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 시상식 앞두고
트라우마 불러낸 아이러니
젊은 계엄군과 시민 대치
선진국 거리에서 진풍경
탄핵이 가져올 여파 크지만
합법적 절차는 최후의 보루
탄핵 싫다면 조속한 하야를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오늘, 작가 자신도 국민도 트라우마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계엄령은 정확히 8년 전 그 혼란의 토네이도를 불러들였다. 그때 거의 반년 동안 국민은 정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경제와 안보가 허우적댔다. 주가와 환율이 곤두박질쳤고, 서민들은 경기 한파에 몸을 떨었다. 한국의 앞날이 막막했던 당시 북한의 오판을 우려한 미국 버락 오바마 정부는 인도·태평양을 관할하는 칼빈슨 핵항모를 서해로 급파했다. 그리고 오늘, 그 삼중의 먹구름이 국민을 덮치는 중이다. 야심한 시각에 ‘비상계엄령’을 발동한다는 대통령의 뜬금없는 망발이 이런 고난을 초래할 줄 대통령 자신은 몰랐을까. 계엄령을 말로만 듣던 MZ세대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계엄군은 MZ세대다. 명령에 따라 출동하긴 했는데 정작 제압할 대상은 적이 아님을 눈치챘다. 국회가 적인가? 시민이 적인가? 헬기에서 내리긴 했는데 우왕좌왕했다. 일부러 천천히 이동했다. 최고의 참수 부대가 국회에 진입했건만, 쌓아놓은 기물에 막혔고 누군가 발사한 소화기 연기에 질식한 척했다. 체포 인사 명단을 쥐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짤’ 영상과 유튜브에 친숙한 젊은 계엄군이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있겠는가? 체포했더라도 국회 현관을 통과할 수 있었을까? 국회 밖 시민들은 무장 지프를 막아섰다. 출동 부대 출신인 어느 시민은 후배를 타일렀다. ‘살살 해라, 다치면 서로 끝장이야.’ 빌딩과 카페가 즐비한 선진국 거리에서 벌어진 진풍경이었다. 담장을 넘어 진입한 국회의장이 차분하게 계엄 해제를 선포하자 계엄군은 안심한 듯 물러났다. 카메라에 목례한 계엄군도 있었다. 소란을 일으켜 죄송하다는 표시였을 것이다.
진정 반성하고 있을까? 선남선녀가 잠자리에 들 시각, 그 평온과 단잠을 깨워놓고 잘못한 거 없다고 항변하는 대통령을 어찌 이해할까. 혹시 애주가로 소문난 대통령이 술주정한 것일까. 일거수일투족이 나라 운명과 직결되는 대통령의 책무를 잊은 거다. 야당이 하도 패악을 부려 본때를 보이고 싶었다 해도, 그 방식은 법 테두리 내에서 허용된 공적 행위여야 했다. 계엄령 하나로 더불어민주당의 허물은 일시에 덮였다. 이재명의 범법 혐의를 지우려고 온 국정을 들쑤셨던 사당(私黨)적 행위와 정치적 탈선에 면죄부를 준 꼴이다. 피의자에게 판관의 칼을 넘겨줬다. 육군의 체면은 말이 아니다. 계엄군을 일종의 구사대로 전락시키고도 국군통수권자라고 할 수 있을까. 계엄군 수장들이 하나같이 발뺌을 하는 모습은 서글프기 짝이 없다. 내막을 잘 몰랐다는 계엄사령관은 포고문을 그냥 읽었다. ‘국회의 정치활동을 금한다’거나 ‘복귀하지 않은 전공의들을 처단한다’는 글귀가 어떤 후폭퐁을 가져올 것인지에 대한 인식은 제로였다. 계엄군 300여 명씩을 투입한 특수전사령관과 수도방위사령관도 어물쩍한 어투로 책임을 윗선에게 미뤘다. 육군의 자부심은 땅에 떨어졌다. 카메라에 목례를 하고 철수한 그 병사가 듬직했다.

정치학자 아담 프셰보르스키는 쿠데타와 경제 수준 간의 관계를 밝혔다. 1인당 국민소득이 6050달러 이상이면 쿠데타는 실패한다고. 1982년 발생한 스페인 군부 쿠데타는 좌초했다. 당시 스페인의 국민소득은 5680달러였다. 2024년 한국의 실질국민총소득(GNI)는 3만6194달러, 세계 30위로 계엄령이든 내란이든 그 범위를 훨씬 넘어섰다. 최신식 빌딩과 카페와 쇼핑몰과 캐럴이 한데 어우러진 거리에 탱크가 진입하는 그 생뚱맞은 풍경을 상상해보라. 대통령의 울분과 그 서슬에 짓눌린 내각은 이런 상상의 리허설조차 못했다. ‘대통령의 울화가 너무 세서 말릴 수 없었다’고? 책임을 다하지 못한 채로 내각은 일괄 사의를 표명했다. 성깔 못 참는 대통령에 이토록 무책임한 내각이라니! 드러눕지는 못할망정, 대통령의 옷자락이라도 붙잡고 하소연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대통령은 정말 성공할 것이라고 믿었을까? 요즘 그 흔한 챗GPT가 이런 답을 줬을 것이다. ‘성공 확률은 마이너스, 자폭하려면 하세요’라고.
일본 연구자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에서 기리(義理)와 기무(義務)가 자주 충돌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모두 보은의 개념인데, 의리는 ‘우리 집단’(we-group), 의무는 공적 대의(大義)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의리는 파당적 보은 행위이고, 의무는 국민적 공익에 헌신하는 도덕적 심성이다. 12월 3일 밤, 대통령이 계엄령을 발령했다. 국군통수권자의 직접 명령을 받은 소수 국군 수뇌부들은 의리와 의무 사이를 오락가락했을 것이다. 그러다 발뺌을 택했다. 국민의힘은? 국회 이탈을 택했다. 국회의장이 4시간 말미를 줬다.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이탈표가 나올까 자신이 없었던 거다. 서울역까지 갔던 젊은 김상욱의원이 겨우 돌아와 부표를 던지고 주저앉았다. 반대표를 던졌지만, ‘대통령 자격을 상실했다’고 울먹였다. 자리를 박차고 나간 국민의힘은 대통령에 대한 의리만 중시했을 뿐이다.
이런 사태를 몰고 온 막중한 책임에서 민주당도 면책 대상이 아니다. 윤석열 정권 2년7개월 동안 민주당은 국민과 민생을 항상 앞세웠지만 내심은 권력을 끌어내리는 것에 집중됐다. 지난 총선에서 거야(巨野)로 등극한 이후 정권과 샅바 싸움을 한 것 외에 어떤 희망적 메시지를 주었는지 기억이 없다. 정권을 쓰러뜨리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이재명 주변 인물 중 5명이 극단적 행위로 항변했건만 무위였다. 피의자 혐의를 벗겨내는 데 집중한 정치 행태는 ‘의리’ 그 자체였다. 국회의원들이 앞장서 퍼부은 욕설 속에 정책 법안은 실종됐다. 시민들은 탄핵 남발에 이골이 났다. 검사, 감사원장, 장관이 탄핵 리스트에 올랐다. 이게 정상인가? 어제, 민주당은 예산안 7000억원을 더 삭감했고, 추가 삭감을 예고한 상태다. 시민적 공익을 향한 고뇌는 읽을 수 없다. 국민적 의무, 대의(大義)는 어디로 갔는가?

국민의힘의 이탈은 법치의 마지막 선을 무너뜨렸다. 이재명에게 양탄자를 깔아준다는 국민의힘의 우려는 다음 사안이다. 법치의 요체는 절차 준수다. 이재명, 조국에 대한 판결이 줄줄이 대기한 마당에 판 자체를 뒤엎은 대통령의 행위도 그렇거니와 무조건 탄핵만을 외치는 야당도 전략적 사고에 매몰됐다. 예치(禮治)가 소멸된 한국 정치는 법치(法治) 자락을 붙잡고 겨우 항해 중인데, 파당적 이익에 눈먼 여야 정당에 어떤 희망이 있을까. 수세에 몰린 여당은 한술 더 떴다. 대통령의 계엄령 강행과 국민의힘의 국회 이탈은 헌법 위반 일란성 쌍생아이자 국민 의사를 짓밟은 무책임의 동형 구조다. 그런데 국민의힘이 고심 끝에 내놓은 사후 대안이란 게 고작 ‘위임 통치’였다.
국민이 허락해준 적이 없고, 허락한다 해도 위헌이다. 민주당의 전략적 저의를 감안하더라도, 우선 절차를 지키라는 국회의장의 지적은 백번 맞는 말이다. 민주주의는 허점이 많은 제도다. 다수의 횡포, 그것도 무지한 다수의 횡포를 막을 도리가 없다. 오죽했으면 19세기 정치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정치 참여 자격증을 발행해야 한다고 했을까. 무지한 자들의 침입을 허락한 한국 민주주의를 그나마 지키려면 절차라도 준수해야 할 소치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 가드레일이다. 계엄령이 민주주의의 가드레일을 부쉈다면, ‘총리와 여당 위임’ 역시 무면허 운전이다. 벌써 계엄령 수사를 두고 검찰, 경찰, 공수처가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그 내부에는 여당과 야당의 ‘의리’와 연결된 파당들의 거래가 은밀하게 작동한다. 현장을 밀착 취재하는 언론과 방송조차 일일이 알아내기 어렵다. 탄핵소추 절차를 통과하는 것이 우선이다.
한국 정치가 비정상의 무한 충돌임은 삼척동자도 아는 바다. 여야 정당은 물론 대통령마저 비정상임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비정상의 무한 충돌, 사생결단식 권력 투쟁은 윤석열 정권의 태생적 운명에서 발원했다. 그것을 벗어나기를 희미하게나마 갈구했다. 부질없는 짓이다. 다급한 것은 경제와 안보다. 외국 정상들의 방한이 줄줄이 취소됐다. 그간 정치와 경제가 뒤섞이는 것을 방어했던 안전 구간이 급격히 무너졌다. 더욱이 도널드 트럼프의 전면 공세가 예고된 마당에 정치 쓰나미가 경제 영역으로 몰려들었다. 민생을 구한다는 정치권의 명분을 정치권 스스로 파괴했다. 이 엄동설한에 국민은 예고된 불안 지대로 내몰렸다.
탄핵 리스크를 모르는 바 아니다. 명백한 범죄행위에 대한 공적 정당화, 대통령이 사(私)로 공(公)을 난도질한 것을 권력 안정이라는 명분으로 감추거나 비가시성의 공간에 파묻는 행위는 한국의 미래를 어두운 시간으로 몰고 간다. 위법에 대한 처벌이 더 나쁜 악(惡)을 불러들일 것임이 명백해도 합법적 절차로 결정하는 것이 정당하다. 마지막 가드레일을 무너뜨리지 말기를 바란다. 민주당은 탄핵소추를 끝없이 반복한다고 이미 천명했다. 그게 싫다면, 대통령의 조속한 하야(下野) 결단이 답이다. 빠를수록 좋다. 거국내각 구성, 임기 단축 개헌 등은 민주당 답안에 없다. 아니면 계엄 수사로 대통령이 구속되기를 막연히 기다릴까? 힘든 시간을 준비해야 하는 서글픈 현실을 구하는 것은 ‘대의’다. 마치 한강 작가가 자신의 모든 글이 향한 곳이 ‘사랑’이라고 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