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세 시대’가 왔지만 유독 여자가 남자보다 더 오래 사는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일관되게 나타난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3년 생명표’에 따르면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여성 86.4세, 남성 80.6세로 여성이 5.8년 더 길다. 이는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다. 거의 모든 국가와 시대를 막론하고 여성의 수명은 남성을 앞질러왔다.
단순히 남성들이 더 잦은 음주와 흡연, 위험한 행동을 즐기기 때문일까. 물론 생활 습관은 중요한 변수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이토록 강력한 ‘수명의 성별 격차’ 뒤에는 훨씬 더 근본적인 이유가 숨어있을 것이라고 오랫동안 추정해왔다. 최근 과학자들은 그 비밀의 실마리를 풀어내는데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대규모 연구로 찾은 답은 수백만 년에 걸쳐 이어진 ‘진화의 역사’ 였다.
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 연구소 등이 참여한 국제 공동 연구팀은 포유류와 조류 1176종의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성별에 따른 수명 차이의 진화적 뿌리를 규명한 연구 결과를 10월 1일(현지시간) 과학 저널 ‘사이언스 어드밴시스(Science Advances)’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왜 어떤 종은 암컷이, 또 다른 종은 수컷이 더 오래 사는지에 대한 원인이 유전자와 짝짓기 전략에 있음을 밝혀냈다.
이번 연구에 앞서 올해 2월 뉴욕타임스(NYT)는 ‘왜 여성은 남성보다 오래 사는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 미스터리를 조명한 바 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과학계는 이미 유전적 차이가 수명 격차의 핵심 원인일 수 있다고 보고 있었다. 특히 여성에게 두 개 존재하는 X염색체의 역할에 주목했다.
이번 막스플랑크 연구소의 연구는 이 가설을 동물계 전반으로 확장해 증명했다. 핵심은 ‘이형(異形) 배우자 가설(heterogametic sex hypothesis)’이다. 성염색체가 서로 다른 쪽이 수명이 짧다는 이론이다. 인간을 포함한 대부분의 포유류에서 여성은 두 개의 동일한 성염색체(XX)를 갖는다. 반면 남성은 서로 다른 X와 Y염색체를 가진다. 이 경우 Y염색체를 가진 남성이 ‘이형 배우자’가 된다.
X염색체에는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유전 정보가 다수 포함돼 있다. 여성은 X염색체가 두 개이므로, 하나에 문제가 생겨도 다른 하나가 ‘예비 타이어’처럼 그 기능을 대신해 유전적 손상에 대한 방어력이 높다. 하지만 X염색체가 하나뿐인 남성은 이러한 유전적 결함에 훨씬 취약할 수밖에 없다. 연구 결과, 분석 대상 포유류의 72%에서 암컷이 수컷보다 평균 13% 더 오래 살았다.
흥미롭게도 조류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새들은 암컷이 ZW, 수컷이 ZZ 염색체를 가진다. 즉, 암컷이 ‘이형 배우자’다. 조류의 경우 연구 대상의 68%에서 수컷이 암컷보다 평균 5% 더 오래 사는 것으로 확인됐다. 성염색체의 조합이 수명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
유전자뿐만이 아니었다. 종의 번식 전략, 특히 ‘짝짓기 경쟁’ 역시 수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연구팀은 일부다처제 사회를 이루고 암컷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한 포유류일수록 수컷의 수명이 눈에 띄게 짧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고릴라나 바분 무리에서 수컷들은 더 크고 강한 몸집, 위협적인 송곳니 등을 진화시켜 왔다. 이는 암컷에게 선택받기 위한 필사적인 경쟁의 산물이다. 하지만 이런 특징을 유지하고 끊임없이 다른 수컷과 싸우는 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 결국 번식에는 성공할지 몰라도 그 대가로 자신의 수명을 깎아 먹는 셈이다. 반면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는 종에서는 성별 간 수명 차이가 거의 없거나 오히려 수컷이 더 오래 살았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러한 진화적 압력은 인간 사회에도 영향을 미친다. 듀크대학교의 심리학자 카일 부라사는 “남성이 여성보다 흡연이나 과음, 안전벨트 미착용, 병원 방문 기피 등 건강에 해로운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는 진화적으로 각인된 경쟁 본능이 현대 사회에서 다른 형태로 발현되어 수명을 단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물론 건강한 생활 습관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지난 9월 24일 국제학술지 ‘셀 리포트’에는 이를 증명하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실렸다. 스페인 연구진이 117세의 나이로 작고한 세계 최고령 마리아 브란야스 모레라 여사의 사례를 분석한 것이다.
모레라 여사는 매일 요거트를 섭취하는 등 건강한 식습관과 긍정적인 생활 태도를 유지했다. 분석 결과 그녀의 생물학적 나이는 실제 나이보다 23년이나 젊었으며, 노화와 관련된 유전자 변이가 매우 적고 염색체 말단(텔로미어)의 길이도 잘 보존된 것으로 나타났다. 개인의 노력이 노화 시계를 되돌릴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하지만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넘기 힘든 생물학적 차이 또한 분명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이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다. 에스트로겐은 면역 체계를 강화하는 효과가 있어 여성이 폐경 전까지 각종 감염병에 더 잘 저항하도록 돕는다. 반면 폐경 이후 에스트로겐 수치가 급감하면 여성의 심혈관 질환이나 알츠하이머병 발병률이 남성과 비슷해지거나 오히려 높아진다.