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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외칼럼

[김시덕의 도시 발견] 역경 이겨낸 칠전팔기 마을

입력 : 
2025-02-14 17: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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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시는 중원고구려비와 입석마을을 통해 역사와 시민의 관계를 재조명하고 있다.

입석마을은 홍수 피해를 극복하는 과정 속에서 '칠전팔기의 마을'로 알려지게 되었고, 주민들이 비석을 지켜온 덕분에 중원고구려비의 발견이 가능했다.

오늘날 많은 방문객이 중원고구려비를 보러 오지만, 마을 사람들의 역사적인 삶과 의의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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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 피해 늘 큰 충주 입석마을
수해 안전한 동네로 재건한 후
'칠전팔기의 마을'로 이름 붙여
비석있어 입석마을로 불렸지만
추후에 중원고구려비로 밝혀져
가치 몰라도 정성껏 돌본 주민과
칠전팔기 노력이 이 지역의 가치
사진설명
오늘은 충주의 중원고구려비 그리고 이 비석이 자리한 중앙탑면 용전리 입석마을을 통해 시민과 역사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충주시는 남한강을 통해 서해와 이어져 있다. 육지를 통한 교통이 불편하던 전근대에는 큰 강이 오늘날의 고속도로와 같은 기능을 했다. 그래서 충주는 남한강 수운의 중심지로서 번성했고, 충주는 한때 충청도에서 가장 큰 도시 축에 들어갔다. 충청도라는 이름 자체가 충주와 청주의 앞 글자를 따서 생긴 이름이다.

이렇게 번성하던 충주가 근대 들어 경부선이 놓이고 경부선 가까운 곳인 청주로 도청소재지가 옮겨가면서 쇠락하기 시작한다. 철도는 강을 통한 하운과 경쟁 관계인 경우가 많아 충주와 서울을 잇던 하운도 쇠락했다. 그리고 1986년에 충주댐이 완공되면서 남한강이 물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다하자 충주는 교통의 요지로서의 기능을 모두 잃었다.

이렇듯 충주는 한강을 통한 하운으로 번성하기도 했지만 홍수가 일어날 때마다 피해를 보기도 했다.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 그리고 특히 1972년의 대홍수는 충주를 비롯한 남한강 유역에 큰 피해를 줬다. 홍수 피해를 극복하고 다시 마을을 건설한 역사는 이들 지역의 어디에서든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마을들 가운데 특히 중앙탑면 용전리 입석마을은 수해를 입고 극복하는 과정이 극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이 마을 사람들은 힘을 합쳐 마을의 하수구를 개조하고 논밭의 농로를 정비하고 입석교라는 다리를 놓았다. 그 사업이 매우 성공적이어서 이들은 1972년 8월 15일에 단체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런데 그 바로 나흘 뒤에 중부 지방에 홍수가 일어난 것이다. 그간 쌓아 올린 모든 성과가 물에 쓸려가 버렸다.

그간 마을 사람들의 뜻을 모아 사업을 추진해온 새마을지도자 김재문 선생은 그 충격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한 뒤에도 마을 사람들은 "새마을 때문에 망했다"며 그를 마을에서 쫓아내려는 모임을 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이 갈등들은 극복되었고, 전국에서 보내온 성금으로 홍수에서 안전한 곳에 새로이 주택 단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자기 마을을 '칠전팔기의 마을'이라 부르기로 하고 마을 초입에 비석을 세웠다.

'칠전팔기의 마을'의 원래 이름은 입석마을이다. 예전부터 마을 초입에 비석이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김재문 선생이 '땀으로 얼룩진 발자취'라는 책에 투고한 수기에 따르면 "조선왕조 때 씨족 간의 땅 경계를 위하여 세웠다는 돌이 있어 입석마을이라 불렸다"고 한다. 이 비석이 오늘날 중원고구려비 또는 충주고구려비로 알려진, 한국 안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구려 시대 비석이다. 교사, 도청 공무원, 검사 등이 뜻을 모아 조직한 예성동호회가 이 마을을 방문했다가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이 비석에서 글자를 읽어낸 것이 중원고구려비의 발견 경위다.

이 발견 과정을 전하는 여러 기사를 보면 비석의 의의를 알지 못한 마을 사람들과 비석을 해독한 지식인들을 대조적으로 그리는 설명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 비석이 무언가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마을 이름도 입석마을이라고 붙였다. 이렇게 마을 사람들이 비석을 보존해왔기 때문에 훗날 비석이 해독될 수 있었다.

비석이 발견된 뒤로 수십 년간 수많은 연구자가 달려들었어도 비석의 글자를 상당 부분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이 비석의 내용을 몰랐던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마을 사람들은 그 내용을 모르면서도 비석을 지켜온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중원고구려비 전시관의 한쪽에는, 중원고구려비 옆에 세워졌던 칠전팔기의 마을 비석이 원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곳 전시관을 찾는 사람 대부분은 중원고구려비만 보고 떠난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던 중원고구려비를 지키고, 1925년 이래 5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수재를 극복한, 칠전팔기를 실천한 마을 사람들의 삶의 모습까지 아울러 살피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유물보다 인간, 전근대의 지배집단보다 민주공화국의 시민, 민족주의보다 민주주의가 중요하다.

사진설명
[김시덕 도시문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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