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스키, 美백악관서 수모
과거에도 강대국들에 휘둘려
자주국방 대신 외세의존 탓
나토가입 앞서 自强노력부터
과거에도 강대국들에 휘둘려
자주국방 대신 외세의존 탓
나토가입 앞서 自强노력부터

그러나 10년이 넘은 지금, 우크라이나는 전쟁으로 국가 존망마저 걱정할 처지가 됐다. 얼마 전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당신에겐 카드가 없다"며 겁박하는 장면을 그 청년이 봤다면 나아지지 않은 조국의 신세를 한탄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겪는 수모와 위기는 과거 수차례 강대국들에 휘둘렸던 경험을 교훈으로 삼지 못한 탓이다. 자주국방 대신 외세에 의존해온 자업자득의 결과다.
우크라이나인들의 선조 격인 코사크 집단은 1654년 로마노프 왕조와 '페레야슬라프 협정'을 맺고 러시아의 지배를 택했다. 서부 강자인 폴란드보다는 같은 슬라브 형제국이 낫다고 판단했지만 패착이었다. 협정 체결 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를 강압 통치했다. 이에 러시아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과 북방전쟁(1700~1721년)을 벌이자 코사크는 스웨덴이 이기면 독립시켜준다는 약속을 믿고 협력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승리하자 코사크는 변절자로 낙인찍혀 오랫동안 핍박을 받았다.
이들이 건국을 이룬 것은 1차 세계대전 중으로, 러시아 혁명의 혼란을 틈타 최초 민족국가인 '우크라이나인민공화국(UNR)'을 세웠다. 군사력이 보잘것없던 UNR은 때마침 나라를 재건한 폴란드와 동맹을 맺었다. 앞서 폴란드는 3회(1772·1793·1795년)에 걸쳐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 3국 간 분할로 123년 동안 사라졌다가 1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재등장했다.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와 철천지원수였지만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에 맞서려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믿었던 폴란드가 볼셰비키와 1921년 '리가 조약'을 맺으며 배신하자 힘 없는 우크라이나는 이듬해 소련에 흡수됐다.
2차 대전 때는 다수의 서부 우크라이나인들이 독일 편에 섰다. 독소(獨蘇) 전쟁에서 나치가 승리하면 독립을 지원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이들은 소련군에 편제된 동부인들과 총부리를 겨누며 동족상잔의 비극도 겪었다. 하지만 독일은 패했고, 종전 후 소련의 위세는 미국과 자웅을 겨룰 정도로 커졌다. 스탈린은 소련군으로 싸운 우크라이나인의 공로는 무시한 채 일부가 독일군이 돼서 소련에 맞섰던 일만 문제 삼아 억압했다.
우크라이나 역사는 스스로 힘이 없어 외세에 의탁했다가 성과를 못 내는 비운이 반복돼왔다. 지금 전쟁도 서방 지원에 기댔다가 낭패에 빠졌다는 점에서 과거의 되풀이다. 1991년 소련 해체로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취약한 국방을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통해 해결하려 해왔다. 오래된 강대국 의존 행태 그대로다. 지난달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우크라이나는 외부 군사 지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어 상대 측 변심에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또 "국방산업은 비밀주의와 부패로 인해 서방의 투자와 첨단 무기 개발이 힘들다"고도 했다.
젤렌스키는 나토에 매달리기보다는 1990년대 중국 덩샤오핑처럼 '도광양회(韜光養晦)' 자세가 필요하다.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는 것인데, 러시아를 자극하는 대신 국방과 산업 등 국가경쟁력부터 높이는 게 먼저다. 17세기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 효종이 청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조용히 국방력을 다지며 북벌을 준비했던 얘기를 젤렌스키에게 들려주고 싶다.
[김병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