191b013a1e04959ba7757a217dafedd_P1.png)
*감수: 안희돈 교수(건국대 영어영문학과). 건국대 다언어다문화연구소 소장. 전 한국언어학회 회장
[필자 소개]
말록 홈즈. 어원 연구가/작가/커뮤니케이터/크리에이터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23년째 활동 중. 기자들이 손꼽는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는 커뮤니케이터. 회사와 제품 소개에 멀티랭귀지 어원풀이를 적극적으로 활용. 어원풀이와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융합해, 기업 유튜브 영상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