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 사태가 어떻게 정리되든지 간에 한국에서 이런 유의 경영권 분쟁은 계속될 것 같다. 사모펀드 역시 이런 상황에 적극 개입할 가능성이 높다.”
모 PEF 대표의 전언이다.
고려아연뿐 아니다. 최근 경영권 분쟁을 겪는 곳으로는 한미사이언스, 금호석유화학, 다올투자증권, 쏘카, 래몽래인 등 상장사만 여러 곳이다. 관련 공시도 급증하는 추세다. 10월 13일 기준 ‘소송 등의 제기·신청(경영권 분쟁 소송)’ 관련 공시가 73개사 242건(금감원 전자공시)에 달했다. 지난해 동일 기간(71개사 219건) 대비 10.5% 증가한 수치다. 경영권 분쟁이 이제 재계 유행이 돼버린 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경영권 분쟁 왜 늘었나
사모펀드 20년 만에 136조원
최근 들어 경영권 분쟁이 유독 많이 보이는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사모펀드(PEF) 참전 임팩트가 컸다. 특히 고려아연 분쟁으로 주목받고 있는 MBK는 지난해 한국앤컴퍼니(옛 한국타이어그룹) 분쟁에 적극 개입한 바 있다. 비슷한 시기 사모펀드와 경영권 마찰을 빚는 상장사는 꽤 많다. ‘강성부펀드’로 유명한 KCGI가 한진칼, DB하이텍 등을 대상으로 경영권을 가져오기 위해 경영진과 대립한 바 있다. 최근 CG인바이츠 최대주주로 올라선 뉴레이크얼라이언스매니지먼트(PE)가 창업자와 경영 갈등을 빚고 있기도 하다.
간접투자자산 운용업법 시행에 따라 2004년 제도권 안으로 들어온 국내 경영참여형 사모펀드는 성장세가 뚜렷하다. 매년 20% 성장해 AUM(약정 금액)은 지난해 말 기준 136조원에 달한다. AUM 1조원이 넘는 사모펀드도 30여곳이나 되는 만큼 자금력이 탄탄하다.
더불어 지분 관계상 1대 주주와 2대 주주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놓인 기업이 많아지는 것도 주요 이유 중 하나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 대기업이 세대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형제간 혹은 가족 간 애매한 지분율을 갖게 되며 분쟁의 여지가 생기고 있다”면서 “이런 역학 관계를 제3자가 파고들어 경영권을 두고 경쟁하게 되는 모양새가 자연스레 연출되는 게 현시점”이라고 분석했다.
꼭 가족 간 분쟁이 아니어도 최근에는 지분율이 엇비슷한 주주 간 분쟁도 다수 포착된다. 에프앤가이드가 대표적인 예다. 김군호 전 회장 측이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던 가운데 최대주주인 화천그룹이 임시주주총회소집허가 신청을 서울남부지방법원에 제기, 본격적인 경영권 분쟁을 시작했다. 시가의 3~6배 가까이 높은 가격에도 지분을 매입한 끝에 지분율을 48%까지 끌어올렸지만 여진은 이어진다. ‘무력시위’를 하는 2대 주주 사례도 있다. 리조트·호텔 기업인 대명소노그룹의 운영사 소노인터내셔널이 티웨이항공 2대 주주에 이어 최근 에어프레미아 지분까지 인수하면서 경영권 분쟁 조짐을 보이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1대 주주 입장에서는 최근 소노 측의 지분 보유·확충이 아무래도 거슬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왜 유행처럼 번지나
2대 주주와 지분율 차 적은 곳 타깃
전문가들은 앞으로도 이런 사례는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한다. 아예 NH투자증권은 ‘경영권 분쟁, 금융 선진화 과정에서 겪는 성장통’이라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보고서는 “환경·사회적 책무·기업 지배구조 개선(ESG) 도입, 밸류업 프로그램 등에 따라 나타난 주주 가치 개선 및 주주 권리 강화 움직임은 경영권 분쟁이나 적대적 M&A 시도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시장에서는 적대적 M&A 대상 리스트가 돌 정도다. 일명 제2의 고려아연, 한미사이언스 후보 종목이다. 1대 주주와 2대 주주 간 지분 차가 적으면서 해당 사업 영역에서 경쟁력이 있는 회사가 주로 거론된다. 더불어 ‘밸류업’ 전략을 펼칠 수 있을 정도의 내부 현금, 자산이 많은 곳도 포함된다. 주가 역시 PBR 1 이하로 저평가되는 곳이 경영권 분쟁 대상이 될 소지가 크다는 시각이다.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곳으로 신도리코, 동원개발, 고려제강, 사조대림, 태양, 삼목에스폼 등이 꼽혔다. 자산이 많고 저평가돼 있기 때문이다. 해당 기업은 “그럴 여지가 없다”며 부인하고 있지만 영풍처럼 2대 주주와 사모펀드가 손잡는다면 상황은 또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

부작용도 많아
국내 기술 해외 유출될라
물론 이런 과정에서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멀쩡한 기업의 지배구조가 흔들리면서 경영진이 그네 타듯 계속 바뀌면 당장 소속 조직원, 거래처는 불안해할 수밖에 없다. 고려아연 직원 A씨는 “당장은 업무에 지장이 없지만 주변 사람들마다 ‘회사는 괜찮나?’라고 물어볼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며 “어서 빨리 경영 정상화가 되길 바랄 뿐”이라고 귀띔했다.
상장사라면 소액 주주 피해도 예상된다. 최근 주식 시장에서는 ‘경영권 분쟁 종목’이라며 비슷한 유의 기업을 테마주로 분류하기도 한다. 당장 경영권 분쟁이 일어나지 않은 종목까지 작은 공시 하나에 주식이 튀어 오르다 떨어지다를 반복한다. 이런 과정에서 잘못 엮인 소액 투자자는 ‘피눈물’을 볼 수밖에 없다.
‘돈만 벌면 된다’는 국내외 사모펀드 참전이 자칫 국부 유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이번 국정감사에서 고려아연을 두고 정부 지원을 많이 받은 만큼 ‘국가기간산업’으로 지정, 해외 기업에 팔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김상봉 교수는 “국가 핵심 기술 보유 기업은 제도적으로 해외 유출 보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밸류업
경영권 분쟁이 주주 가치 높이기도
NH투자증권 보고서는 마무리 부분에 2006년 사모펀드 칼아이칸과 KT&G 사례를 다뤘다. 칼아이칸은 지분율을 5% 이상 확보하는 등 적대적 M&A를 통해 KT&G에 배당 확대, 유휴 부동산 처분을 요구했다. 칼아이칸은 주식이 오르자 지분 매각 후 철수했다. 이후 KT&G는 50% 수준의 배당 성향을 유지하는 등 주주 가치 제고를 위해 노력했다. 이처럼 적대적 M&A 갈등 상황에 놓였던 일부 기업은 상황 종료 후 기업가치를 높이거나 높일 의지를 보였다.
오정석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지금보다 훨씬 높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데도 후진적 지배구조 등으로 저평가된 기업이 있을 수 있다”며 “이 경우 어떻게 체질 개선할지, 기업가치를 높일지를 놓고 양측이 지분 경쟁을 한다면 건강한 ‘성장통’을 겪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수호 기자 park.suho@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81호 (2024.10.23~2024.10.29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