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적자 해소 나선 트럼프
스테이블코인 집중 육성
한국은 이 분야 주요 투자자
시장 키워 협상력 높여야
스테이블코인 집중 육성
한국은 이 분야 주요 투자자
시장 키워 협상력 높여야

달러 예금, 미국 주식, 파생상품, 가상자산 등 어지간한 금융상품에 다 투자해본 뒤 내린 결정이다. 원화로 금융투자 활동을 하는 것이 갈수록 불편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A부장 신용카드 청구서 결제 단위는 스테이블코인인 서클(USDC)이다. 도널드 트럼프 시대에 원화가치 변동성이 너무 커져서 결심했다. A부장은 자산 포트폴리오를 달러화 표시 자산과 달러화에 고정된 미국계 스테이블코인인 USDC로 바꾸고 있다.
A부장은 해외에서 유학 중인 자녀에게 학비를 보낼 때 더 이상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망을 쓰지 않는다. 은행을 통해 해외 송금 시 2~3일씩 걸리던 일은 구석기 시대처럼 느껴진다.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실시간 송금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스테이블코인이 바꿀 미래 모습을 상상해본 사례다. 사실 이 중 일부는 이미 현실화됐다.
트럼프 정부에 맞설 한국의 협상 카드로 조선, 방산, 에너지 협력 등이 거론된다. 그런데 스테이블코인은 빠져 있다.
트럼프는 어느 대통령도 해결하지 못한 미국의 쌍둥이 적자(재정·무역수지)를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매년 프랑스 국내총생산(GDP)에 육박하는 쌍둥이 적자를 틀어막는 데는 미국 국채가 동원된다. 기축통화국 지위로 무한정 국채 발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은 수요가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중국, 일본은 슬며시 발을 빼고 있다. 하지만 뜻밖의 '빅 바이어'가 나타났다. 바로 스테이블코인 발행 업체들이다.
트럼프 정부가 친(親)가상화폐 정책을 펴는 가장 큰 이유는 미 국채 수요처 확보다. 세계 1위 스테이블코인인 테더(USDT)는 미국 국채 1130억달러를 보유하고 있다. 독일(970억달러)과 한국(1249억달러) 보유량의 중간쯤 되는 셈이다. 2위 스테이블코인인 USDC는 약 500억달러를 들고 있다.
USDT, USDC가 급성장한 이면에는 한국인 투자자가 있다. 지난 2월 초 국내 5대 가상화폐 거래소에서 스테이블코인 거래 대금은 13억달러에 달했다. 일일 거래량이 국내 전체 증시 거래량을 넘은 적도 있었다. 이들이 스테이블코인을 사들이는 것은 해외여행 전 환전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해외 가상화폐 거래소에서 '달러'처럼 쓰이는 스테이블코인을 사들여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기 위해서다.
시간 문제다. 한국 정부가 보유한 미 국채보다 한국인 투자자가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보유한 미 국채 규모가 더 커질 수 있다.
아쉬운 점은 한국이 만든 대표 스테이블코인이 없다는 점이다. 가상자산을 사기로만 치부하고, 각종 규제로 스스로 발목을 잡은 대가다. 홍콩 당국은 이런 중요성을 인식해 친(親)스테이블코인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한국인은 디지털 리터러시(문해력)가 뛰어난 민족이다. 스테이블코인의 중심 국가로 미래 화폐 전쟁의 이니셔티브를 쥘 잠재력이 있다. 원화로는 글로벌 금융 허브가 되기 어렵다. 하지만 스테이블코인으로는 가능성이 있다. 기존 세계 질서에서 원화를 쓰는 한국 금융회사가 글로벌 금융회사가 되기에는 본질적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가능하다. 금융회사가 아니라 정보기술(IT) 회사가 이런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정부가 민간의 혁신 속도를 앞지를 수 있다는 오만한 사고를 버리자. 산업이 성장하는 것을 보고 맞는 옷을 찾아주면 된다. 한국이 스테이블코인 분야 앱스토어, 안드로이드 마켓이 될 수 있다.
[박용범 증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