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오른쪽)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사진출처=연합뉴스]](https://pimg.mk.co.kr/news/cms/202501/05/news-p.v1.20250104.d3a2008fe6214f2ba3d5e2aa506613ab_P1.jpg)
보수주의에 대한 정의는 시대, 국가, 논자에 따라 제각각이다. 정의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정의는 “보수주의는 정치적 사상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습관, 감정적 상태, 삶의 방법에 더 가깝다”는 영국 역사학자 레지날드 화이트의 정의다. 이 기준에 따른 보수주의자의 요건에는 신중함, 자존심, 명예, 경청, 원칙, 명분, 도덕심, 애국심 등이 포함될 것이다. 누가 나더러 보수주의자라고 하면 큰 칭찬으로 듣겠지만 속으로는 뜨끔할 것 같다. 보수주의는 세계관이 아니라 수양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보수주의자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사람들을 주로 지칭한다. 정치적으로 ‘우파’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파 중에서 신중하지도 않고 줏대도 없고 도덕심이나 애국심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보수주의자를 자칭할 때 마다 ‘글쎄’하는 기분이 된다. 계엄·탄핵 국면에서 우원식 국회의장의 우아하고 절제된 처신이 눈길을 끌었다. 우 의장은 한국 정치 지형에서 주로 ‘좌’에 속했고 지금도 야에 편중된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삶의 방식 측면에서는 보수주의자 소리를 들을만 하다.
김문수 노동부 장관은 어떤가. 나는 오랫동안 그를 존경할만한 보수주의자로 생각해왔는데 이번에 좀 실망했다. 지난달 31일 국무회의에서 그는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헌법재판관 2명을 임명한 것을 격렬히 성토했다. 유상임 과기부장관, 이완규 법제처장, 유철환 국민권익위원장 등이 김 장관 편에 서서 거들었고 김태규 방통위 부위원장은 사표까지 내며 항의했다. 국가의 운명을 놓고 판단해야 할 자리에서 자기 색깔을 드러내며, 혹은 드러낼 목적에서 성내는 사람은 보수주의자가 아니다. 우파적 당파주의자로는 자격이 충분하다.
최상목은 보수주의자 자격이 있다. 그는 대통령 권한대행 자리에 연연해야 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일부 우파로부터 배신자 소리 들어가며 헌법재판관을 임명했다. 이 자기희생적 결정이 그나마 대한민국이라는 시스템을 돌아가게 했다. 그가 윤석열 정권의 당파적 이익에 복무했다면 나라는 지금 보는 것보다 훨씬 위험해졌을 것이다. 국가의 운명을 걸고 치킨게임을 하는 사람은 보수주의자가 아니다. 처칠은 히틀러와 운명을 건 전쟁을 벌였지만 그것은 전쟁보다 더 크고 명약관화한 위협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최상목이 도대체 무엇을 지키기 위해 헌법재판관 임명을 거부했어야 한단 말인가.
한덕수 총리가 헌법재판관 임명을 거부했다고 해서 보수주의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한 총리가 거부했기 때문에 최 대행이 보다 수월하게 결단한 측면이 있다. 한 총리가 헌법재판관 후보 3명 중 2명만 임명했더라면 야당은 길길이 뛰었을 것이다. 결정의 내용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무슨 결정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결정을 내리는 과정과 태도가 중요하다. 신중하게, 사심 없이 판단했다면 보수주의자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최상목 대행의 결정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 이에 반대한 국무위원들을 향해 “고민 좀 하고 말하라”고 쓴소리를 했다. 한은 총재의 정치적 발언이 보수주의 가치에 부합하는지는 의견이 갈릴 수 있다. 맥락이 중요하다. 최 대행 체제가 흔들리는 것이 국가이익에 반하고 이에 제동을 걸 사람이 별로 없다면 한은 총재라도 나서는 게 옳지 않겠나. 대의 편에 서서 힘을 싣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이 또한 보수주의의 덕목이다. 이창용 총재도 보수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이 총재와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했지만 다르게 들리는 사람도 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3일 신년 인사회에서 “한은 총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금융감독원도 최상목 권한대행께서 경제 시스템을 정상적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지지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지원하겠다고 약속드린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이 언제부터 정부 노력을 지지할 권한을 갖고 있었나. 지지 안할 권한도 있다는 말인가. 이복현은 윤석열 검사정권이 아니었으면 금감원장이 못됐을 것이다. 벼락감투를 오래 쓰더니 본인이 한은총재와 동급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는 앞서 “탄핵이 예측 가능성 측면에서 우리 경제에 낫다”며 종편 패널처럼 말하기도 했다. 주제넘은 말을 하는 것, 의리가 없는 것, 카멜레온처럼 빠른 변신은 보수주의가 아니라 기회주의의 특징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보수주의자인가. 그는 신중하지도, 남의 말을 경청하지도, 국가를 최우선에 놓고 판단하지도 않았다. 체포영장 집행 거부로 자존심과 명예심마저 의심받고 있다. 세상에 그렇게 처신하고 보수주의자로 인정받은 사람은 없다. 본인만 그런 것이 아니고 주변이 대부분 그런 사람들로 채워졌다. 보수의 가치를 입에 달고 살지만 스스로는 수양이 덜 된 우파 포퓰리스트. 윤석열 시대 당정을 꿰찬 주류가 대개 그랬다. 보수주의자가 희귀한 우파 정권. 그 정권에서 흥한 것은 음모론과 그것을 실어나르는 유튜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