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갈수록 더 심각
밑빠진 독에 물붓는 격
전세대출·보증에 쓰는 돈
청년·서민 월세보조에 쓰자
밑빠진 독에 물붓는 격
전세대출·보증에 쓰는 돈
청년·서민 월세보조에 쓰자

전세가 한때 세입자에게 유리한 시절이 있었다. 부모가 5000만~1억원 정도 '뚝' 떼어 결혼자금으로 주면 약간의 대출을 보태 전셋집을 마련하던 시절 얘기다. 지금은 어떤가. 그걸론 서울은커녕 경기권에서도 전셋집을 넘보기 힘들다. 수억 원의 추가 대출이 필수다. 전세대출 잔액은 200조원을 넘었다.
옛날엔 몰라도 지금은 오히려 이 제도가 세입자에게나 국민경제 전체로 볼 때도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고 부작용을 양산하고 있다. 전세사기 사태를 봐도 쉽게 안다. 통계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전세보증금 반환 사고 금액은 무려 4조5000억원에 이르렀다. 우리나라는 전세대출 외에도 주택도시보증공사(HUG)라는 공적 보증기관에서 일종의 전세보험을 운영하고 있고 사고가 커지면서 손실액 대부분을 혈세로 보전하고 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유용하고 있는 쪽은 '빌라왕' 같은 집장사와 이들과 결탁한 사기꾼들이다. 사기꾼들은 빌라를 다량으로 매입한 뒤, 과도한 전세보증금을 책정해 세입자를 유인한다. 이후 전세금을 돌려줄 의사가 없거나, 집값이 전세금을 초과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세입자들만 피해를 본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부가 저리 전세대출을 내주고 보증을 통해 세입자 보증금을 보호하는 시장 구조가 전세제도를 사기꾼 놀이터로 만든 것이다.
정부가 전세를 유지하기 위해 개입할수록 시장은 왜곡되고 사기꾼들은 판을 친다. 이제 전세라는 족쇄를 풀고, 임대 시장을 선진화할 때다. 독일, 영국, 일본 같은 선진국들은 한국과 같은 전세 없이도 안정적인 임대 시장을 운영하고 있다. 월세 상한제와 세입자 보호 법안 덕분에 임대료가 급등하지 않고, 세입자들은 장기 계약을 통해 안정성을 보장받는다.
믿을 만한 민간임대주택 기업들이 많이 포진해 있고, 대기업, 금융투자자들도 임대주택에 거액을 투자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반면 국내 기업들과 금융권은 "한국에서 사인 간 거래가 대세인 전세가 사라지겠냐"라는 반신반의로 적극적이지 않다.
국내 토종기업에서도 대형 임대관리기업이 많이 출현하면 좋겠다. 모건스탠리, 하인즈 등 외국 기업은 한국의 월세시장에 벌써 속속 상륙했다. 지금 MZ세대들은 우리 세대 같은 '월세공포증'을 갖고 있진 않은 것 같다. 다소 비용을 치르더라도 보증금을 믿고 맡길 만한 기업이 만족할 만한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지불 의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월세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지금 전세사기 손실액에 보전하거나 정책성 전세대출을 보조하는 데 들어가는 예산을 선진국처럼 청년과 서민층 월세를 현금 보조하는 쪽으로 개편하면 좋을 것이다. '찔끔' 하는 시늉뿐인 월세 연말소득 공제액도 파격적으로 올려주는 방안도 검토해볼 만하다.
전세대출과 전세보증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해마다 예산을 늘리려는 국회와 정부부터 변해야 한다. 전세는 선이고 월세는 악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전세라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예산 관행부터 바꿔야 한다. 전세의 종말이 아니라 집 없는 서민들의 위태로운 주거 환경을 구하는 일이다.
[이지용 부동산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