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말 확대경영회의를 앞둔 SK그룹 수뇌부가 사실상 매 주말 회의를 열고 있다. HBM(고대역폭메모리) 시장에서 기선을 잡은 SK하이닉스 주가가 고공행진을 벌이지만, 그 외 대부분 계열사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조정하는 리밸런싱에 사활을 걸었다. 논의 과정에서 검토 단계에 있는 여러 아이디어가 외부로 흘러나와 내부 동요가 적지 않자 서둘러 사업 구조 재편의 밑그림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실제 사업 재편까지는 험로가 예상된다. SK텔레콤 등 몇 곳을 제외한 SK그룹 대부분 계열사는 기업 여윳돈을 뜻하는 잉여현금흐름(FCF·Free Cash Flow)이 수년째 마이너스다. 여윳돈 곳간이 텅텅 비었단 의미로, 이대로는 부족 자금을 계속 외부에서 조달해야 한다. 자체 현금 창출 역량이 부족한 계열사는 제값에 매각하거나, 차입 의존도를 낮추기도 쉽지 않다. 과거 수년간 이어진 저금리 때 공격적인 차입과 인수합병(M&A)으로 자기자본이익률(ROE)은 개선했지만, 사업 간 연결·재조정을 등한시했던 게 고금리 국면에서 독이 됐단 지적이다.

사업 조정 난항 예상
지난해만 195개 기업 편입
재계에 따르면 SK그룹은 6월 말 확대경영회의를 앞두고 최창원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주도로 계열사별 리밸런싱 작업을 점검하고 조율하는 작업이 숨 가쁘게 진행 중이다. 확대경영회의는 8월 이천포럼, 10월 최고경영자(CEO) 세미나와 더불어 SK그룹 최고경영진이 주요 경영 전략을 논의하는 중요 연례행사 중 하나다. 재계 관계자는 “확대경영회의에 앞서 이사회와 주요 주주 설득, 조율 등 과정을 거쳐 사업 재편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며 “계열사끼리 투자 경쟁을 벌일 정도로 방만하다고 질타받았던 중복 사업 조정과 비핵심 사업 정리가 관건”이라고 전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여러 계열사가 투자를 받는 과정에서 주주간계약 등으로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경우가 많아 실제 의사결정을 내리고 집행하기까진 적잖은 시일이 소요될 것”이라 봤다.
사업 재편의 큰 원칙 중 하나는 비주력 사업 정리·매각이다. 최근 수년간 SK그룹은 손익 인식 목적의 지분 취득이나, 전략적투자자(SI)로 인수합병 시장을 휩쓸고 다녔다. 지난해 말 기준 SK㈜ 연결 대상 기업은 716개로 2020년 325개와 비교해 2배 이상 늘었다. 지난해에만 195개 기업이 SK㈜ 연결 대상으로 포함됐다.
이 과정에서 곳곳에서 잡음이 불거졌다. 투자 목적으로 지분을 취득한 곳은 주가 급락으로 평가손실이 큰 폭 확대됐다. 본업과 연결성이 거의 없어 자원 공유 등 시너지를 기대할 수 없는 부문에 중복 투자가 이뤄진 사례도 적지 않다. 최근 SK그룹이 장부가치 2000억원에 육박하는 중국 농업 기업 조이비오 지분 전량(13.3%) 매각을 추진 중인 것도 포트폴리오 재조정의 일환이다. SK그룹 최상위 지주사인 SK㈜는 본업과 무관한 식품 사업에도 중복 투자를 했다. 2020년 미국 대체 단백질 기업인 퍼펙트데이(1200억원) 투자를 시작으로 식물성 고기 업체 미트리스팜과 세포배양육 업체 와일드타입 등에 줄줄이 지분 투자했다.
사업 구조조정의 또 다른 큰 줄기는 2차전지 중심 재편이다. SK그룹 주요 계열사는 올 들어 사업 재조정을 위해 여러 TF를 출범시켰다. 핵심은 그린(Green) TF다. 그린 TF는 최근 SK그룹이 신설한 60여명 규모 별동대다. 친환경에너지, 배터리·소재 등 그룹 주요 미래 먹거리 사업을 포괄한다. TF장은 장용호 SK㈜ 사장이다. TF 리더는 류진숙 SK이노베이션 전략·재무부문 부사장이다. 류 부사장은 지난해까지 SK온 전략담당을 맡다가 올 초 SK이노베이션 전략·재무부문 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재계와 시장에서는 SK그룹이 2차전지 관련 핵심 사업부를 매각할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최태원 회장부터 최근 기자들과 만나 “결국 장기적으로는 전기차 산업이 지속적으로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최 회장 비서실장 출신으로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박상규 SK이노베이션 사장 역시 SK온, SK IET 등 계열사를 직접 거론하며 “5~10년 앞을 보고 투자해야 한다. 반드시 성과를 만들어내겠다”는 각오다.
SK그룹은 글로벌 컨설팅 기업 맥킨지에 배터리 사업 구조 개편에 대한 컨설팅도 의뢰했다. SK온을 SK엔무브와 합병한 뒤 상장하는 방안, SK IET 지분 매각 등이 논의됐으나 각론을 두고는 이견이 적지 않은 분위기로 알려진다.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큰 틀에서 2차전지 수직계열화 전략을 재점검하는 차원에서 SK넥실리스, SK IET 등 경영권 지분 혹은 소수 지분 매각 등이 아이디어 차원에서 거론됐던 것으로 알지만, 실제 매각은 쉽지 않아 보인다”며 “셀사업부만 남기고 소재전반사업부를 매각하면 당장 현금 유동성은 확보할 수 있지만 업황 회복 땐 자칫 더 비싼 돈을 주고 되사야 할 수 있다는 점이 딜레마”라고 봤다. 또 다른 관계자는 “SK IET의 경우 내부거래 비중이 너무 높아 이를 제외하고 나면 기업가치 측정이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고 우려했다.

‘숨은 부채’ 11조
설비 투자·차입 ‘쳇바퀴’
사업 재편과 맞물려 SK그룹 수뇌부를 잠 못 들게 하는 요인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 ‘숨은 부채’다. 숨은 부채는 사모펀드(PEF)와 주요 금융사에 상장을 조건으로 지분을 파는 프리 IPO나 상환전환우선주(RCPS)·전환우선주(CPS) 등을 뜻한다. 이는 회계상 부채가 아니라 자본으로 분류돼 부채비율 악화를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근 수년간 자금 조달 수단으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프리 IPO, RCPS, CPS 등은 형식적으로 자본으로 분류될 뿐 잠재적 상환 부담과 일정 수준 부채 성격이 내재돼 있다. 이 때문에 ‘무늬만 자본’일 뿐 실질적인 차입 부담은 장부상 부채보다 높다는 게 전문가 진단이다.
가령, RCPS 발행 땐 상장 요건 이행 등 투자자 요구 사항을 충족 못할 경우, 이자율을 대폭 상승시키는 스텝업(Step-up) 조항을 첨부한다. 그렇지 않아도 배당률이 높은데 스텝업이 붙어 있으므로 경우에 따라 금융 비용이 더 늘어날 수 있다. 리픽싱(Refixing·전환가액 조정) 조항이 없는 경우도 찾기 힘들다. 프리 IPO나 CPS도 큰 틀에선 다르지 않다. SK그룹은 최근 수년간 주요 계열사가 PEF에서 조 단위 자금을 조달해 신사업 투자에 썼다. SK E&S(3조1000억원·KKR), SK온(1조3000억원·한투PE 등), SK엔무브(옛 SK루브리컨츠·1조1000억원·IMM PE), SK에코플랜트(1조원·이음PE 등)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신용평가는 SK그룹이 2020~ 2023년 조달한 17조원 규모 자본성 자금 가운데 8조원은 부채 성격이 내재돼 있다고 분석했다. 재무적 불확실성이 큰 3조원을 더하면 모두 11조원이 실질적인 이자 부담이 있거나, 상환 압력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단 지적이다.
두 번째 우려 요인은 전기차와 수소에너지 등 미래 먹거리 사업 모두 막대한 설비 투자 사이클에 노출돼 있다는 사실이다. 하이테크 산업은 진화 과정에서 불연속적 패턴이 자주 목격되므로, ‘캐즘(대중화 전 수요 둔화)’ 구간 때 설비 투자·차입-자금 소진(Cash-Burning)-수요 공백 등 미스매치가 재무적 부메랑으로 돌변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SK그룹은 주력 반도체 산업에서 벌어들인 돈 대부분을 설비 투자에 쏟고 있어 곳간(잉여현금흐름·FCF)에 좀처럼 돈이 쌓이지 않는 구조다. 안정적인 잉여현금흐름 창출이 가능한 계열사가 몇 없는 가운데 또 빚을 내 전기차와 수소에너지 등에 막대한 설비 투자를 지속하는 것은 그룹 재무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당장 SK온이 우려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전기차 캐즘이 내년까지 이어질 경우다. SK온 북미, 유럽 공장 가동 스케줄은 2025년에 맞춰져 있다. SK온과 포드 합작법인 ‘블루오벌SK(2025년 1분기)’, 조지아 현대차 합작공장(35GWh·2025년 4분기)을 포함한 모든 공장이 완공돼 정상 가동될 경우 2025년 SK온의 글로벌 생산능력은 220GWh에 달한다.
가동률 저하가 지속될 경우 SK온은 고정비 부담 직격탄을 맞는다. 이미 지난 1분기 SK온 중대형전지 국내외 공장 가동률은 69.5%에 그쳤다. 2022년 86.8%, 2023년 87.7%에서 뚝 떨어졌다. 설비 투자 기반 산업은 대규모 고정비를 깔고 앉지만 생산량이 일정 수준을 웃돌면 단위 생산비용이 급감하는 이익 레버리지 효과를 누린다. SK온 등 2차전지 셀 제조사가 공장 가동률에 민감한 이유다.
특히 SK온은 후발 주자로 2차전지 업계에서 가장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한 탓에 최근 2년 새 달러부채가 2.5배(152%) 늘었다. 대부분 글로벌 공장 설비 투자에 쓰였다. 가동률 저하 지속 땐 고정비 부담에 달러 부채 급증에 따른 이자 부담까지 떠안아야 한다.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보다 원달러 환율 5% 상승 땐 SK온 법인세차감전순이익이 220억원 감소한다.
또 다른 그룹 미래 먹거리 수소 사업 역시 ‘캐즘’ 장기화로 고민이 깊다. SK그룹이 조 단위 투자를 단행한 미국 수소연료전지 기업 플러그파워는 최근 주가 폭락으로 그룹 안팎에선 입길에 올랐다. ‘수소 시대’가 각광받자 SK그룹은 지난 2021년 플러그파워에 1조6000억원을 투자해 지분 9.9%를 확보하고 최대주주에 올랐다. SK㈜와 SK E&S가 각각 8000억원씩 공동 투자하는 구조다. 주당 29.3달러에 약 5140만주를 취득했다. 1997년 설립된 플러그파워는 나스닥에 상장돼 있다. 차량용 연료전지(PEMFC), 물을 전기 분해해 수소를 생산하는 수전해 기술과 수소 충전소 건설 기술 등에서 핵심 역량을 갖췄단 평가다. 수소 상용화가 지체되고 양산 비용 증가 등으로 회의론이 부각되자 지분 가치가 폭락했다. 올 들어 플러그파워 주가는 2달러대까지 곤두박질쳤다.

신고가 SK하이닉스도 고민
끝없는 설비 투자 경쟁
주가 상승에 가려졌을 뿐 SK하이닉스 역시 속이 편치 않다. HBM 등 AI 반도체 설비 투자와 연구개발(R&D) 경쟁이 갈수록 격화하지만 SK하이닉스 곳간 사정은 여의치 않다. 안정적 현금 창출이 가능한 여러 사업부를 둔 삼성전자와 달리, SK하이닉스는 메모리와 낸드 등 설비 투자가 끝없이 반복되는 구조다. 이익 레버리지 효과로 재무제표상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뛰어나지만 기업 여윳돈인 FCF 측면에선 아쉬운 점이 적지 않다는 게 다수 전문가 시각이다.
금융투자 업계 추산에 따르면, SK하이닉스가 SK그룹에 편입된 2012년부터 2023년까지 10년간 거둔 회계상 순이익은 50조원에 육박한다. 반면, 이 기간 영업현금흐름에서 설비 투자(CAPEX) 비용과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 비용(약 70억달러·2021년) 지출 등을 제한 누적 잉여현금흐름은 약 3조원 중반대에 불과하다. 익명을 원한 반도체 업종 애널리스트는 “잉여현금흐름을 초과하는 배당금 지급과 M&A 등을 위해 SK하이닉스는 차입금을 좀처럼 줄이기 힘든 구조”라며 “그룹 편입 이후 10여년 동안 번 돈은 거의 다 공장 건설과 고가 장비 구입에 썼고 HBM 등 설비 투자를 위해 돈을 또 빌려야 하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라고 짚었다.
최근 최태원 회장이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앞으로 자본적지출(캐펙스·CAPEX)을 얼마나 더 투자하고 얼마나 더 갈 거냐 하는 것은 아직도 업계에 남아 있는 숙제 중 하나”라며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나라도 캐펙스가 많이 들어가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언급한 것도 설비 투자가 무한 반복되고 현금이 축적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고충을 토로한 것으로 해석된다. 재계 관계자는 “당시 SK하이닉스가 HBM 시장에서 선전 중이었지만 최 회장이 안도할 상황이 아니라는 취지의 언급을 해 다소 의외였다”며 “결국 업턴이 오더라도 설비 투자를 위해 또다시 차입을 늘리는 상황이 반복될 수 있어 유의미한 잉여현금흐름을 창출하지 못하는 반도체 산업 현실에 답답함을 드러낸 것”이라 돌아봤다.
[배준희 기자 bae.junhee@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61호 (2024.05.28~2024.06.04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