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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양손잡이’…환경 변화엔 ‘카멜레온’ [케이스스터디]

배준희 기자
입력 : 
2025-03-14 2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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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링 명가’ 126년 장수 기업 ‘팀켄’

“만물이 회전하는 것을 돕는다.”

글로벌 베어링·산업 모션(Industrial Motion) 기업 ‘팀켄(Timken)’의 기술 정체성을 요약하면 이렇다. 베어링은 자동차·항공기 등 최종 제품과 결부될 때 가치가 발휘되는 대표 산업재다. 바퀴가 달렸거나 회전이 필요한 거의 모든 제품과 기술에는 팀켄 베어링 기술이 적용됐다고 봐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달리 말해, 팀켄 베어링이 없다면 회전이 필요한 대부분 완성재는 가치를 상실한다는 의미다.

팀켄 엔지니어링 기술이 집약된 대표 산업재는 이름도 생소한 ‘테이퍼 롤러 베어링(Tapered Roller Bearings)’이다. 이는 끝이 좁아지는 원추형 디자인을 가진 롤러(Tapered Roller)를 사용해 마찰을 줄이고 방사(축 → 바깥) 혹은 축 방향 하중을 동시에 견딜 수 있는 베어링이란 의미다. 자동차(바퀴 허브 및 변속기)·철도(열차 차축)·항공우주(랜딩 기업 및 엔진 부품)·산업기계·에너지(풍력 터빈 기어박스) 등 거의 모든 산업군에 쓰인다.

가령, 보잉과 에어버스를 비롯, 상업용 항공기가 착륙할 때 하중이 기체에서 지상으로 전달되면서 승객은 강한 진동이 수반된 반동을 느낀다. 항공기 제동 과정에서 약 9000㎞ 상공 영하 온도에 노출돼 있던 바퀴에 극도의 열이 발생하는데, 이런 충격을 ‘랜딩 휠(Landing Wheel)’이 흡수한다. 랜딩 휠이 항공기 무게·속도·착륙 충격 등을 흡수하고 하중을 분산하려면 고도의 엔지니어링 기술이 집약된 ‘테이퍼 롤러 베어링’이 필수다.

1899년 설립된 팀켄은 테이퍼 롤러 베어링 개발과 확산을 기반으로 차근차근 사업 다각화(Diversification)를 일궜다. 2023년 매출 약 48억달러(약 7조2000억원)·영업이익 6억5710만달러(약 9530억원), 세계 45개국에 1만9000명 이상 직원을 둔 다국적 기업으로 도약했다. 탄탄한 기술력과 지속적인 연구개발을 동력 삼아 올해 설립 126주년을 맞은 글로벌 장수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1922년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최초 상장 이후 지난해 4분기까지 411분기 연속 보통주 배당금을 지급했다. 이는 NYSE 상장 기업 가운데 최장 배당금 행진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전통 산업재에서 혁신 산업까지 카테고리를 쉼 없이 확장한 팀켄의 혁신 전략을 분석한다.

미국 애틀랜타 ‘메르세데스-벤츠 스타디움(Mercedes-Benz Stadium)’은 애틀랜타 팰컨스(Atlanta Falcons) 미식축구팀 홈구장으로, 첨단 시설과 독특한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팀켄 베어링과 산업 모션 기술이 집약된 사례로 꼽힌다. (Mercedes-Benz Stadium 제공)
미국 애틀랜타 ‘메르세데스-벤츠 스타디움(Mercedes-Benz Stadium)’은 애틀랜타 팰컨스(Atlanta Falcons) 미식축구팀 홈구장으로, 첨단 시설과 독특한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팀켄 베어링과 산업 모션 기술이 집약된 사례로 꼽힌다. (Mercedes-Benz Stadium 제공)

주력·신사업 조화 ‘양손잡이 조직’

개방형 혁신으로 기술 내재화 가속

팀켄 혁신 전략의 뼈대는 ‘양손잡이 조직(Ambidextrous Organization)’의 성공적인 구현으로 압축된다. 양손잡이 조직 전략은 ‘한 손(활용·Exploitation)’으로는 주력 사업을, ‘다른 손(탐험· Exploration)’으로는 신사업을 벌이는 전략을 뜻한다. ‘활용’과 ‘탐험’은 경영학 대가 제임스 마치(James G. March)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기반을 닦은 개념이다. 다만, 양손잡이 전략이 기업 성과 개선으로 이어지려면 기존 주력 사업과 신사업 간 연결과 통합이 중요하다는 게 다수 실증분석 결과다. 신사업을 벌이더라도 기존 사업과 연계해 연결과 통합이 이뤄질 때 시너지가 발휘된다는 것이다.

팀켄은 기존 베어링 사업을 기반으로 핵심 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연관성 높은 시장과 기술을 전략적으로 육성해 다각화 기반을 다졌단 평가다. 역량 다각화에 밑거름이 된 것은 개방형 혁신(Open Innovation)과 전략적 제휴(Strategic Alliances)다. 가령, 팀켄은 자체 연구개발뿐 아니라, 대학·연구기관 등 외부 기관과 개방형 혁신에 나서 자체 개발이 까다로운 기술과 연구 역량 내재화 기간을 대폭 단축시켰다.

팀켄은 핵심 역량인 베어링 기술을 기반으로 연관성 높은 산업 모션 분야로 카테고리 확장(Category Spanning) 역시 순조롭게 일궜다. ‘산업 모션’은 기계 시스템에서 동력을 전달하고 조절하는 모든 기술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베어링 기술은 산업 모션 시스템의 핵심 구성 요소로, 마찰을 줄이고 기계 성능을 최적화하며 장비 내구성을 높인다. 즉, 산업 모션 시스템이 원활하게 작동하려면 고품질 정밀 베어링이 필수며, 두 기술은 상호 보완적 관계로 평가된다.

팀켄은 전통 산업재에서 산업 모션 분야로 다각화를 위해 인수합병(M&A)을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2013년 인터루브시스템(Interlube Systems·자동 윤활 시스템 및 펌프 제조 업체)을 비롯, 2023년 나델라그룹(Nadella Group·기계적 모션 기술)과 로즈시스템(Rosa Sistemi·맞춤형 선형 시스템 등)까지 줄줄이 인수합병했다. 이 같은 전략적 인수는 제품 포트폴리오 다각화는 물론, 산업 모션 솔루션 업체로 정체성 재정립에도 기여했다는 분석이다.

팀켄 베어링과 산업 모션 기술이 집약된 사례가 미국 애틀랜타 ‘메르세데스-벤츠 스타디움(Mercedes-Benz Stadium)’이다. 이 경기장은 애틀랜타 팰컨스(Atlanta Falcons) 미식축구팀 홈구장으로, 첨단 시설과 독특한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특히, 팔각형 개폐식 지붕이 회전하며 열리고 닫히는 방식으로, 날씨에 따라 조절할 수 있게 설계됐다. 지붕의 원활한 개폐를 위해서는 마찰을 줄이고 안정적인 움직임을 구현할 수 있는 정밀 베어링이 필수다. 최광욱 팀켄코리아 지사장은 “대규모 건축 프로젝트에 요구되는 혁신 설계가 가능하도록 다양한 엔지니어링 솔루션을 제공했다”고 설명한다.

사진설명

‘동적 역량’으로 기민한 대응

혁신 산업으로 다각화

환경 변화에 맞춰 기회를 포착하고 자원을 효과적으로 변환하는 ‘동적 역량(Dynamic Capabilities)’도 팀켄의 핵심 자산으로 분석된다.

동적 역량은 데이비드 티스 UC버클리대 교수가 1997년 처음 제안한 개념이다. 기업이 장기적으로 탁월한 성과를 달성하려면 핵심 역량과 유무형 자산을 그저 보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변화하는 경영 환경과 적합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재결합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런 의미에서 ‘동적 역량’이란 이름이 붙었다. 동적 역량 프로세스는 3단계다. 첫째, 감지(Sense)다. 말 그대로 환경 변화를 감지하는 능력을 뜻한다. 둘째, 포착(Seize)이다. 포착은 변화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 기존 자원을 재조합해 활용하는 것이다. 셋째, 변화(Transform)다. 새롭게 조합한 역량과 자원을 기반으로 새로운 경쟁 우위를 확립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 가운데 지금처럼 불확실성이 높은 기술 환경에서는 3단계 프로세스(환경 감지·기회 포착·변화) 가운데 환경 감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게 다수 전문가 시각이다. 팀켄은 신재생에너지·전기차(EV) 시장 성장 가능성을 일찌감치 인식하고(환경 감지) 연구개발에 적극

투자한 뒤 신소재 개발과 AI 기반 설계 기술을 도입해 차별화된 제품(기회 포착)을 내놨다. 성과도 눈에 띈다. 팀켄은 풍력 터빈용 베어링 개발·생산에 주력해 2023년 풍력에너지 부문에서 약 7억5000만달러 매출을 올렸다. 이는 전체 매출의 16% 정도다. 태양광 추적 시스템에 사용되는 베어링 솔루션을 개발해 2023년 이 부문에서 2억달러 매출을 올렸다. 전기차 효율성과 주행 거리 향상을 위한 저마찰·고효율 베어링 개발도 서둘렀다. 2023년 전기차 관련 베어링 판매로 약 1억2000만달러 매출을 올렸다.

자동화라는 환경 변화에 맞춰 기존 공급망과 제조공정의 디지털 전환(자원 변환)에도 속도를 내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으로 포트폴리오 다각화를 일궜단 평가다. 실시간 모니터링이 가능한 사물인터넷(IoT) 기반 스마트 베어링, 머신러닝 알고리즘을 활용한 생산 공정 최적화·운영 효율성 향상, 공장 자동화 등이 단적인 예다.

과제도 산적

중국·인도 등 거센 도전

다만, 풀어야 할 숙제도 적지 않다. 최근 팀켄은 글로벌 공급망 불안정성·원자재 가격 변동성 확대, 기술 혁신 가속화에 따른 시장 경쟁 심화 등 복합 위기에 직면했다. 철강·구리 등 핵심 소재 가격 변동성이 커지는 가운데, 해상·항공 물류비 상승은 제조 원가 부담으로 이어진다.

글로벌 베어링 제조 업체 간 경쟁 심화는 물론 중국과 인도 기업의 거센 도전도 따돌려야 한다. 이에, 팀켄은 생산기지를 다변화하고 현지 조달 비중을 늘린다. 인도·멕시코·동남아 일대 신규 생산시설을 늘려 공급망 리스크를 분산하는 한편, 주요 원자재 공급 업체와 장기 계약으로 가격 변동성을 완화한다. 또, AI·빅데이터 기반 공급망 모니터링 시스템을 도입해 수요 예측·재고 관리를 최적화한다. 최광욱 지사장은 “연구개발 투자를 대폭 확대하며 신제품 개발과 기술 고도화에 주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인터뷰 | 최광욱 팀켄코리아 지사장
레거시 → 혁신 산업으로 ‘테크 리더십’ 확장
최광욱 팀켄코리아 지사장 [윤관식 기자]
최광욱 팀켄코리아 지사장 [윤관식 기자]

1988년 설립된 팀켄코리아(한국 지사)는 현대로템·포스코·코레일·두산에너빌리티·한국전력 등 국내 주요 기업을 고객사로 두고 있다. 다음은 최광욱 팀켄코리아 지사장과 일문일답.

Q. 팀켄코리아의 현황을 들려달라.

A. 팀켄코리아는 1988년 설립됐다. 2020년 이후 연평균 13.5%의 성장률을 기록 중이다. KTX 고속철도, 자동차, 항공우주, 철강, 건설기계, 신재생에너지 등 다양한 산업 분야 국내 유수 고객사에 제품을 공급하고 엔지니어링 솔루션을 제공한다. 최근 식음료 생산 과정에 특화한 폴리머 베어링, 고체윤활 베어링, 그리고 고온·고압까지 견딜 수 있는 IP69K 등급 제품도 선보였다.

Q. 경쟁사 대비 강점은.

A. 차별화되는 경쟁력은 훌륭한 엔지니어링 인재와 탁월한 기술력이다. 올해 126년 역사와 축적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정밀 베어링과 동력 전달 제품을 개발·공급한다. 고부가가치 산업(항공우주·방위 산업·중공업 및 신재생에너지 등)에 적합한 고성능 제품과 함께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한다. 팀켄은 TBM(터널 보링 머신) 시장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다. TBM은 지하 터널을 굴착하는 데 사용되는 고난도 기계로, 고품질 베어링과 동력 전달 부품이 필수다. 특히 높은 강도와 밀도를 가진 암반 지반에서 팀켄 제품은 확실한 강점을 갖는다. 팀켄은 영업사원도 모두 공학 전공자다. 입사 이후 미국 본사에서 6개월에서 1년 정도 베어링과 동력 전달 제품에 대한 세부 교육을 완료해야 한다. 이 같은 핵심 프로그램을 완료한 영업사원에게 ‘세일즈 엔지니어(Sales Engineer)’라는 직책을 부여한다. 또, 유통 파트너사들과 회사의 정책과 방향성을 투명하게 공유하면서 파트너사 영업사원에게도 지속적인 온·오프라인 교육을 제공한다.

Q. 산업재 수요 둔화 대비책은.

A. 꾸준히 산업 포트폴리오 다각화에 힘써왔다. 철강 및 전통적인 중공업 분야 외에도 항공우주·방위 산업·풍력발전·식음료 산업 등 상대적으로 경기 변동성이 낮은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확대하고 있다. 철강 업계에도 고온·고압 환경에 특화한 프리미엄 제품과 유지보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솔루션을 제공하며 고객사 원가 경쟁력 강화에 기여한다.

Q. 올해 역점 사업과 경영 목표는.

A. 팀켄의 비전은 ‘세계를 움직이는 기술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지속적인 기술 투자와 글로벌 네트워크 확장에 집중하고 고객과 협력해 혁신을 선도하려 한다. 전통적인 베어링·동력 전달 솔루션에 머무르지 않고 전동화·디지털화·친환경 기술로 전환을 통해 산업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겠다.

[배준희 기자 bae.junhee@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00호 (2025.03.06~2025.03.18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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