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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칼럼

美 정부 검열에 반대한 ‘사이버펑크’가 시초 [홍익희의 비트코인 이야기]

홍익희 칼럼니스트
입력 : 
2025-03-22 2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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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냉전 시대가 이끈 블록체인 기술 개발
블록체인 기술은 미국 정부 감시와 검열에 맞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암호 기술을 활용하고자 했던 과학자들 ‘사이버펑크’ 운동에서 비롯했다. 사진은 미국 정부가 전화와 우편물을 감시하기 위해 특정 전화번호 송수신을 모두 기록한 ‘펜 레지스터’.
블록체인 기술은 미국 정부 감시와 검열에 맞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암호 기술을 활용하고자 했던 과학자들 ‘사이버펑크’ 운동에서 비롯했다. 사진은 미국 정부가 전화와 우편물을 감시하기 위해 특정 전화번호 송수신을 모두 기록한 ‘펜 레지스터’.

이제는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긴 하지만, 인터넷은 원래는 군사용으로 개발된 기술이다. 1960년대 미국 국방부 산하 고등연구국(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ARPA)의 연구용 네트워크가 시초다.

처음 국방부는 철벽 요새를 구축한 뒤 그곳에 중앙 서버를 두고 중요 군사 정보를 중앙집중형으로 관리하려 했다. 하지만 핵미사일 등 공격을 받을 경우, 중앙 서버가 하나만 파괴되더라도 모든 시스템이 망가진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여러 곳에 서버를 분산 설치한 뒤 서로 연결하면 일부 서버가 공격당하더라도 나머지 서버들로 관리할 수 있겠다는 방안을 찾았다. 이로써 대학 4곳을 연결하는 네트워크이자 최초의 인터넷인 ‘아파넷(ARPAnet)’이 1969년에 탄생했다.

이후 여러 대학과 기업에서 아파넷을 사용하고 싶어하는 요구가 생겼다. 미 국방부는 1973년 아파넷을 군사용 ‘밀넷’과 민간용 ‘아파넷’으로 분리시켜 민간에 개방했다. 오늘날 인터넷의 시작이다. 중앙화된 정보를 ‘탈중앙화’로 분산했더니 핵 공격에도 견뎌내는 생명력을 갖게 된 셈이다. 중심 조직 없이 ‘분산형’으로 유지·관리되는 블록체인 기술과도 유사하다.

블록체인과 비트코인 같은 중앙 통제가 불가능하도록 설계된 기술이 처음 생겨나게 된 배경도 미국 정부의 군사용 기술 개발과 무관하지 않다.

1975년 미국 정부는 그간 군과 정보당국이 독점했던 암호 기술까지 민간에 개방했다. IBM에 연구용역을 맡겨 만든 새로운 암호체계 ‘DES(Data Encryption Standard)’가 그것이다. 민간이 처음 접한 최초의 고급 암호화 기술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 정보당국의 술수가 숨어 있었다. 정보당국이 암호 내용을 검열할 수 있도록, 알고리즘에 암호화를 우회하는 ‘뒷문(backdoor)’을 설치한 것. 이후 뒷문은 결국 전 세계 암호학자들에게 발각돼 제거되긴 했다. 암호학자와 컴퓨터 과학자들 주도로, 정보당국과 같은 빅브라더로부터 개인 프라이버시 보호를 추구하는 ‘사이버펑크’ 운동이 전개된 배경이다.

미국의 정부 주도 감시와 검열을 가장 강력하게 행사한 대상은 역시 적성 국가다. 1953년 이란을 시작으로 2001년 아프가니스탄, 2003년 이라크까지 미국은 그동안 15차례나 반미 정권을 실각시켰다. 이 가운데 9차례는 직접 군대를 동원해 무력을 사용했고, 나머지 6차례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쿠데타를 조장하거나 반군을 지원해 개입했다. 냉전시대에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미 CIA가 암암리에 움직였다.

특히 미국은 자국 뒷마당인 중남미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발붙일 수 없도록 반미 지도자들을 철저히 제거했다. 1954년에 과테말라 대통령을 쫓아냈고 1973년에는 칠레의 사회주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가 CIA가 지원하는 쿠데타군에 맞서 싸우다 자결했다. 쿠바식 사회주의를 따라 하던 후안 보슈 도미니카공화국 대통령은 1965년 미국 침공에 의해 실각했다. 그 뒤 18년 후 좌파 지도자가 총리로 등장하자 미국은 다시 침공해 정권을 무너뜨렸다. 1989년에는 파나마를 침공해 노리에가 장군을 마약 밀매 혐의로 붙잡아 미국 법정에 세웠다. 이러한 과정들 속에서 CIA는 반미 지도자 전화 도청과 편지·이메일 무단 검열을 통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동정을 파악했다.

여기서 쓰인 기술이 ‘펜 레지스터(Pen Register)’라는 기기다. 펜 레지스터는 과거 미국 정부가 전화와 우편물을 모두 감시하기 위해 특정 전화번호의 송수신을 모두 기록하는 기기다. 정부 기관이 요청하면 우편 배달부가 특정인의 우편 내역을 모두 기록해 제공하는 ‘메일 커버(Mail Cover)’도 합법이었다.

이후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미국 정부의 전자감시 활동에 의한 개인의 프라이버시 침해 사례가 더 늘어났다. 일례로 1993년 클린턴 행정부 시절, 미 국가안보국(NSA)은 백도어 코드가 심어진 ‘클리퍼 칩’을 개발했다. 클리퍼 칩은 암호화 알고리즘을 담은 집적회로(IC)인데, 미국 NSA는 각 통신사에 이 칩을 전화기 등 모든 통신장비에 설치하도록 권했다. 이 칩이 설치되면 정부가 국민의 통화 내용을 감청할 수 있게 된다. 명분은 테러 방지 등을 위한 국가 안보 제고였다.

실리콘밸리 기업들과 시민단체는 정부의 이런 구상에 격렬히 반대했다. 결국 이 계획은 칩 자체의 결함과 헌법에 반하는 위헌성 때문에 1996년 폐기됐다. 당시 클리퍼 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NSA는 무차별 도·감청을 진행하다 2013년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로 크게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후 사생활 보호에 대한 요구는 해킹이 불가능한 블록체인 수요로 이어졌다.

비트코인 역시 미국 정부의 무리한 달러 발행 정책에서 출발했다. 미국은 1960년대 중반부터 베트남전쟁 참전 등 무리한 통화 팽창 정책을 펼쳤고 이로 인해 발생한 인플레이션은 만성화됐다. 방만한 달러 발행이 야기한 1971년 ‘닉슨 쇼크’로 달러와 금 사이 고리가 떨어져나가자 금값은 온스당 35달러에서 120달러로 폭등해 달러 가치가 급락했다. 달러 가치 하락은 수입 물가 인상으로 이어졌다.

휘청거리는 경제에 1·2차 오일쇼크는 치명타였다. 1973년 1차 오일쇼크로 배럴당 3달러였던 유가는 단숨에 4배로 치솟더니 1978~1980년 2차 오일쇼크를 거치면서 24달러까지 8배나 올랐다. 이로 인해 세 차례나 경기 침체를 맞는 사이 그 와중에 물가는 뛰는 전형적인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져들었다.

1979년 미국 인플레이션율은 13.3%에 달했다. 미 연준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19%까지 올렸고 그러자 시중금리는 21%까지 치솟았다. 그 통에 기업 도산이 늘어나 실업률은 9%까지 급등했다. 이러한 총체적 난국에서도 물가 인상과 임금 동결 그리고 실업의 고통은 서민들의 몫이었고, 부호들은 자신의 금융자산이나 인플레이션을 활용해 폭락한 주식을 헐값에 매집하고, 부동산 등 실물자산을 사들여 부를 늘려갔다.

많은 사람이 스태그플레이션의 원인을 오일쇼크에서 찾았지만 경제학자들 주장은 달랐다. 하이에크는 원인을 그간 케인스 이론에 바탕을 둔 정부의 재정 확대와 방만한 통화 정책에 있다고 보았다. 밀턴 프리드먼 역시 과도한 통화 완화 정책이 거대한 인플레이션을 촉발했다고 평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미국 통화 증가율은 1970~1980년 사이 매년 11%씩 증가했다. 같은 기간 땀 흘려 일해 돈을 버는 근로소득 증가율은 연 3% 내외에 불과했던 반면, 돈이 돈을 불리는 금융소득 증가율은 1년에 약 15%로 크게 늘었다. 소득 불평등 심화와 부의 편중의 시작이었고 인플레이션이 촉발한 양극화였다.

이러한 경제 환경은 1980년대 실리콘밸리 인근 암호학자들 주도로 시작된 ‘사이버펑크 운동’과 맞물렸고 달러 발행이나 인플레이션과는 무관한 비트코인 개발로 연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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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희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01호 (2025.03.19~2025.03.2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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