善惡 구분 버린 미국 재확인
우크라 운명은 모두의 자화상
창끝은 벌써 한국을 가리킨다

사업가 도널드 트럼프는 파괴적 협상가였다. 마러라고 리조트를 원래 주인이던 시리얼 회사 ‘포스트’ 가문이 팔지 않고 버티자 리조트 주변을 먼저 사들였다. 그리고 거기에 건물을 올리겠다는 협박을 통해 헐값에 마러라고를 손에 쥐었다. 뉴욕 트럼프타워를 지을 때는 붙어 있는 티파니 건물의 ‘공중권’을 사들여 68층 건물을 올렸다. 티파니 사장 월터 호빙과 담판 자리에 트럼프는 자신이 구상한 화려한 건물과 뉴욕시 개발국이 지을 초라한 건물의 모형을 들고 갔다.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때 잃을 것을 눈으로 보여주는 전략이었다.
부동산 디벨로퍼다운 창의성, 어린아이 같은 즉흥성, 그리고 무지막지한 실행력. 이 세 가지가 트럼프를 상징한다. 권력과 돈을 양손에 가득 쥔 ESTP다.
트럼프와 가장 멀었던 앙겔라 메르켈, 가장 가까웠던 아베 신조의 평가는 흥미롭다. 메르켈이 백악관에서 트럼프를 처음 만난 2017년 3월 17일의 회고다. 트럼프는 악수를 한번 더 해달라는 기자들의 요구를 무시했다. 메르켈이 귓속말로 악수를 청했지만 트럼프는 반응하지 않았다. 메르켈은 “트럼프는 자신의 행동이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고 어떤 효과를 낼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메르켈은 “트럼프와 대화에서 내린 결론은 분명했다”며 “전 세계 공통의 문제를 그와는 함께 해결해나갈 수 없다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아베마저 “트럼프는 비즈니스에서 성공 경험을 국제정치로 가져오려고 했다”며 “동맹에게 어리광도 적당히 부리라는 트럼프 주장은 옳은 측면도 있지만 미국이 국제사회 지도자 입장을 거둔다면 세계는 분쟁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2월 마지막 날의 백악관은 세계를 향해 더 이상 선(善)의 수호자 미국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웅변하는 미장센이었다. 생중계된 50분 백악관 대화는 회담이라기보다 몰이사냥으로 보였다. J D 밴스 부통령은 사냥개 역할을 했다. 만약 밴스까지 집권해 ‘마가(MAGA)’ 정권의 수명이 12년이 된다면 어떤 세상이 열릴지 더 선명해졌다. 덫을 쳐놓고 가련한 나라의 대통령이 빠지도록 유도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젤렌스키가 계획을 알았더라도 빠져나갈 뾰족수는 없었다고 본다.
바이든의 우유부단보다 트럼프의 막무가내가 전쟁을 멈춰 세울 수는 있다. 문제는 그다음의 세계다. 트럼프에게 거악은 오직 중국이다. 중국의 도전을 차단하기 위해 러시아를 활용하려는 것이 트럼프의 일관된 전략이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 손을 잡았던 리처드 닉슨의 반대 버전이지만 러시아가 미국 뜻대로 움직일 가능성은 낮다. 외교전략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없이 제국이 될 수 없지만, 우크라이나를 취하면 제국이 된다”고 경고했다. 중국보다 러시아를 두려워하는 유럽은 대서양 동맹의 유지냐, 독자 생존이냐 선택의 기로에 섰다.
트럼프와 밴스가 젤렌스키에게 가했던 “고맙다고 말하라”란 압력은 모든 동맹국을 향한 대사이기도 하다. 우리가 내부 문제로 헤매고 있을 때 일본과 대만은 진즉 백악관에 줄을 섰다. 트럼프에게 많은 인내심을 기대하긴 어렵다. 그는 벌써 한국과 일본이 알래스카 LNG 개발에 수조 달러를 투자할 것이라며 기정사실로 삼기 시작했다. 한국이 미국보다 평균 4배 높은 관세를 매긴다는 억지 주장도 했다. 트럼프를 제어할 기회는 2026년 11월 미국 중간선거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의회 구조가 바뀌면 트럼프는 1기 때처럼 견제를 받게 된다. 그렇다고 버티기로 해결될 일은 아니다.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고 앞줄에 타는 게 낫다. 뒷줄은 현기증이 더 심할 것이다. 미국에 내줄 것을 창의적으로 고안하되 절대 양보할 수 없는 핵심 가치를 지킬 전략을 마련하는 데 기업과 국가의 역량을 집중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