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래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영웅(英雄)이란 출신 성분상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존재이다. 최고의 신 바람둥이 제우스와 인간 여자 사이에 태어난 용맹과 지혜의 신 헤라클레스(Heracles)와 바쿠스(Bacchus)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 친숙한 주신(酒神) 디오니소스(Dionysus) 등이 잘 알려진 영웅의 예이다. 영웅은 신이 아니기에 죽어야 하지만, 신과 대적할 수 있는 지혜, 재능 그리고 용맹함을 갖추어 보통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므로 인간으로부터 추앙 받는다. 불교에서 가장 큰 영웅은 석가모니이다. 그래서 절에서 석가모니를 모신 전각을 대웅전(大雄殿)이라 한다. 석가모니와 예수가 인류 최고의 영웅이고, 동서고금 많은 영웅이 출몰하고 있다.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기일수록 대중은 난세를 평정해 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간절히 고대하기 마련이다.
인물평의 대가 허소(許邵)를 조조(曹操)가 찾아가 자신에 대해 평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그대는 평화 시에는 그저 교활한 사람(奸賊)이지만, 난세에는 영웅이 된다(亂世之英雄)”고 말해주자 조조는 기뻐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로부터 유명해진 말이 ‘난세에 영웅 난다’이다. 난세로 말할 것 같으면 국내외 통틀어 ‘2024년보다 더 심한 난세가 어디 있을까’ 라는 생각이 연말을 맞아 언뜻 든다.
어마어마하게 누적된 쌍둥이 적자, 치솟는 물가 그리고 패권국가의 지위가 흔들리는 난세의 미국에 트럼프와 일론 머스크(Elon Musk)가 등장했다. 이는 미국인들이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 난세의 영웅을 간절히 고대한다는 뜻이다. 그 둘이 이 난국을 진정시킬 영웅일지, 아니면 그저 자신의 아집과 이익을 추구하는 장사치 내지 간적(奸賊)에 불과한지는 아직은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가지지 않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아인슈타인, 스티브 잡스 등 혁신가이자 영웅인 그들의 생애와 업적을 자세히 파헤쳐 쓴 유명한 평전 작가가 월터 아이작슨(Walter Isaacson)이다. 평전(評傳, Critical Biography)이라 함은 교훈 위주의 위인전과는 달리, 한 인물에 대해 객관적인 서술과 함께 비평의 대상으로서 작가의 주관적 판단이 가미된 전기문이다. 그가 머스크를 2년 동안 졸졸 따라다니면서 관찰하고, 그와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을 면담하여 쓴 평전이 있다. 물론 출판 전에는 머스크도 원고를 보지는 못했다.
1995년 지역 정보를 인터넷으로 제공하는 스타트업을 시작으로, 전자결제 서비스 페이팔, 우주 개발 스페이스 X, 전기차 테슬라 그리고 인공지능까지 손 대는 족족 다 금덩이로 만들어 성공시키는 마이더스(Midas)가 드디어 트럼프 당선 후 세계 제일의 갑부로 등극하였다. 평전을 보면 그는 혁신가의 기질은 확실히 가지고 있다. 대학에서 컴퓨터와 물리학을 전공한 그는 물리법칙을 제외한 기존의 모든 법칙, 규제, 관행, 비용 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데, 그것이 혁신가로서 기본 기질이다. 그가 경영학을 공부한 이유로 든 것은 놀랍게도 “경영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경영학을 공부한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게 될 거라는 걱정”이였다. 특히 물리학은 그의 혁신가적 사고의 틀을 제공하였다.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으므로, 굳이 신을 불러 삶에 개입시킬 필요는 없다”는 것이 기본 프레임이다.
또 하나, 그의 혁신가적 기질은 “경영권은 공유할 수 없다”라는 생각에서도 엿보인다. 중국에 테슬라 공장을 세우고자 할 때, 중국정부는 토착기업과 50대 50합작기업 (Joint Venture)을 세우라고 종용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 최고 권력자 시진핑을 설득하여 JV를 설립하지 않고 단독으로 공장을 세우고 인센티브를 받아냈다. 그 후 테슬라 제품의 거의 절반은 중국에서 생산되고 있다. 글로벌 3위이며 한국 제일의 자동차회사 그리고 한국의 유수 대기업들이 중국에서 맥없이 문닫으며 철수하는 근본 이유가 중국회사와의 JV임을 생각할 때 그의 혁신가적 혜안과 추진력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가 혁신가임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어찌 보면 허황된 꿈과 같은 비젼과 그를 실현하려는 진지한 노력이다. 인류는 태양계의 지구에서만 살 것이 아니라, 화성에서도 살 수 있는 다행성종(多行星種)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래야만 지구의 인류가 핵전쟁이나 소행성과의 충돌로 멸망하더라도 화성에 있던 인류가 지구로 다시 와서 종족과 문명을 이어 갈 수 있다는 공상과학적 비젼의 제시이다. 그를 위해 그는 화성 이주를 위한 우주 왕복선의 개발에 힘쓰고 있다. 휴머노이드 로봇 개발과 ‘인간과 컴퓨터의 공생’을 위해 인간의 뇌를 컴퓨터에 직접 연결하려는 노력 또한 이런 비젼에서 나오는 것이다.
영웅은 두려움없이 용맹하게 나아가기에 영웅이다. 혁신가는 실패 리스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가 자주하는 말이 “리스크는 인생의 연료”이다. 자동차 차체 하부 구조의 혁신적 제조방법 변경은 그가 리스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무용담 중 하나이다. 전통적인 방법은 몇 십 개의 작은 패널과 부품을 용접하고 볼트, 너트로 연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장난감 자동차에서 영감을 받아, 그 하부 구조를 고압 주조기를 이용하여 큰 블록 단위로 만들어 부품의 수를 줄였다. 물론 기존의 방식을 뒤집으니 엄청난 리스크가 뒤따르는 모험이었다.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6,000~9,000톤의 고압 주조기에서 뽑아낸 일체형 하부구조를 사용해서 전기차를 만들고 있다. 일명 ‘기가 프레스’ 공법으로 생산단가를 크게 줄일 수 있고 이제 타 자동차 메이커도 따라 하고 있다.
제조업 경영자가 배워야 할 점은 그의 ‘생산 알고리즘’ 다섯가지이다. 여기서 알고리즘은 모든 문제의 해결절차를 말하는 것으로 그가 항상 강조하는 혁신을 위한 계명같은 것이다. 첫째, 기존의 모든 요구 사항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혁신의 여지를 찾아야 한다. 둘째, 부품과 프로세스는 나중에 다시 추가할 지 언정, 일단 최대한 제거하고 본다. 셋째, 그런 다음 단순화하고 최적화 해야 한다. 넷째, 어떤 프로세스이든 속도를 높여 사이클 타임을 단축하여야 한다. 다섯째, 위 네 가지 알고리즘을 다 시행한 다음, 가능한 모든 것은 자동화해야 한다.
이 다섯 가지 생산 혁신을 위해 경영자가 유의해야 할 몇가지 사항이 있는데 매우 공감가는 내용이다. 유일한 법칙은 물리법칙임을 알고 일단 틀려도 좋으니 시도해 보도록 리더쉽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고, 자신이 하고 싶지 않다면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겼을 경우 그 때마다 경영자에게 들고 가는 풍조를 만들지 말아야 하며, 조직 내에 ‘광적인 긴장감’을 불어넣는 것이 경영자의 역할이라는 것들이다.
경영자로서 머스크는 ‘정주영식 밀어붙이기’를 잘 구사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목표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창의적으로 매진하는 태도이다. 동시에 그는 무노조 경영원칙을 고수하고 있으며, 새로운 공장의 입지선정 시 무노조 또는 노조의 영향력이 약한 곳을 선호한다. 전미자동차노조(UAW)는 아직 테슬라 공장에 노조를 설립하지 못하고 있다. 그가 민주당 버락 오바마 지지 광팬에서 벗어나, 우파를 지지하며 공화당으로 방향을 선회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이든 대통령이 노조를 강하게 지지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사전에 ‘워라밸이나 주 52시간’은 아예 없다. 어떤 일을 강하게 추진할 때는 하루에 서너 시간 만 공장에서 자면서 주 7일 근무를 밀어붙인 적은 한두 번이 아니다.
머스크는 대선 기간 중, 트럼프에게 약 3억 달러(약 4,000억원)를 투자하여 그 600배에 해당하는 1,700억 달러(약 240조원)의 수익을 냈다고 미 언론에 보도된다. 리스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이 다시 부각된다. 그가 막대한 선거자금을 댄 것은 그의 도박적 모험인지, 아니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트럼프로부터 자신의 기업을 보호하려는 천재의 방어책이 일시적 대박을 친 것 뿐인지는 아직 모른다. 확실한 것은 이제 곧 그는 트럼프의 정부효율부(DOGE) 공동 수장을 맡아 연방정부의 조직 슬림화 추진 등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이다. 전기차에 지급하는 7,500달러 보조금 삭제 등 트럼프의 정책 방향에 맞추어 그만의 추진력과 혁신적 결단을 보여줄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연 그는 혁신적 기업가에서 난세의 미국을 구한 국민적 영웅으로 격상될 수 있을까?
1915년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프랑스의 소설가 로맹 롤랑(Romain Rolland)은 “영웅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 사람이고, 보통 사람은 자신의 일도 안 하면서 할 수 없는 일만 기대하는 사람이다”라고 쉽게 정의했다. 그렇다면 머스크는 영웅이 될 가능성은 다분하다. 이젠 기업의 뛰어난 혁신가도 세상을 바꾸는 영웅이 될 수 있다.
[진의환 매경경영지원본부 칼럼니스트/ 소프트랜더스㈜ 고문/ ㈜ 삼기 북미법인장, 전 현대자동차 권역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